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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47화 (47/79)

47화.

“뭐?”

다니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고, 푸른 눈이 번득였다.

“어느 날 괴한들이 내게 무슨 시약을 억지로 먹였고…… 그대로 아이가 사라졌어.”

이베카는 소리를 내지는 않았으나 크게 놀랐다. 아셰의 아이가 죽었다고? 갑자기?

“대체 언제?”

“…….”

“상황을 자세히 말해 봐.”

“……상황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게 다야.”

고운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쓸쓸히 말하는 아셰에게 이베카는 이상한 연민이 들었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단의 아이였어.”

다니엘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국이겠지, 뭐. 황제의 끄나풀이거나…… 아니면 이단일 수도 있고.”

이베카는 멍하니 오누이의 대화를 바라보았다. 아셰는 담담하게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없앴을 가능성에 대하여 말했고, 다니엘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아셰가 그를 달래는 듯한 형상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심지어 차분하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난 그냥, 조금 슬프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어.”

“……아셰, 하지만 그놈은…….”

“나는 여기서 너무 행복해. 정말이야. 그래서 괜찮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보통 여자가 아니다. 이베카는 다소 슬픈 눈으로 아셰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사라졌는데, 괜찮다고? 웃음은 완벽했고 말투는 차분했으나 그녀는 아셰가 자꾸만 그녀의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메탄에서 가져간 패물치고는 너무 투박하다. 세공은 섬세하나 지금 유행하고 있는 보석 반지가 아니었다. 당장 비누조차 아껴 쓴다는 그녀가 머무는 리스 공국의 가난한 영지에서 저렇게 장식의 의미가 없는 금붙이를 팔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본디 반지는 예로부터 연인간의 징표 아니던가.

이제 이야기의 화제는 완전히 넘어가서, 기술국이니 스타람이니 하는 외국 정세와 국내 소식에 대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다니엘, 넌 역사에 남을 왕이 될 거야.”

이베카는 가만히 그녀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국에 다녀온 동안, 기술국이라는 새로운 산하기관을 만들어 대대적인 개혁을 이룩해 낸 왕을.

“이 변화하는 세상에 아메탄의 키를 훌륭하게 잡아 이끈 사람으로 말이야. 기술국이 성공하면 그 누구도 공화국의 공 자도 꺼내지 못할걸. 공화정 국가에서 누가 이런 판단을 내리고 재빠르게 움직이겠어?”

“……그런가. 하지만 분명 개혁에는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어. 정당한 장사를 하던 상단들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졌거든.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역사에는 그런 건 남지 않아.”

정당한 장사를 하다가 다니엘의 기술국 설립 때문에 갑자기 휘청거리게 된 상단 중 하나가 문 상단이었다. 그녀는 문득 그녀가 선물한 펜이 문 상단의 것임을 기억해 냈다.

그래, 시대는 변하고 환경은 언제나 바뀌지. 그래도 아메니티의 유명한 상단에서 파는 가장 좋은 펜이라며 선물한 펜은 이제 그나마의 의미도 못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부작용을 알면서도 기술국의 설립을 밀어붙였다. 개혁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판단하고.

“에곤이 죽고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언제든 와도 돼. 넌 이제 자유고, 아메니티의 시민권 같은 건 어떻게 해서든 줄게.”

오누이의 대화는 이어졌다.

“밤에 자다가 로즈리에게 목 졸려 죽을 일 있어? 하지만 생각해 볼게. 그런데…… 오빠는 정말 결혼은 안 할 거야? 혼기가 한참 지났어.”

이베카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아, 안 그래도…… 요즘 눈길이 가는 여자가 하나 있어.”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자신이 기척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아무도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발끝에 힘이 들어갔고 숨이 멎었다.

“키가 작고 귀여운데, 씩씩하고 영리해.”

어느새 발그레해진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그녀의 앞에서 그를 사랑해 보라며 명령하던 오만함과 반대로, 그녀를 생각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수줍었던 탓이다.

“무엇보다 심지가 굳고 강단 있는 전형적인 산하기관 여자…….”

이베카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문득 그녀의 세계 전체가 쨍, 하고 깨지는 것 같았다. 지금 다니엘이 알고 있는 이베카는 제국에 다녀오기 전의 ‘이브 진’이다. 씩씩하고, 영리하고, 강단이 있는 여자.

“오빠, 취향이 왜 이렇게 한결같아?”

아셰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만큼 이베카는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지금의 그녀는 단검 하나 던지지 못해 잔뜩 예민해 있고, 혹시나 영원히 필요를 증명하지 못하여 쫓겨날까 봐 덜덜 떠는 ‘이베카 데 에셀번’이었다.

귀여운 외모도 만들어진 것이고, 씩씩하기는커녕 트라우마 때문에 지금 과녁만 보면 구역질을 하기 바쁘다. 전형적인 산하기관 여자……. 몇 주째 제대로 된 임무 하나에도 투입되지 못하고 있는데.

언제나 관계에는 이유가 있다. 혈연이라는 조건을 채우지 못한 가족 관계는 결국 파탄이 나 버렸다. 그렇다면 진실함이라는 조건을 채우지 못한 연인 관계는?

