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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49화 (49/79)

49화.

다니엘의 목소리는 평소와도 같이 상냥했으나 그래서 살짝 엉킨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제복 차림에 이질감이 심했다. 이베카는 그의 푸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그의 앞에 조용히 섰다.

“지긋지긋하군.”

그가 대답 없는 이베카에게서 눈을 뗀 채 피식 웃었다.

“왕족이라는 건 끔찍해. 결국 서로의 피를 보고야 말지.”

“전하…….”

이베카는 잠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서로의 피’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하나였다.

“혹시, 아셰 왕녀님의 아이 때문이신가요.”

그의 얼굴은 평상시처럼 단정했으나 흐트러짐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건조했다.

“그 아이는 여러모로 골칫덩어리였어. 반란군과 아메탄이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고, 제국에게 들키면 아메탄은 그대로 멸망이야. 아무리 둘로 쪼개져 있다고 해도 군사력에서 비교가 안 되지. 정말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아셰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그 아이를 없애고 싶었지.”

“…….”

“내 손을 더럽히기 싫어 혁명군에게 아셰의 임신 사실과 아이를 없앨 수 있는 물약을 전했거든. 데려가서 지키거나, 아니면 깔끔하게 아예 정리하든가 하라고. 아메탄 밖에서 해결하고 싶었어. 하지만 빌어먹을 공화주의자들은…… 주군과 충성의 개념이 없더군.”

지난 번 아셰와 다니엘이 만났을 때, 아이가 없어진 배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었다. 아이가 없어진 후에 다니엘은 배후를 추적했을 테고, 만일 짐작대로 반란군 총독이자 아이 아버지인 이단이 아이를 없앴다면 이렇게 혼란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베카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다니엘은 이단에게 선택권을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정보를 받은 이단의 아랫사람이 독단으로 아이를 없애 버린 것이 분명했다.

결론적으로는 다니엘이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아셰의 아이는 죽은 것이다. 그에게 정말로 그럴 의도까지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된 내가 처음 든 생각이 뭔지 알아?”

“…….”

“아셰는 내 형을 죽이고…… 나를 끔찍한 이 자리에 밀어 넣었지.”

이베카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걔도 내게 잘못했다는 얘기야. 우리의 셈법으로는 난 잘못한 것이 없어. 게다가 그 아이와 아메탄…… 국왕으로서 뭘 선택해야 했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베카는 제국에 다녀오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보았고, 황제의 어마어마한 마법도 실감했다. 반란군 총독을 왕궁에 숨겨 준 사실을 들켰다면, 약소국인 아메탄은 그대로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망명한 예술인의 인권을 지켜 준답시고 정작 죽여야 할 리한 카드민을 죽이지 못해 널 사지로 보냈으면서…….”

다니엘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번 쓸었다.

“결국 이렇게 숨도 못 쉬어 본 조카를 죽인 왕이 되는군.”

이베카는 가만히 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왕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두의 눈에 그는 피의 왕위 쟁탈전을 거쳐 정의의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선량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서로를 죽이려고 온갖 권모술수를 쓰는 다른 왕족들과는 다른 신사적이고 올바른, 아메탄의 젊고 아름다운 왕.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결국 그들과 같은 교육을 받고 자라 와서 형제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오히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임을 이베카는 뼛속 깊숙하게 알고 있었다.

“나 자신이 환멸스러워 미칠 것 같지만, 사실 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게 끔찍해.”

“……무슨 뜻이신지.”

“죽은 조카에 대한 애도와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 왕족의 자기혐오는 여기까지라는 거야. 이제 이 연무장을 나가면 난 또 아메탄만을 생각할 거야. 네가 무사히 늙어서, 라인볼을 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니까.”

그 말에 이베카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무심결에 그녀를 흘끗 바라본 다니엘이 그녀의 눈물을 보고 놀랐는지 곧장 다가와 양팔을 잡았다.

“……이브, 왜 그래?”

“아, 아녜요.”

이베카는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황급히 눈물을 닦았다.

“왜, 네 세상과 너무 달라서…… 역시 왕비는 못하겠구나, 싶어?”

“아니, 그게 아니고…….”

“역시…… 네 단순하고 정의로운 인생에 복잡하고 계산적인 나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눈이 마주쳤다. 그의 푸른 눈은 아까와 다르게 이상한 서글픔을 지니고 있었다. 조카를 죽였다는 자기혐오나, 이 모든 길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그저 한 여자에게 거절당하고 있는 남자의 서러움이었다.

아주 방금 전, 시드에게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가짜 껍데기가 뭐라고 이렇게 좋은 남자들이 이런 얼굴을 하게 만드는지.

