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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44화 (44/79)

44화.

“……의료국에서 치료 중입니다.”

“의료국? 다쳤어? 그럼 지금 내가 직접…….”

“수사국에서 이미 사람이 붙어 있고, 보고서를 즉시 작성해야 합니다. 지금 가신다면 업무 흐름에 상당히 방해가 될 것이고, 제가 아는 이브 선배님이라면 절대 지금 전하의 방문을 원치 않으실 겁니다.”

“…….”

“하지만 원하신다면…….”

카이든이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 보고서는 직접 제출하라고 하겠습니다.”

“……많이 다쳤나? 혹시 치명적인 부상이라거나, 아니지, 치명적이지 않더라도 많이 다쳤으면, 의료국에서 가장 좋은 의료진을…….”

“전하.”

카이든은 무뚝뚝한 성격답지 않게 살짝 웃었다.

“치료 가능한 부상이며 내일 안에 만나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가는 길에 의료국에 들러서, 내가 가장 좋은 의료진을 붙이라고 했다고 전해.”

다니엘은 천천히 다시 앉아, 보고서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으나 그의 손이 살짝 떨렸다. 카이든은 그제야 다니엘이 들고 있는 펜에 ‘E. J. 로부터’라고 작게 새겨진 각인을 발견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브 진?

그 동안, 다니엘은 그에게 두어 번 이브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물었다. 그러나 카이든은 그 질문이 많은 인내 끝에 나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참고 참다가 한 번 물어보는 그런 느낌. 다니엘이 다른 산하기관 직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못 보았기 때문에 안 그래도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 이브의 부상에 저렇게 과하게 반응하는 것에 카이든은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다니엘에게 충성해야 할 신하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로서 물었다.

“전하, 혹시 이브 선배님과 무슨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없었어.”

“…….”

“아메니티 거리에서 식사 한번 하고, 메나타 호수 산책을 한 거. 그게 다야.”

카이든은 멍하니 서 있다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여자는…… 지금껏 한 번도 없었잖아요? 전하께서 여자랑 단둘이 밥을 먹었다고요? 메나타 호수에서 산책을 하고요? 그게 어떻게 특별한 일이 아닙니까?”

“……이브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겠지.”

“아.”

다니엘의 다소 시무룩한 말에, 카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럴 겁니다.”

“그렇게까지 바로 동의할 필요는 없어.”

“직언도 친구의 덕목이니까요. 그런데 이브 선배님…… 음…….”

카이든이 말꼬리를 흐린 것은, 이브의 본디 정체가 에셀번 셋째 영애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외양을 바꾸는 마법을 풀어 본 적이 없었고, 그냥 이렇게 이브 진으로 살다 죽겠다고 몇 번이나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수사국 사람들도 모두 다 그녀를 ‘이브 진’으로 대했고 그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이 마음에 품은 여자라면 이제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일 다니엘이 그녀를 비로 들이고 싶어 한다면 일이 아주 복잡해졌다. 수사국을 그만두면 그녀의 마법이 풀릴 것이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에셀번 영애로 다시 돌려보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브가 왕비 자리를 원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어두운 표정을 본 다니엘이 말했다.

“말하지 마.”

“뭘요?”

“부정적인 말.”

“…….”

“난 지금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한 참이니까.”

카이든은 결국 내일은 이브를 보내겠다는 말만 전하고 천천히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다니엘은 한숨을 한 번 쉬고, 책장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무슨 임무 받았어? 어디로 가?]

[오늘은 뭐 해?]

[황자가 넘어왔어. 어떻게 생각해?]

[난 리한 카드민을 살리고 싶어. 이용 가능성이 높거든. 넌 어떻게 생각해?]

[혹시나, 아주 혹시나…… 다음번에 또 저녁을 먹으러 갈 수 있을까?]

[그 술집에 갈걸 그랬어. 더 재미있는 얘기들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때 같이 있던 어린 남자애는 친한 후배야?]

[요새 잠을 잘 못자. 넌 보통 언제 잠이 들어? 잘 자는 편이야?]

[단검 던지는 건 언제부터 그렇게 잘했어?]

[너도 그 날 저녁 많이 생각나? 네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나?]

종합 보고서를 제출한 카이든이 나가고 나면, 생각나는 질문들을 어쩌지 못해 기록해 놓은 노트였다. 다니엘은 빽빽하게 이어지는 질문들 끝에 그가 늘 지니고 다니는 펜을 다시 대었다.

