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이브.”
“전하, 한낱 직원을 특별하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아메탄 왕국을 위한 도구이며, 한순간의 친분으로 조직을 판단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브!”
이베카는 온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다시 불편한 정적이 흘렀다. 이베카가 도저히 그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나를 사랑해 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네?”
“네가 위험한 일을 하는 게 싫다.”
“그게 무슨…….”
“일전에 내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
“모든 것이 상관없어지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
그녀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수사국을 나오는 것이 상관없을 정도로 나를 사랑해 봐. 난 네가 위험한 것이 미치도록 싫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사국만 빼면 그 어디에서 근무해도 괜찮아.”
“저, 전하.”
“이미 나는 그대를 대할 때 왕으로서의 마음가짐이 글러먹었어. 내게 마음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아, 젠장.”
곁에 둔다고. 지금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녀도 바보가 아닌데 다니엘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그의 뒤에 그림처럼 서 있는 호위 무사 안리크가 눈에 들어와 숨을 멈추었다. 안리크 역시 놀란 눈으로 그의 주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리크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예전에 잊었다. 그러나 그가 상징하는 것은 그녀의 과거였다.
만일 다니엘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다음엔 뭐? 단순히 연애만 하는 것은 앞으로 볼 일이 없는 남자들에게나 한해서였다. 아메탄 왕국에 왕과 가벼운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가벼운 연애가 아니면, 그럼 수사국 직원으로 평생 그와 온 국가를 속이며 비 자리에 앉을 것인가?
애초에 수사국 직원과 왕비가 양립 가능한 자리이기는 할까? 다른 산하기관이라면 몰라도 수사국은 너무나 애매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자신을 사랑해 보라니.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의 직설적인 화법이 그대로 꽂혔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이 떨렸다. 그러나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 감정은 분명한 설렘이었다. 이베카는 무작정 싫지는 않은 마음이 든다는 데에 스스로 놀라고 당혹스러웠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종합 보고서는 거의 매일 올라오지. 종합 보고서가 올라올 때마다 네 생각이 날 줄은 알았지만, 하루 종일 날 줄은 몰랐어. 그래, 내가 오만했어. 여자 하나쯤은 안 보면 잊을 수 있다고.”
이베카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위치도 되지 못했다. 가만히 돌처럼 앉아서 현실감 없는 이 대화에 이미 거칠어진 숨만 몰아쉬고 있어야 했다.
“갈증이 나는 것같이 안절부절 못하겠는데, 너를 생각해서 억지로 참을 수밖에 없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네가 짐작하기나 할까.”
“…….”
“잠이 잘 오지 않았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궁금했어. 모호한 지방 출장이라는 답에 수사국을 다 뒤지고 싶었지.”
이베카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차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왕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게 사랑은 이런 거야. 너의 부재에, 나의 세계가 서서히 파괴되어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것.”
“…….”
“너를 만나지 못하는 동안 내 하루는 조금씩 무너지는 걸 간신히 버텨 왔어. 왜냐하면 난 더한 괴로움도 버텨야 하는 왕이니까. 그런데 네 이름을 그 빌어먹을 보고서에서 본 순간.”
“전하…….”
“모든 것이 부서지는 느낌이었어. 너를 위해 내 마음을 묻어야 한다는 배려까지도.”
“대체 제가 왜, 저를 왜…….”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가까스로 말했다. 다니엘이 그녀를 바라보며 다소 쓸쓸하게 웃었다.
“네게 백 가지도 넘는 질문들을 했고, 그 모든 답들이 좋았어. 내가 아는 수많은 너를 모두 다 좋아해.”
“전하, 저는…… 저는 일단 가 보겠습니다. 조금 놀라서…….”
이베카는 그가 천천히 보고서에 결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 마음이 네게 민폐가 되는 걸 알고 있어. 그러니 다음 보고서를 하나 더 써 와.”
“예?”
“이브 진은 어떤 남자를 좋아하는지, 아주 자세하게. 너는 노력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 들어왔지만, 나는 네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노력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처음으로, 그녀는 그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모든 걸 다 맞출 테니 뭐든 적어 오기만 해 봐.”
이베카는 시선을 툭 떨궜다.
