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나아질 거야. 지금 당장이 힘든 것뿐…….”
시드의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베카는 부들부들 떨면서 다시 단검을 들었으나 결국엔 또 날리지 못했다. 단검뿐만이 아니었다. 화살, 독침, 밧줄, 뭐 하나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투척물이 없었다.
내가 실패해서 대륙의 판도를 바꿨어. 리한 카드민은 중요한 인물이었는데.
내가 무능해서 한 명도 살릴 수가 없었어. 무고한 아메탄의 국민들이었는데.
‘그래도 산하기관 직원이, 그것도 수사국 사람이 하나 있으니 나머지 사람들을 맡기는 데에 부담이 없군요.’
행정국 소속의 유진이 그녀에게 나머지 사람을 맡길 만큼, 수사국 직원은 어디서나 인정받는다. 이브나 왕비 역시 수사국에 다른 산하기관들보다 훨씬 많은 비기를 남겼다. 괜히 국가에서 직권까지 줘 가며 신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모든 임무를 실패하고 혼자 살아 돌아왔다.
“우욱…….”
알량한 자신의 실력을 너무 많이 믿어서. 고작 범죄자들 몇 명 상대한 뒤 기가 살아서. 정작 엄청나게 뛰어난 군인도, 대규모의 전쟁도 겪어 본 적이 없으면서.
과녁에 온갖 참상이 떠돌았다. 시야마저 떨려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브.”
시드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만해. 일단 가서 쉬어.”
“어떻게 쉬어요?”
이베카는 초점 없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 상태로는 수사국에 계속 못 있어요.”
“우린 다 기다려 줄 수 있어. 네가 극복할 때까지, 그러니까 병가라도 좀 쓰고…….”
“저는…….”
그녀는 이어지는 말을 삼켰다. 지금도 와일스 과장님이 일부러 서류 정리 이외에는 아무런 임무도 주시지 않는걸요. 신체적 능력이 없는 수사국 직원을 어디다 써요. 그런데 저는…… 수사국이 아니면 갈 곳이 없어요.
“선배, 죄송해요. 가 볼게요. 일 하나가 생각났어요.”
시드와 이야기하는 것이 피곤했기 때문에, 이베카는 그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냈다. 시드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그녀는 순간 상처받았다. 수사국에서 그녀에게 지금 별 일을 주지 않고 있다는 걸 의식한 발언인가. 시드가 한숨을 쉬었다.
“너 엄청 고생하고 왔어. 연가라든지 병가라든지 긁어서 다 쓰고 좀 쉬어.”
시드의 말에 이브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다 영원히 쉬어요. 그리고 저 일 있어요.”
아직 한 글자도 못 썼으나, 왕이 자신에게 제출하라는 보고서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책상으로 간다고 해서 무언가를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수사국만 벗어나라고 했지만, 수사국을 벗어나면 그녀는 더 이상 ‘이브 진’이 아니다. 다른 외관, 다른 신분, 다른 배경.
수사국과 ‘이브 진’은 떨어트릴 수 없는 관계였다. 그녀는 문득 ‘진짜 삶’이라고 생각했던 지난 4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 * *
“이브, 연가라도 써. 지난해부터 이월된 날짜들도 꽤 있는데.”
“…….”
와일스는 한숨을 쉬며 이베카에게 말했으나, 이베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업무를 줄 상황이 아닌데 자꾸 출근하는 이베카를 보는 와일스의 표정이 착잡했다.
그녀는 그녀에게 할당된 서류 작업을 끝내고 나면 훈련장으로 달려가 보기에도 안쓰러운 그녀만의 싸움을 하곤 했다. 훈련장에서 과녁을 향해 혼자 식은땀을 흘리며 낑낑대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수사국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좋지 않았다.
“아니면…… 단기 임무인데.”
차라리 전투가 필요 없는 업무를 주는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와일스가 서류를 뒤적거렸다.
“아셰 왕녀님께서 아메니티에 몰래 들어왔어.”
아셰라면 다니엘의 여동생이며, 범죄 때문에 감금되어 있던 도중 이단 황자의 아이를 밴 후 다니엘이 멀리 있는 리스 공국으로 보냈다고 들었다.
“아셰 왕녀님의 경우 사안이 몹시 복잡해. 신분상으로는 리스 공국 영지의 영주 부인이지만, 반란군 임시 총독의 아이를 배었으니 커다란 논란에 휘말릴 수 있는 분이시다. 지금 아셰 왕녀님의 국적은 아메탄이 아니고, 윌리엄 태자님을 독살하실 정도로 성격이 냉혹하고 영악하시니 주의해야 해.”
“예.”
“내일 전하께서 아셰 왕녀님을 뵈러 여관으로 가실 텐데, 네가 직접 잠입해서 대화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기억해 오도록 해. 오늘 미행한 직원 이야기로는 아메니티가 그리워서 왔다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그런 단순한 동기로 움직일 분은 아니신 것 같아.”