[많이 다쳤어? 어디가 아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당장 보고 싶지만 너를 보러 가는 길이 모두에게 민폐가 되는 것이 왕의 위치라는 걸 알아. 그 끔찍한 옆자리에 너를 두고 싶은 욕망이 네게는 여전히 달갑지 않겠지?]

[그렇지만 내일 네가 올 때까지 꼬박 밤을 새워 기다릴 거야. 혹시 나를 보러 올 때, 조금이라도 귀찮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브.”

그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는데도, 그 동안 일부러 그녀를 보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그에게 계속 간절해지기만 했다. 눈앞에서 멀어지면 당연히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보내는 건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는데.

본디 사람은 한순간에 마음에 들어와, 제멋대로 자국을 남기는 법이다. 그리고 어떤 자국은 바쁘다고 해서,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지워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일전에 루벤에게 누구나 보낼 수 있다고 호기롭게 장담한 것은 자기기만이었다. 이브는 그에게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 다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속이 시커멓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 그녀를 눈앞에 두지 못한다는 단순한 사실에 왕관이 초라해질 지경이었다. 걱정이 되어서,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동안 참아 왔던 온갖 마음을 어쩌지 못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를 보내고 나서도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혼자를 참아 내는 것이었지 괜찮아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시야가 아득해졌다. 그것은 그에게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두려움이었다.

미약한 두통을 참으며 그는 동이 터 오는 새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서, 온몸이 저릿한 기분이었다.

* * *

이번 일에 관한 종합 보고서를 직접 제출하라는 카이든의 말에 이베카는 다소 당황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다니엘이 이 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녀는 리한 카드민의 암살을 실패한 이후 상당히 기운이 빠져 있는 상태였다.

물론 수사국에 돌아와서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티낼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다. 막 돌아와 시드 앞에서 감정을 쏟아 낸 이후, 그녀는 의료국에서 나오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정신을 가다듬은 것처럼 행동했다. 루카스에게 빠른 보고를 했고, 울먹이는 레이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으며 냉정한 필체로 보고서를 썼다. 그래서 다니엘을 만나러 갈 때에도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전하.”

다니엘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서입니다. 미심쩍은 부분이 계시다면 바로 질문해 주세요.”

눈 밑이 퀭한 그가 그녀의 보고서를 받아들고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몸은.”

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렸다. 다소 거칠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베카는 멍하니 반문했다.

“네?”

“몸은 괜찮은지.”

“멀쩡합니다. 의료국에서 잘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 그가 조용히 차를 내리고 앉으라 청했다. 이베카는 그의 앞에 앉은 뒤 달콤한 티 푸드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가 건넨 차의 향은 좋았지만, 그녀는 왠지 예전같이 그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수사국의 직권으로 전하께서 신변을 보호하라 명한 리한 카드민을 암살하려고 한 점에 대해서는 만일 죄를 물으신다면 범 수사국적인 차원에서…….”

“이브, 수사국의 직권 가지고 뭐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내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이 아니니까. 그러라고 있는 게 수사국의 직권 아닌가.”

그의 말은 모두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어 이베카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습관처럼 걸고 있는 미소도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눈빛에는 이상한 분노마저 감돌고 있었다. 그녀는 괜히 찻잔만 매만지다가 한숨을 쉬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말했다.

“그럼 어디에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선득해서 이베카는 또 다시 말을 잇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확실히 여러 모로 왕의 기분이 좋지 않을 시기이긴 했다.

“내가 수사국에 정말로 화가 났던 건, 밤새 수사국장인 루카스를 가만둘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

“너를 혼자 그 전쟁터에 파견했다는 거야.”

이베카는 예상하지도 못한 말에 살짝 놀랐다. 맥락을 짚기가 어려웠다.

그는 직접 내린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평소와 다른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확실히 모든 분위기가 달랐다. 이베카는 한숨을 쉬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지난 보고서 내용을 보시면…….”

“알아. 다른 수사국 직원이었다면 내가 밤새 분노와 안도에 몸을 떨지는 않았겠지.”

이베카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차의 향기가 너무 진해 코끝이 먹먹했다.

“죽으면 어쩌려고 했어? 거기서 죽으면.”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분했으나, 이상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메탄 왕국을 위한 죽음이고, 수사국 직원으로서 조직의 판단에 순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수사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한 번도 목숨을 아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브.”

“다시 가라고 해도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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