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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53화 (53/79)

53화.

“약속해, 이브.”

그가 그녀를 꽉 안은 채 힘주어 몇 번이나 말했다.

“날 혼자 두지 마. 너 없는 내 삶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 이 캄캄한 왕궁에 제발 날 내버려두지 마.”

“아……. 아으읏…….”

“나는 이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널 기다렸어. 보내 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그냥 참은 거였어. 그러니까 이제 아무데도 가지 마. 제발.”

이베카는 머리가 울릴 정도의 쾌락과 발끝이 저리는 것 같은 떨림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 *

맑은 정신으로 그의 침실을 나오며, 이베카는 수사국장 루카스에게 즉시 다음 날의 독대를 청했다. 이미 생각은 모두 마친 터였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서는 길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레이나였다.

“이브.”

“아, 선배님.”

“어떻게 된 거야, 너?”

짧은 말에 모든 질문이 다 담겨 있었다. 이베카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쉬었다.

“전하의 침실엔 왜 들어간 거고, 대체 국장님께 독대는 왜…….”

“시드 선배님은요?”

“……연가야.”

“왜요?”

“…….”

“선배, 알고 계셨어요?”

이베카의 차분한 질문에, 레이나는 머뭇거리다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그냥 어제 들었어. 잔뜩 취해서 중얼거리는 거.”

“…….”

“나도 전혀 몰랐어. 시드가 그런 티를 냈다면 그 동안 내가 너한테 이런 저런 주책 다 떨었겠니? 내가 생각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 정도로 모지리는 아냐.”

“시드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몰라, 딱히 별 말도 없이 계속 술만 마시고 그냥 뻗더라고.”

이베카의 표정에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졌다.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도 고통이었다. 정말 닥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외면하고만 싶은 상황. 그래서 그녀는 외면을 택했다.

“아,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그래. 사람 마음이 안 움직이는 게 네 잘못인가.”

레이나는 그녀의 팔을 흔들며 애써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밝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이베카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근처 벤치에 앉자,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시드가, 음, 사람은 좋은데, 남자로서의 매력이 없을 수도 있지. 안 그래?”

“뭐…… 그렇지는 않아요. 그냥 제가 다른 남자를 더 좋아해서 그런 거죠…….”

“……그게 전하는 아니지?”

“…….”

이베카가 말이 없자, 레이나는 불안해져서 재촉하듯이 말을 붙였다.

“그냥, 시드가 너무 어려 보이니까 애기 같고 동생 같아서 그런 거지? 그렇지?”

“그렇게…… 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렇게 전할 거야. 평생 놀려먹어야지.”

“선배, 너무한데요.”

“그래도 그게 차라리 낫지.”

레이나가 복잡한 눈으로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국왕이 라이벌이라는 건 진짜 너무 힘든 일이잖아. 불충스럽고.”

“……라이벌 아니에요. 어차피 뭐, 어떻게 잘될 사이도 아니고.”

“그럼?”

“제가 언제나 말하지 않았나요, 선배.”

“…….”

“애정은 관성, 순정은 자기기만, 욕정은 환상.”

“이브.”

“그냥 환상의 밤이었던 것뿐이에요. 어차피 둘 다 잊어야 할.”

‘밤’이라는 말에, 레이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브, 전하와 네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전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너는 전하께 환상 따위가 아니라 엄청나게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럼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은 있어?”

“아뇨. 감당 못하죠. 제 사정 아시잖아요.”

이베카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싱긋 웃었다.

“도망갈 거예요.”

“어디로?”

“과거로요.”

레이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

“어차피 수사국에서 더 버틸 수는 없어요. 이제 제가 필요 없는 곳인걸요. 제가 질질 끌고 있었을 뿐이지 정해진 결론이었어요.”

“아냐, 이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저는 이 길로 국장님께 가서 전입 신청을 내고, 기억 삭제를 요청하려고요.”

“이브, 어떻게 너…….”

“나중에 이베카를 어쩌다 보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생각보다 별 볼 일 없고 엄청 소심한데다가 음침하기까지 한 애니까요. 선배가 아시던 저랑 완전 다를걸요. 얘기해 봤자 별로 재미도 없을 거예요. 워낙에 주눅 들어 있어서.”

이베카가 레이나의 손을 잡으며 회한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이미 모든 결정을 마친 뒤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존감도 낮고, 속마음도 제대로 말 못하고, 남 눈치 보느라 자신을 끊임없이 갉아 먹으면서 남의 관심만을 갈구하던 어린애가…….”

레이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가 기억을 지운다고 했을 때 화를 낼 수 있어도, 수사국 직원이므로 그 선택에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수사국을 나간다는 것 자체가 개인에게는 엄청난 타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님들을 만나, 정말로 많이 변했어요. 당당하고 쾌활하고 자신감 있게 말이에요. 옛날엔 왜 그렇게 갖지 못한 가족에 집착했는지…….”

