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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57화 (57/79)

57화.

“몇 년이라니. 지금 기본 수칙을 어기는 건데 영원히 멀어지겠지.”

오히려 시드의 진지한 대꾸로 더욱 더 공기가 무거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서, 레이나와 마찬가지로 징계를 무릅쓰고서라도 이베카에게 어떤 비밀을 말하겠다는 뜻을 표현했다.

“중징계라니…… 그런 걸 원하지는 않는데. 어차피 저 같은 사람이 갖고 있는 비밀이라면 별로 좋은 내용도 아닐 텐데요.”

역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동정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이베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어 보일 때마다 레이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들이 중징계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가슴속에서 울렁이는 이기심은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수사국에 계속 남아 있는 직원들이고 자신은 버티지 못했다는 박탈감이 그녀를 더 간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동정심을 전략으로 남의 징계까지 무릅써야 한다는 자기혐오가 그녀를 감쌌지만, 이미 모든 걸 알겠다는 마음을 한번 먹은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 오해를 받는 것보다는 진실이 낫겠어요. 제가 판단한 거니까 왕비님은 제 징계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진실?”

“관찰력이 그렇게 좋으시면서, 추론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시면서 왜 다른 건 못 보세요?”

“다른 거라뇨?”

“1차 습격 말이에요. 맞아요. 수사국에서 독단으로 꾸민 일이에요. 왕비님을 습격한 사람들도 수사국 직원이고, 법무국에서 뒤늦게 뛰쳐나와 왕비님을 구한 사람들도 수사국 직원들이죠.”

이베카는 가만히 레이나의 초록색 눈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원래는 대충 습격하는 척만 하다가, 저희한테 쫓겨서 사라지는 역할이었어요. 하지만 왕비님이 단검을 쓰시려고 했잖아요. 왕비님이 단검을 쓰시면 누구 하나는 죽을 텐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급소가 아닌 곳을 급히 찌를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단검 던지는 것만은 막아야 해서. 실제로 의료국에서도 간단한 상처라고 했잖아요. 왜 그런 건 생각 안 하시는데요.”

의심스럽다는 이베카의 눈초리에, 레이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쾅쾅 치다가 정확하게 이베카가 다친 옆구리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왕비님, 여기는 전혀 급소가 아니잖아요. 실제로 그때 피가 아주 많이 나온 것도 아니고…… 왕비님이 의식을 잃으신 건 그냥 너무 놀라서였어요. 모든 근육이 다 멀쩡했다고요. 게다가 정말로 암살을 꾀했던 사람이라면 무기에 독이라도 발라 두었겠지요.”

“그럼 대체 왜…… 왜 그런 연극을 꾸민 거죠?”

“당연히!”

레이나가 복잡한 눈으로 이베카를 잠시 바라보다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왕비님을 지키기 위해서요.”

잠시 묘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이베카가 무언가 묻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이베카!”

문이 벌컥 열리고, 급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들이닥친 사람이 있었다. 이베카는 물론 레이나와 시드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어디서부터 왔는지는 몰라도 호위무사마저 없이 홀로 달려 들어온 다니엘은 숨까지 헐떡이고 있었다. 레이나와 시드의 눈에 경악과 같은 표정이 스치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재빠르게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 세 개를 훑어본 뒤 이베카의 어깨를 다급하게 잡았다.

“괜찮아?”

“네?”

밑도 끝도 없는 반말은 둘째 치고 그의 푸른 눈에 이성이 없는 것 같아 이베카는 한 번 더 놀랐다. 그녀가 급히 일어나려는데, 순간 머리가 핑글 돌아 균형을 살짝 잃었다. 잠시 비틀거리는 그녀를 다니엘이 황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시드와 레이나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했지?”

흡사 당장이라도 사형 선고를 내릴 것같이 살기가 일렁거리는 시선이었다. 레이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말을 더듬으며 일어섰다.

“저, 전하? 지금 이 상황이…… 어?”

일어서려던 레이나 역시 잠시 어지러운지 테이블을 붙잡고 간신히 섰다. 다니엘이 번득이는 눈으로 말했다.

“방금 왕비궁으로 가는 찻잎이 바꿔치기 된 걸 내 시종이 확인했다.”

그 말에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던 시드마저 심각한 표정으로 일어섰지만 그 역시 한 번에 벌떡 일어나지 못했다. 다니엘은 이베카를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은 채로 날카롭게 말했다.

“너희 수사국 개개인이 집단을 위한 도구라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베카만은 안 돼. 두 번씩이나 수사국의 판단이라는 이유로 이베카를 내게서 데려가지 마라.”

테이블을 짚고 일어선 레이나는 숨을 헐떡이다가, 이왕 중징계를 각오한 바에야 내일이라는 건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베카는 저희에겐 소중한 수사국 동료입니다. 저희 역시 전하께서 더 이상 이베카의 상처를 이용하시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어요.”

