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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55화 (55/79)

55화.

“안 됩니다!”

안절부절 못하며, 시드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의 눈이 혼란스러움에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마 이베카가 레이나를 죽이는 상황만은 막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안 돼요, 왕비님.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했다니까.”

이베카는 차갑게 대답하고,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단검을 레이나의 목에서 거두고 벽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정확히 시계 바로 밑에 꽂힌 단검을 보며 시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수사국이 나를 없애기로 결정했다면, 2년 안에 당연히 죽겠지.”

“왕비님.”

“난 그냥 이런 모든 연극이 지긋지긋해졌을 뿐이고……. 그러니까 지금 선택권을 줄게.”

“네?”

“죽일 거면 지금 죽여.”

이베카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게 수사국 판단이면 따를 테니까.”

시드와 레이나 모두,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이베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개인의 안위에 눈이 멀지 않으며 조직의 판단을 믿는다.”

“…….”

“나도 이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

그녀는 단검을 더 꺼내지도, 자신을 방어하려는 몸짓을 취하지도 않은 채 침착하고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나를 없애는 것이 조직의 판단이라면 따라야지. 너희는 당연히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는 한 번 수사국에 몸담았던 것을 절대 잊지 않아.”

그 말에, 레이나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드 역시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벌게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하지만 난 법무국 직원이기도 해. 지금 나를 없애지 않으면, 당장 수사국을 고발해서 손발을 자르고 그 사이 대헌법을 완성시킬 거야.”

“어, 어떻게……. 왕비님…… 끄흑, 끅, 그런 생각을…….”

“정말이야. 죽여도 돼.”

이베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대헌법에 대한 아쉬움만 아니면, 별로 아쉬운 인생도 아냐.”

물론 다니엘의 얼굴이 생각났지만, 괴로움은 오로지 그녀만의 몫이었다. 그의 옆에서 그녀는 행복한 만큼 망가졌다. 아마 그녀가 지금 죽는다고 해도, 다니엘은 영리하고 치밀한 사람이니 그녀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마음에 있는 사람은 다른 여자니까.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어쩌면 정말로 자신이 되고 싶은, 그런 멋진 여자.

“기회는 지금뿐이라니까. 죽여. 괜찮아. 대헌법은 완성되지 않았고, 수사국에서는 직권을 사용할 수 있고, 나는 그 결정을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

“못 죽이겠어? 하긴. 왕족 시해죄로 수사국에 엄청난 민폐가 되겠구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이베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나가서, 왕궁의 발코니에서 스스로 죽을게. 그럼 남들도 다 내 자결을 보겠지.”

“왕비님!”

레이나가 놀라서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희는 마지막으로 증언하면 돼. 에셀번 백작의 압박으로 심리적 부담이 너무 커 보였다고.”

몸을 비틀어 빼내는 이베카의 허리를 어떻게든 레이나가 감싸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마세요. 대체 왜 이러세요, 왕비님.”

“뭐 하는 거야? 습격해서 옆구리에 칼을 찌를 땐 언제고, 알아서 죽어 준다는데 왜 이래?”

이베카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양되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왕비님, 제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매달린 레이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베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레이나가 자신의 앞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눈물조차 믿기 어려웠다.

“이런 위선은 싫어. 다 알고 있는데 이딴 식으로 행동하지 마. 소름끼치니까. 겉과 속이 다른 주변인들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했잖아.”

깜짝 놀랄 만큼 히스테리가 가득한 말에 대답한 사람은 시드였다.

“저희에게 비밀이 있어, 어쩔 수 없이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인정합니다.”

“…….”

“하지만 잘못 알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그의 눈에 핏줄이 붉게 터져 있었다.

“왕비님이 수사국에 몸담았던 것은, 저희도 절대 잊지 않습니다.”

무슨 뜻일까. 이베카는 눈동자를 굴렸다.

“오늘은…… 출근하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너무 감정적이십니다.”

“감정적이라니, 무슨 소리야!”

시드의 말에, 이베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폭발시킨 모습을 처음 본 레이나가 덜덜 떨면서 그녀를 더 꽉 끌어안았다.

“그럼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 너희들 원하는 대로 죽어 준다는데 왜 또 안 된대!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데? 대체 왜!”

그녀답지 않게 소리를 지르던 이베카는, 그대로 레이나의 품속으로 힘을 잃고 쓰러졌다.