“듣기만 해도 리젠이랑 비슷한 애잖아! 귀족 영애들 희망 고문은 다 시켜 놓고서, 결국 고른다는 게 산하기관 여자야? 정말 카를 왕의 후예가 되고 싶은가 보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래, 그가 예전에 왕비로 올리고 싶어 했던 리젠 하카트도 유능하고 당당한 약제국 직원이라고 들었다. 그는 그런 여자를 좋아한다. 그녀가 그의 호감을 받고 있는 이유는 자명했다. 그저 지금까지 그녀의 언행이 그의 마음에 모두 들었던 것뿐이다.

‘네게 백 가지도 넘는 질문들을 했다. 그 모든 답들이 좋았어. 내가 아는 수많은 너를 모두 다 좋아해.’

아니. 이베카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 모든 답들은 이베카가 아닌 이브가 한 것이다. 짧은 4년 동안 단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여기저기서 인정받으며 시작한 인생.

주눅 들고, 눈치 보고, 뭐든지 자신이 없고. 솔직하지 못하여 혼자 알게 된 것은 일단 숨기고,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인, 애정 결핍에 몸부림치는 여자애의 인생은 애초에 완전히 극복한 채로 새롭게 써 온 인생.

‘저는…… 아마 그 사람 눈에 비친 제 모습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절 그렇게 보거든요. 생각이 깊고, 직장에서 유능하고, 아픔도 잘 극복해 내고, 빈틈 같은 것은 없는…… 제가 그 사람에게 표현한 제 모습일 뿐이지만.’

‘이브 진’이란 내가 아닌 모습을, 그렇게 완벽히 만들어 낸 인격을 표현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지금 그녀는 엉망진창이었다. 직장에서는 무능하고, 아픔은 극복하지 못했고, 오만 것들이 빈틈으로 자리 잡아 있다.

오누이의 대화가 끝나고, 다니엘이 그 자리를 떠났어도 그녀는 한참 동안 기척을 숨긴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 *

“이브, 진짜 병가라도 쓰는 게 어때?”

레이나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이베카는 피곤한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차분하게 물었다.

“병가 썼는데 안 좋아지면요?”

“……연가도 남았고.”

“연가까지 다 썼는데도…… 아무것도 못 던지면요?”

그녀가 거의 영혼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레이나의 옆에서 시드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침묵을 지켰다. 전투능력이 없는 직원은 수사국에서 가치가 없다. 괜히 큰 부상을 당한 고든 같은 사람이 정보국으로 전입한 게 아니다.

다른 산하기관으로 전입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제로 언제까지나 이렇게 쓸모없는 인재로 잡다한 일이나 하면서 수사국 책상을 지킬 수는 없었다. 수사국의 업무는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수사국을 나가는 순간,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비기도 효력을 잃는다.

4년 만에 이베카 데 에셀번으로 돌아가서 뭘 어쩌지. 딱히 가고 싶은 곳도 없는데. 보통 수사국 사람들이 많이 가는 정보국으로 갈 가능성이 높지만, 그 이후에는 뭘 어떻게 하고 살아야 하나.

수사국을 벗어나면 ‘이브 진’으로도 살지 못한다. 이베카가 갑자기 돌아오면 백작가에서는 당연히 정략혼을 시킬 것이다. 아마 자신에게 걸맞다고 생각하는, 앞으로 백작가의 행보에 애매하게 필요한 남자를 골라 주겠지.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다시 죄악이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셀번의 이름을 가졌으니 정략혼을 해야 하는. 그렇다면 산하기관도 그만둘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에윌은 표면만이라도 그녀가 아메니티의 ‘대귀족’답게 살기를 원할 테니까.

그녀를 쓸모로 하지 않는 조직에서 도대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말을 삼킨 채 레이나에게 억지로 싱긋 웃어 보였다.

“이브.”

시드가 낮게 말했다.

“차라리 여기서 힘들어하지 말고, 전입 신청을 하면…….”

“저, 이베카로 돌아가는 순간, 바로 정략혼 대상이에요. 지금 에셀번 백작가는 하나의 끈도 아쉬운 상태니까. 양자로 들일 후계가 너무 어린데다가 절반이 뮤엘튼가 핏줄이거든요.”

그녀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브는 에셀번의 부름을 무시할 수 있지만, 이베카는 안 돼요.”

레이나가 벌컥 화를 냈다.

“그깟 가족이 뭐라고! 그냥 아예 나와 살면 되잖아. 산하기관 월급도 세겠다, 지금까지 널 찾지도 않았다는 가족들한테 왜 돌아가? 거기서 행복하지도 않았다며? 널 가족 취급도 안 해 줬다는 그 사람들한테 왜?”

그건 평민인 레이나와 시드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녀가 ‘에셀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가족들은 그래도 그녀에게 넓은 방을 주었고 배불리 먹여 주었으며 자매들과 동등한 교육을 시켰다. ‘이름값’을 하라는 의미였다. 귀족들에게 그 ‘이름값’은 몹시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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