“내가 여기를 나가면, 난 또 옛날과 똑같아질 거야. 다음에 널 보면 내가 시킨 보고서에 대해 물을 테고, 내가 맞춰 볼 테니 날 좀 좋아해 달라고 말하겠지.”

“…….”

“나 같은 인간은 싫다는 말을 하려면 지금 해. 내 바닥을 봤을 때에.”

잠자코 정적을 지키고 있다가, 이베카는 한숨을 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전하, 이게 전하의 바닥이라면 너무 준수하신걸요.”

카이든의 말대로, 이 남자를 위로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었다. 아메탄에서 그녀만이, 오로지 지금만 할 수 있는 일. 이 연무장을 나가면 그는 이제 위로 따위는 필요 없는 냉정한 왕으로 돌아가고, 이베카는 다시 갈 곳을 잃은 어린애처럼 밀려오는 시간이 버거운 어정쩡한 위치가 된다.

이 연무장을 나가면…… 그녀는 다시 수사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시드의 고백은 그녀를 더 몰아붙일 뿐이었다.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동료들마저 이제 제대로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드와 옛날처럼 농담 따먹기를 하고, 레이나와 셋이서 술을 마시며 낄낄거릴 자신이 없었다.

수사국에서는 이미 자신이 쓸모가 없고, 그녀 역시 수사국이 불편해졌다.

모든 관계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모두 사라진 지금, 그녀는 수사국에 더 남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혼자 남아 멍하니 서 있다가 연무장의 문을 연 그 순간부터 이베카는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오늘은 이브 진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하. 저도 제 바닥을 보여 드릴까요.”

그녀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호위무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가 왼손으로 단검을 쥐고 과녁을 겨누었다. 이미 그녀의 실력을 사냥터에서 본 바 있는 다니엘은 별다른 감흥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점차 표정이 굳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이베카의 손에서 단검은 떠나가지 못했고, 결국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제국에 다녀오고, 암살에 실패한 뒤 단검이 던져지지 않아요.”

“이브.”

“이제는 유능한 수사국 직원이라고 볼 수가 없죠.”

벌벌 떨리는 그녀의 팔과 참담한 표정을 다니엘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는 현실을 다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해 질질 끌었어요.”

그녀의 품에서 나오는 단검들이 족족 손에서 던져지지 못하고 툭툭 힘없이 떨어졌다.

“근데 전하는 이 연무장에서 나서면 모든 걸 받아들이실 거잖아요.”

이베카는 다리에 힘이 풀려,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털썩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저도…… 저도 받아들여야 하는데.”

“뭘.”

“제가 더 이상 유능한 수사국 직원이 아니라는 거.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다는 거. 동료들과 예전과 같이 지낼 수 없다는 거.”

눈물에 무릎이 축축해졌다.

“……근데 그게 저는…… 너무 힘들어요.”

이베카는 스스로가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왕 앞에서 자신이 더 힘들다며 징징거리고 있는 꼴이었다. 그는 강하고 야무진 여자를 좋아했다. 이베카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실망했을 것이 뻔했다.

“이브.”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지척에 들려왔다. 이베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럼 수사국을 나와.”

속삭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말투였다.

“……왕비가 되어 줘. 단검 같은 건 던지지 못해도 돼. 내게 너는 그대로 이브 진인데.”

“…….”

“네가 왜 아무 곳에도 쓸모가 없어……. 순서는 조금 바뀌었지만, 내게 오는 길이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이베카는 그의 푸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울지 마, 이브.”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눈을 훑고, 볼을 감쌌다.

“네가 우니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전하.”

“이런 기분 처음이야. 타인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워서 미칠 것 같은 이런 감정.”

“…….”

“나를 사랑해 봐. 그러면…… 그러면 이 모든 게 괜찮아지는 거잖아. 나를 사랑해서, 그래서 수사국을 그만두면 되는 거잖아…….”

그러나 이건 그녀의 사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수사국을 그만두면 이브 진도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렇게 두 눈을 감고 한 남자의 손만 잡은 채로 도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응? 어떻게 내가 유혹하면 돼?”

연무장은 넓었고 아무도 없었지만, 그의 속삭임은 낮고 작았다.

“조카를 죽인 내가, 오늘까지도 너한테 눈이 멀어서 자기혐오까지 집어치운 채 이렇게 비는데…….”

서로가 너무 가까워져, 이제 다니엘의 숨결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다정하게 웃어 주고, 왕비 자리를 약속하고, 온갖 매너를 다 지켜도 너는 왜 꼼짝도 안 해. 이런 눈으로 날 바라보면서, 왜 한 발자국을 내게 안 오는 건데.”

“…….”

“네가 너무 가진 게 많아 내게 안 오나 고민하던 밤이 있었지. 그런 게 아닌데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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