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에셀번의 천덕꾸러기 셋째 영애가 수사국에 들어가 행방불명된 것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금방 묻혔다. 하지만 4년 만에 나타난 그녀가 정보국에 드나들며 아메니티에 모습을 보인다면 곧장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에셀번’이라는 이름에 어쨌든 불명예가 된다. 그녀는 더 이상 가문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탄생이면 충분했다. 그 상태에서 에윌이 맺어 줄 정략혼마저 거부하는 것은 너무 몰염치한 짓이었다.
“난 몰라. 나는 네가 왜 꼭 이브 진으로만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다 너잖아.”
“이브 진이 아니면 더 이상 선배님들하고 동료가 아닌데요?”
“뭐?”
레이나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 한번 동료면 계속 동료인 거야. 네가 어디를 가도 우리는 뭉쳐서 술도 마시고, 다른 직원들 얘기도 하고…….”
“저는 평생 감시당할 거고, 선배님들도 이제 일반인인 저한테 아무런 얘기도 못 하실걸요.”
이베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녀처럼 오랫동안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동질적이지 않은 집단에 아무리 함께 해 봤자 완전한 소속감을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자매들 사이에 낀 것처럼 불편하겠지. 그녀는 그런 소외감이라면 익숙했다.
레이나는 서운한 듯이 콧김을 내뿜더니, 별다른 말없이 짧은 머리를 한번 쓸고 훈련장을 나갔다.
“레이나 서운하게 왜 그래.”
결국 시드와 단둘이 남았다. 시드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베카는 소년 같은 그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딴청을 피웠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수사국에 계속 남을 수 있는 그들이 질투가 나는 이 못난 마음을.
“이브.”
“…….”
“내 눈 좀 봐.”
시드는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억지로 맞추었다. 이베카는 무력한 눈을 들었다.
“그런 게 문제야? 우리랑 멀어지는 거? 아니면 정략혼?”
“뭐, 전부 다.”
“그럼…….”
그답지 않게, 시드는 한참을 망설였다. 딱히 독촉하고 싶지도 않아서 이베카가 멍하니 정적을 지키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울렸다.
“……결혼할래?”
이베카는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 이 무뚝뚝한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현실감이 없었다.
“동료보다 더 끈끈하게 맺어 두면, 수사국을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영영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소속감이 생길 수도 있잖아.”
“서, 선배님, 지금 그게 무슨…….”
대체 시드는 뭘 들은 건가. 수사국을 나가면 자신은 이베카로 돌아가야 하고, 이베카로 돌아가면 정략혼을 해야 한다니까. 에윌은 그녀를 한낱 평민 출신 수사국 직원에게 보낼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다. 이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까.
아니, 그 전에 대체 시드가 왜…….
“에이, 너무…… 너무 가셨어요, 선배님.”
이베카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그녀를 좋아할 리가 없다. 한결같이 무뚝뚝하고, 말도 없었으며, 지난 4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어차피 전 수사국 나가면 정략혼, 대, 대상이라니까요. 어디 멀리 지방으로 아예 도망가지 않는 이상…….”
“도망가지, 뭐.”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무술 선생이나 할게. 빌어먹을 물가의 아메니티만 벗어난다면 너 하나 못 먹여 살릴까.”
아, 이 남자는 숨길 수 있다. 그녀의 날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당연히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있다. 이베카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툭, 하고 떨어트렸다. 결국 과녁에 가지 못한 단검이 힘없이 굴렀다.
그녀의 책상에 쏟아지던 사탕들, 문득 던지고 가던 커피 한 잔, 레이나가 없을 때에는 퇴근하지 않고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해 주던 식사…….
이베카의 눈이 흔들렸다. 시드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저, 전…….”
“알아. 내가 네 마음 하나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하지만…….”
훈련장 문이 벌컥 열렸다. 시드와 이베카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레이나라도 돌아온 줄 알았던 그들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검은 머리의 카이든 루스였다.
“이브 선배님.”
“……왜?”
“잠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여기서 말씀 드리기 곤란합니다.”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던 이베카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음에 어떻게 시드 얼굴을 봐야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안내해. 어디든.”