이베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조용히 기척을 숨기고 있다가 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다니엘의 ‘보고서’ 발언 이후 그녀는 그에게 다시 가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를 따로 부르지 않았다. 마음을 전달한 뒤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뜻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물론 보고서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
그녀는 다니엘 몰래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이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설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아마 이 정도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최선일 것이다.
공식 석상이나 임무 중에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 그는 그녀를 보지 못할 테고, 그녀는 만들어진 미소로 다정하지만 모호한 말들을 뱉어내는 그의 조각 같은 얼굴을 잠깐이나마 올려다보겠지.
그리고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할 것이다.
‘나를 사랑해 봐.’
그가 잘 하지 않는 직접적인 명령형 화법이었다.
‘너는 노력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들어왔지만, 나는 네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노력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당신도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참느라 어려웠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말들이 다 좋다고.
그 누구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녀를 열심히 물어봐 줘서, 그 결과로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그녀가 보고서를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건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에게는 보고서 따윈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매일매일 차를 내려 주던 그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마음에 스며들 듯 머물다가 단숨에 들어와 깊은 자국을 새겼다.
7. 과거 (3)
이베카는 조용히 정체를 숨기고 아메니티의 한 고급 여관에서 다니엘이 아셰를 만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셰는 다니엘과 동갑내기인 여동생으로 그와 똑같이 반짝이는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아름다운 왕녀였다.
자신에게 정략혼을 제안했던 태자를 죽여 왕위에 관심이 없던 다니엘을 갑자기 왕으로 만들고, 감금당해 있다가 반란군 임시 총독의 아이를 밴 왕녀. 다니엘은 그 아이를 아메탄에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멀리 리스 공국으로 아셰를 보내 버렸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이베카가 제국에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 그저 나중에 보고서로만 읽었을 뿐이었다.
한때는 대륙에서 손꼽히게 아름답다고 소문이 났었던 아메탄의 왕녀, 아셰는 이제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에 질이 별로 좋지 않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불쌍하면 가는 길에 곡식이라도 좀 얹어 주든가.”
가난한 리스 공국의 캐넌 영지로 간 그녀는 비누도 아껴 써야 해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를 수 없다고 했다. 밝고 명랑한 어조였으나 오히려 그래서 동정심을 살 수 있는 것까지 계산한 화법이었다. 원래부터가 환한 미소 속에 알 수 없는 속내가 몇 겹이나 겹쳐 있을 것 같은 왕녀였다.
“비누도 잔뜩 실어 줄게.”
“질 좋은 건 필요 없고, 싼 걸로 많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영주민들에게 나눠 주면 되겠다.”
다니엘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가장 친했던 이복 여동생의 초라한 모습이 참담한 건 진심일 것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난 너무 행복해. 정말이야.”
“…….”
“숙부님, 아니, 에곤 영주님은 나를 아예 건드리지 않으셔. 나는 정말 자유를 찾은 거야. 오빠는 내가 항상 뭘 원했는지 알지? 작은 영지라도 좋으니 자유가 있는 곳, 지루해도 좋으니 암투가 없는 곳, 외져도 좋으니 외롭지 않은 곳. 캐넌은 내게 바로 그 꿈의 땅이야.”
그러나 그녀를 저 멀리 캐넌으로 보낸 당사자가 바로 다니엘이었고, 그 역시 이 모든 일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참담하다는 반응은 일종의 예의에 더 가까웠다.
“다 오빠 덕분이야. 기지를 발휘해서 나를 그리로 보낸 건 정말 대단한 수였어. 정말 고마워.”
오누이간에 신변잡기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이베카는 이상한 기분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서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아 있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와 숨길 수 없는 기품은 물론이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연민과 그리움이 담겨 있다는 것까지 비슷했다.
그러나 눈웃음 하나와 한숨 한 번까지 계산된 것같이 인위적이라는 점, 다정하고 서로를 위하는 완벽한 대화 속에서 이상하게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 게다가 서로를 애틋하게 여기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계하고 있는 것 같은 미묘한 분위기까지도 똑같았다.
둘 다 몇 수나 미리 계산한 뒤 미소로 속마음을 감추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이고, 상대가 그렇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베카는 다소 위화감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위하고 있지만, 너무나 똑같이 닮아 있기 때문에 결국엔 멀어지게 될 것이다.
새삼 이베카는 다니엘이 말했던 외로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숙연해졌다. 그녀의 자매들은 그녀와 닮지 않았고 그녀를 소중히 여겨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합리화되는 외로움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이 닮아 있는데다가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 왔던 동생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삶이란 어떤 느낌일까.
“아, 다니엘, 그리고 할 말이 있어.”
“……뭔데?”
아셰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가…… 아이가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