다니엘과 수사국 직원들 사이의 긴장이 팽팽했다. 레이나가 들려 주던 이야기는 끊겨 있었고 이베카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둘 다 자신을 두고 자신만 알지 못하는 과거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다니엘은 세상 간절한 듯 이베카를 안고 있었지만, 이베카는 사실 일어날 때 잠시 휘청거렸던 것 말고는 몸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정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 레이나와 시드도 마찬가지 같았다.

찻잎에 문제가 있다고 했으나, 그들은 이베카의 형편없는 실력 때문에 억지로 한 모금 마신 것이 다였다. 궁에 들어오는 찻잎은 모두 다 까다로운 독성 검사를 거친다는 것을 판단할 때 이 찻잎은 독이 아닌, 신체 반응을 느리게 하는 찻잎이었다.

그리고 티타임 직전에 바꿔치기 된 이 찻잎의 반입 목적은…….

“전하, 조심하세요!”

이베카는 꿈틀거리며 다니엘의 품속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품속에 손을 넣어 단검을 꺼내 빠르게 창밖으로 몇 개 던졌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위기에 대한 본능이었다.

최근, 이베카는 항상 수사국 사람들과 함께했으며 그녀 스스로도 체술이 뛰어났다. 어지간한 암살자를 보내더라도 그녀를 해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 모두의 신체적 반응을 느리게 하면 되는 문제였다. 문 밖에는 그녀의 호위무사들이 있었고 그렇다면 그들을 노릴 수 있는 곳은 창밖뿐이었다. 그녀의 단검들 중 하나에 맞았는지 나무에서 누군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독은 아닐 테니, 분명 추가 습격이 있을 거예요.”

그들이 모르는 게 있었다면 이베카의 차 내리는 솜씨가 좋지 않아 셋 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건 이베카가 그 어떤 귀족 영애들과도 티타임에 어울리지 않아 밖으로 퍼져 나갈 일이 없었던 정보였다.

시드와 레이나가 급하게 서로를 바라본 뒤, 시드 혼자 창밖으로 뛰쳐나갔고 레이나는 이베카와 다니엘의 곁에 남았다. 그러는 사이 순식간에 자객 하나가 창문을 넘어 들어왔다. 이베카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급히 막은 사람은 레이나였다.

“비켜요, 왕비님! 왕비님은 근접전에 약해요.”

번개같이 앞으로 나선 레이나는 자객의 검을 어깨로 바로 맞은 뒤, 괴력으로 단숨에 그를 창밖으로 밀어붙였다. 자객은 그대로 다시 창밖으로 떨어졌다. 돌아선 레이나의 어깨에 피가 뚝뚝 흘렀다.

“레이나!”

이베카가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으나, 다니엘이 그녀를 붙잡고 레이나에게 가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추가 습격에 대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상태에서 레이나와 다니엘은 이베카를 서로에게서 지키겠다는 듯이 첨예하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다행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가 정신을 잃은 자객 하나를 끌고 다시 창을 통해 도약하여 들어왔다.

“습격자는 총 넷, 그 중 시체는 총 세 구 나왔습니다. 그 중 둘은 레이나와 왕비님께서 처리하셨고 하나는 제가 죽였습니다. 화단에 두었고 다른 수사국 직원이 추가 수사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한 명은 생포했습니다.”

그는 딱딱한 어조로 다니엘과 이베카에게 보고하듯 말했다. 상황이 끝났음을 인지한 레이나는 급히 품 안에서 붕대를 꺼내 스스로 응급 처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자는 바로 수사국으로 가서 심문할 계획이었으나, 전하가 저희를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 일단 데려왔습니다. 이번 습격은 저희와 정말로 관계가 없습니다.”

“다른 습격은 했단 얘기군요.”

다시 존댓말을 시작한 다니엘의 분노를 온 몸으로 받아가며, 시드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첫 번째 습격은 단독 소행 맞습니다. 왕비님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때는 사망자가 없었다는 점을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사국에서는 무고한 피를 희생시키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모로 위험할 뻔했고, 전하 덕분에 왕비님이 빠르게 대처하실 수 있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때서야 헐떡거리며 뒤늦게 왕비궁에 도착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의 호위무사들이었다. 다니엘은 다시 공손히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선 레이나와 시드를 한 번씩 살펴보고 천천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수사국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자는 제가 먼저 데려간 뒤 수사국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말을 막은 것은 이베카였다. 그녀는 부드럽게 다니엘의 팔을 잡으며 가만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전하, 저희는…… 대화 중이었어요. 마저 이야기하고 싶어요.”

“첫 번째 소행으로 왕비가 다쳤습니다. 의심은 했지만, 확실히 확인한 이상 수사국 사람들은 곁에 둘 수 없어.”

“저를 해하려 했다면 진작 그럴 수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레이나는 절 구하려다가 이렇게 다쳤어요. 더 나눌 이야기도 있고, 적어도 오늘만은 의심하고 싶지 않아요.”

다니엘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이베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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