시드의 무표정에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의 흔적이 새겨졌을 것이다.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동료에게서 직접 돌아서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4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시간 내내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이 더 슬펐다. 시드가 얼마나 자신의 마음을 꼭꼭 감추었을지 눈치챈 탓이었다.
사랑을 숨기는 것은 표현하는 것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다. 이베카는 그의 앞에서 했던 수많은 말들을 복기하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카이든은 아무 말 없이 휘적휘적 걸어 궁으로 향했다. 이베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집무실이나 알현실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길을 꺾었다. 왕족이 쓰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베카가 그제야 급히 한 살 많은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카이든.”
“예.”
“어디로 가는 거야? 대체 왜 가는데? 혹시 전하가 부르셨어?”
“아뇨.”
카이든은 짧게 대답했다.
“제 독단입니다.”
“……네가 뭐라고?”
“전하의 가장 오랜 친구요.”
그의 무뚝뚝한 대답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발이 멈췄다.
“나 안 가도 돼?”
다니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가 좋아했던 그 여자는 모두 허상이라고, 좋은 것들만 골라 덕지덕지 만들어 낸 이베카의 다른 인격이라고. 수사국만 벗어나면 모든 것이 사라질 거짓이라고.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베카의 많은 대답들은 마치 문 상단의 펜처럼 상황이 바뀌면 그 가치가 완전히 바뀌고 의미가 없어지는 것들이었다고.
“저도 선배님을 데려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선배님 사정을 모르겠습니까.”
카이든은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전하를 위로하실 수 있으신 분이 선배님뿐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무슨 일 있어?”
“…….”
“……난 그저 네 대타였을 뿐이고…….”
“전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직접 차를 내려 주지 않으십니다. 생각보다 귀찮은 것들을 싫어하시는 성격입니다. 저는 전하께서 내린 차를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말을 끝낸 카이든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어쩔 수 없이 그를 쫓아갔다. 연무장 앞에 늘어선 호위무사들이 보였다. 문의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안리크가 그녀를 알아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전하께서는 아직 안에 계십니까?”
카이든이 물었고, 안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는 이베카를 내려다보며 카이든은 낮게 말했다.
“들어가시는 건 선배님 선택입니다.”
“너, 너…… 정말 건방지다.”
어디든 안내하라고 급히 대답한 것은 그녀였으면서, 이베카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팔짱을 끼고 고개를 들어 보였다. 이 문을 넘어가면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허상일지 몰라도 그녀가 지닌 사랑은 진실했다.
“지금…… 이게 무슨…… 무슨 상황인지 내가…….”
“아셰 왕녀님의 아이에 대해 아십니까.”
“……알아.”
“누가 없앴는지도 아십니까.”
“내 관할이 아니었어. 수사국 내에서도 완전 극비 사안이었잖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베카는 순간 스쳐가는 가설에 입술을 깨물었다. 카이든은 자신의 입으로 정황을 다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녀의 추측을 눈치챈 듯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로가 필요 없는 건 아닐 겁니다.”
“나라면…….”
이베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죽기보다 싫을 거야.”
“예, 저도 뭐,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카이든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파란만장한 연애도 해 보고, 결혼도 했으니까.”
“…….”
“전하나 선배님보다는 이런 분야에서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본디 무뚝뚝하고 오만한 성품답게 그의 말은 예의라곤 없었지만, 이베카는 그의 건방짐을 더 이상 지적할 정신도 없었다.
“위로할 수 있는 상대라는 것도 특권입니다. 아마 그 특권은 아메탄에서 선배님만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카이든은 그녀에게 정중하게 목례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베카는 한숨을 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이베카가 조심스럽게 연무장 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왕은 소름끼칠 정도로 안정된 모습이었다. 연무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다니엘은 그림과도 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벽 한편에 마구잡이로 박혀 있는 화살과 바닥에 구르고 있는 검 몇 개를 본 이베카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카이든이겠지.”
다니엘은 눈을 휘어 보이며 그녀를 향해 웃었다. 이베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가서 진정시키래? 이미 진정했으니 괜찮아.”
“…….”
“내일 일과도 빠지지 않고 다 챙길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