“이브…….”

“함께 어울려 주고, 제가 해낸 일을 인정해 주고, 소통해 주는 몇 사람만 있으면 금방 생길 그 자존감이 제 어린 날에는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를 일이죠.”

이베카는 레이나를 따라 우는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배님들 덕분에 아예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어서, 엄청 좋았어요. 그래서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해요. 나중에 혹시나 멀리서 이베카를 보면 저렇게 잔뜩 움츠린 애를 내가 사람 만들었구나, 라며 뿌듯해하셔도 돼요.”

“……이제 어떻게 할 예정인데. 어디로 전입할 거야? 정보국?”

“아뇨…….”

이베카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늘로 수사국의 이브 진도 사라지고, 자매들과 닮게 만들었던 옅은 금발 머리도 끝나고, 오밀조밀한 귀여운 외모도 신기루처럼 없어진다.

“법무국 어떨까요?”

“……응?”

“어차피 수사국의 전입 요청은 아무 곳이나 받아 주니까요. 저 법무국 일 잘할 것 같아요. 그런 말을 들었거든요. 많은 사람들을 대변해 줄 줄 안다고.”

“하긴.”

레이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중얼거렸다.

“거기가 뭐, 부서도 작고 일이 없긴 하지. 법전 들여다보는 건 좀 지루하기 짝이 없겠지만.”

“아, 선배님. 그런 이유로 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법을 다룰 때 귀족 출신도 하나 있으면 괜찮겠다 싶어서 가는 거라고요. 전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좋아요. 음, 은근히 관심이 필요한 성격이라서 그런가.”

“…….”

“하지만 그나마도 뭐, 얼마나 다닐 수 있을지 모르죠.”

이베카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다시 이베카 데 에셀번이 나타나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소속은 에셀번이 되니까. 아마 뭐 썩 좋지 않은 자리로 혼사가 잡힐 테고 열여덟의 정신 연령을 가진 이베카는 어쩔 수 없이 에윌의 뜻에 따를 것이다.

그럼 법무국을 계속 다닐 수나 있을까.

“정말 고마웠어요, 선배님. 수사국과 선배님들 덕에 저는 진짜 아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거든요. 시드 선배님께도 꼭 그렇게 전해 주셔야 해요.”

레이나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느라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게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법무국 제복을 입은 검은 머리의 귀족 출신 직원은 이제 레이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함께 임무를 마치며 기울였던 술잔이나 낄낄거리며 밤새도록 떨던 수다, 야근을 하면서도 벌게진 눈으로 서로를 놀리던 밤들은 이제 일방적인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아무리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그녀와 함께 했던 ‘이브 진’은 세상에 없게 된다.

“물론 저는 전하를…… 음, 사랑하긴 했지만, 사실 제게 영향을 엄청나게 끼친 사람들은 수사국과 선배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마지막까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아니라 수사국 직원일 수 있는 거고요.”

“……끄윽, 흑, 이브…… 끄윽…….”

“저는 수사국의 직원으로서…… 국왕 앞에서도 비밀 유지의 강령을 지켰으니까……. 수사국에서도 저를 전하에게서 보호해 주시겠죠?”

이베카는 농담 삼아 밝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베카를 보시면 너무 다른 사람이라 엄청 배신감 드실 텐데……. 만일 다 알게 되시더라도, 처음엔 오기로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식으실 게 뻔해요. 그건 너무 비참한 일이잖아요. 어차피 기억에야 없겠지만.”

“……흑, 네가 그렇다면…… 크윽, 끅, 그렇겠지……. 전하께서는, 흑…… 속을 알 수가 없으신 분이니……. 히끅, 계산적이시니까…… 널 곁에 두었다가도…… 히끅, 분명히 이용하실 거야. 차라리 시드랑 만남을…… 흑, 주선하면 주선했지……. 히끅, 전하께선 절대 모르시게…… 끅, 할게.”

결국,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레이나를 이베카가 꼭 안아 주었다.

“시드 선배님과는 인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이베카는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제 마음, 잘 전해 주세요.”

이베카의 눈이 정든 수사국 숙소를 훑었다. 아마 그녀는 이제 에셀번 백작가에 다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모든 기억이 지워지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좌절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지난 4년간이 완벽한 실패라고 생각하겠지. 더 의기소침해지고 더 음울해질 것이다.

‘전하, 인사하지 못하고 떠나요. 저는 아직 수사국 직원이니까요.’

그녀는 멀리 보이는 왕궁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처럼 숨기는 것이 있거나 사정이 복잡한 여자 말고, 태생적으로 밝고 당당한 사람 만나세요. 그런 사람은 정말로 많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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