* * *

“의료국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

레이나는 쓰러진 이베카를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히며 시드에게 조용히 물었다. 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럼 전하께도 알려지게 돼.”

“……그게 어때서.”

“지금 왕비님은 정서가 몹시 불안정하셔. 전하를 뵙게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지 잘 모르겠군. 단순히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전하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 건지도 짐작이 안 가.”

“지금 왕비님께 절대적인 사람이라는 건 확실하지.”

시드가 핏줄이 다 터진 두 눈을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레이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고 있는 이베카를 바라보았다. 이베카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레이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아.”

“…….”

“일단 알리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도 법무국에는 연락해야겠지. 손님이 와서 출근이 힘들 수 있다고.”

시드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에게 법무국으로 심부름을 보내고, 복잡한 표정으로 벽에 기댔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시드.”

조용히 정적을 깬 것은 이베카의 옆에 앉아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레이나였다.

“이대로 계속 모든 걸 숨기는 건…… 왕비님께 너무 고통 아닐까.”

“…….”

“무슨 마음으로 우리를 곁에 두셨는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와 웃고 대화하셨는지 나는 그 속마음이 짐작도 안 가. 이제 깨어나시면 대체 어떡할 건데. 계속 이렇게 불행 속에 사시게 놔둘 셈이야?”

“하지만…….”

“일부만, 일부만 말씀드려도 되는 거잖아. 마음이라도 편하시게. 이러다 정말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셔서 큰일이라도 나면 어쩔 거야? 나는…….”

레이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비님이 불행하신 게 싫어.”

“…….”

“그래서 전하가 못 미더워. 무슨 생각이신지.”

그 말에 시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동의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다니엘은 불행했던 이베카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것들을 모두 다 혼자 제공하고 있었다. 유일한 가족, 유일한 동료, 유일한 친구는 물론이고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일까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어 그들은 불안했다.

“전하가 정말로 이브를 사랑하셨다면…….”

레이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드셨을까.”

“…….”

“그 어느 가설을 세워 봐도 다 말이 안 돼.”

다니엘은 과연 이베카가 이브인 것을 눈치챘을까. 수사국의 비기야 당연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사국 직원들이 외형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은 민간인들에게도 가끔 도는 이야기였다.

수사국에서는 다니엘에게 이브가 떠났다고 말했고 그녀를 찾으라는 명령도 내려와 그들의 인연은 그걸로 끝난 줄 알았지만, 이베카를 굳이 왕비 자리에 올린 것은 당황스러운 결과였다.

만일 이베카가 이브인 것을 안다고 해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이런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레이나의 생각이었다. 꽁꽁 숨겨서 소중히 가둬 두어도 모자랄 판에 만인에게 이베카의 이름을 알려 버렸다. 이건 이베카의 위치와 능력을 이용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베카가 이브인 것을 모른다고 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마음에 둔 상대는 따로 있으면서 이베카를 두고 약점을 어르고 달래 가며 혼란의 전면에 세운 것이다. 에윌과 안리크의 말 그대로 이베카의 마음을 쥐고 흔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이나의 의견으로는, 그 어느 쪽이든 다니엘은 이베카에게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시드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니엘이 워낙에 속을 알 수 없는 모호하고 계산적인 군주였기 때문이다.

“난 말할 거야. 일부만이라도.”

레이나가 결심이 섰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마음고생하시는 건 차마 못 보겠어.”

시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그가 침묵한다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시드, 있잖아.”

레이나는 그가 대답이 없어도,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마력은 사라지고 있어. 고대 마법도 30년 후면 풀려. 난…… 사실 30년 후를 기다렸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거든. 그런데 이 상태라면 왕비님은 30년 후까지 사실 수조차 없을 것 같아.”

* * *

“출근을 안 했다고 해서 많이 놀랐는데.”

“아…… 별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이베카는 오후 늦게 찾아온 다니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침에 아버지를 만났더니, 두통이 찾아와서 하루 쉬고 싶더라고요. 도저히 법전을 볼 기분이 아니어서.”

“그래요.”

다니엘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댄 채 부드럽게 말했다.

“기특하네요. 지치면 쉴 줄도 알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건 다 해요. 뭐든 괜찮으니까.”

그녀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고 손을 놓아 준 그가, 그래도 그녀에게서 손을 뗄 수 없다는 듯이 즉시 검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또 하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이베카는 살짝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산책 가고 싶어요. 하루 종일 왕비궁을 안 나갔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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