* * *
왕의 집무실에서 나와 이베카가 바로 향한 곳은 훈련장이었다. 도저히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쏟아지는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거의 두 달 만에 만난 왕이 갑자기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해 왔다. 심지어 다니엘은 그동안 대놓고 마음을 밀어붙이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녀가 그에게 예외가 된 것을 알고 일부러 멀리했다는 것조차 충격적이었다. 그 기저에 깔린 심정이 배려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왕비는 죽어도 싫다고 했지. 수사국 생활이 좋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거짓된 신분으로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가 된단 말인가. 하지만 단박에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심장 역시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둔 남자가 자신을 좋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이성을 찾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파란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정말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며 수사국 직원들이 신체를 단련하는 훈련장 안으로 달리다시피 들어갔다. 거의 다 근무 중이어서 훈련장은 한산했고, 과장인 와일스가 혼자 체력 단련을 하고 있었다.
“어? 이브!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보고서 제출 좀 일찍 끝난 김에 땡땡이예요.”
이베카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씩 웃으며 말했다.
“과장님은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난 대학에서 체술 강사 뛰잖냐. 틈틈이 몸 만들어 놔야 해.”
“그럼 저 10분만 여기 있다갈 테니 수사국에 비밀로 해 주세요.”
“이따 커피 한잔 사면 20분까지 봐준다.”
와일스가 아령을 들며 시원하게 대답했다. 이베카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단검을 집은 다음 과녁을 쏘아보았다. 순간적인 집중과 몰입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녀가 단검 자루를 꽉 쥐고 던지려던 때였다.
“……아.”
그 순간.
단검을 아무리 던지고 던져도 무력하게 쏟아지던 제국군이 떠올랐다. 단검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단검을 던져도, 한 명을 죽이면 뒤에서 다섯 명이 나타났다. 너무 많은 숫자에 아무리 빠르게 던져도 끝이 나지를 않았다. 그녀는 근접전에 자신이 없었다.
단장 저스틴이 단숨에 죽었다. 나이부터 외모까지 진실이 하나도 없었던 거짓 신분의 그녀를 귀여워하고 아껴 주었던 왕립 음악단장. 그녀는 죽어 가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도망치자고 소리쳤으나 악단 사람들은 발마저 느렸다. 눈앞에서 아는 사람들이 쓰러져 내렸다.
그 이후 단검을 잡는 것은 처음이다. 그녀는 다시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왼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읏…….”
눈앞이 하얘졌다. 정확히 예측하고 빠르게 던졌는데도 재빠르게 막아 낸 리한 카드민이 생각났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몸을 밀어붙여 세게 압박했고 그때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죽음을 예감했다. 그때 그 단검이 단 하나도 맞지 않아서 리한 카드민은 무사히 반란군에 합류했다.
정말 중요한 암살을 놓쳤다. 어쩌면 범죄자 피라미들 몇 명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는데. 수사국에서 직권을 사용할 정도로 루카스가 고민한 일인데 자신이 망쳤다.
왼손이 뻗어나가지를 않았다.
“……안 돼…….”
단검을 잡는 순간, 괜찮다고 생각했던 거대한 트라우마가 그녀를 덮쳐 왔다.
쏟아지는 두려움. 전쟁에 대한 무력감. 사람들을 지키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혼자 살아 도망쳤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울컥 올라오는 자기혐오를 누르고 평범하게 사람들을 대했으나 단검을 잡으니 온갖 기억들이 몰려왔다.
던져도 안 돼. 난 안 돼.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어.
“우욱…….”
아무리 던지고 던져도 적은 끝이 없고, 지니고 있던 단검은 금세 동이 났다. 그녀는 동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시체 사이로 뛰어 도망쳤다. 이딴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무것도 못했는데. 다 망치고, 다 죽게 내버려뒀는데. 그녀는 몸을 떨었다. 과녁에 몰려오는 제국군의 환각이 어른거렸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브! 이브!”
환각과 환청에서 정신을 차리자, 와일스가 그녀의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이브! 왜 이래!”
“……과, 과장님.”
“왜 이래? 무슨 일이야? 너 지금 덜덜 떨고 난리 났어.”
단검이 그녀의 왼손에서 툭, 하고 떨어졌다. 몸이 떨려서, 다시 주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며 숨이 막혔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숙소에도 가지 않고 한참을 훈련실에서 과녁만 노려보았다. 하지만 단검을 던지려고 들면 온갖 욕지기가 치밀며 결국에는 손이 떨려 던지지 못했다. 눈물과 구역질을 참으며 억지로 던져도 보았으나 과녁의 절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내리꽂혔다.
“이브, 그만해.”
그녀가 몇 시간째 씨름하는 것을 보고 있던 시드가 참담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짚었다.
“그 난리통을 겪고 왔는데 트라우마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야.”
“……저는 근접 전투에 약해요. 근력이 떨어져서. 요샌 옛날처럼 마법도 쉽지 않고.”
그녀는 낮게 말했다.
“원거리 전투마저 못하면 수사국에서 쓸모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