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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43화 (43/79)

43화.

그녀가 국장실에 나오자마자 세 명의 직원이 그녀를 둘러쌌다.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씩을 든 레이나와 시드, 그리고 후배 카이든까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브는 자신보다 한 살 위지만 후배인 카이든에게 피식 웃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 결혼 축하해. 내가 지방에 있어서 결혼식은 못 갔다.”

“괜찮습니다.”

“선배님들이야 그렇다 치고, 넌 왜 국장실 앞에서 기다린 건데?”

“제가 리한 카드민을 심문했습니다.”

“보고서 봤어.”

“주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가수보다는 군인에 가깝습니다. 선배님 실력은 알지만 절대 만만히 보면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카이든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것은 시드였다.

“내가 한번 급습한 적 있어. 미행도 바로 눈치채고, 행정국 직원을 완벽히 보호하면서도 전혀 내게 밀리지 않더군.”

“시드 선배님한테 안 밀렸다고요?”

“마법을 못 쓰긴 했지. 일단 신변 보호가 걸려 있으니. 그래도 상당히 위험한 상대니 절대 일대일로 붙지 마.”

이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가 일어나면 혼란을 틈타 멀리서 단검을 던져 죽이는 것 정도야 난이도가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다. 정 안 되면 단 둘이 있는 자리를 만들든가, 최후의 방안으로는 마력을 집어넣으면 뒤처리는 곤란하겠지만 어쨌든 해치우기는 쉬울 것이다. 이베카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알아서 잘 할게요. 게다가 저 연기도 잘 해요. 정 안 되면 어떻게든 꼬셔서 한번 해 보자고 달려들면 기회야 오지 않겠어요?”

“……리한 카드민 본 적 없지?”

시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너보다 훨씬 예뻐. 쓸 데 없는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안전하고 쉬운 길로 가.”

“아, 다들 왜 걱정이야?”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레이나였다.

“이브 칼 다루는 솜씨 한두 번 봐? 잘하고 오겠지. 그리고 리한 카드민이 얼마나 예쁘든, 이브가 얼마나 귀여운데! 그 남자, 요즘 귀족 여자들한테 완전 화제래. 한번 잘 꼬셔 봐. 한 탕 잘 하고, 아메니티에서 또 한번 술 한잔 거하게 하자고.”

“그럼요.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베카는 싱긋 웃으며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이런저런 신변잡기적인 대화가 오가고, 카이든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먼저 가겠다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응, 가 봐.”

카이든은 휴게실을 나가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이베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전하께서 두 번 정도 잘 지내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지방 출장 중이라고 계속 대답하기는 했습니다.”

“아.”

“이번 일을 끝내고 돌아오시면 한번 뵙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말씀은 안 하시는데 무슨 임무를 맡고 있느냐 묻는 것이 안부를 궁금해 하시는 듯했습니다.”

이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그렇게 모두의 걱정과 응원을 받고 떠난 제국 출장에서, 이베카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 * *

이베카가 홀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국경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3주 정도 후였다. 시드는 급히 달려가 이베카를 직접 데리고 아메니티로 돌아왔다. 의료국에서 부상을 치료하는 이베카의 눈은 이미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시드는 그녀의 곁을 지키며 차분하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었다.

리한 카드민은 이베카의 생각보다 훨씬 더 체술이 뛰어났다. 그는 전투 중의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녀의 단검과 독침을 모두 막아 냈으며, 순식간에 그녀를 압박하여 거의 압사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여러 가지로 운이 좋지 않았다. 일단 제국의 황궁까지 가는 데에 한 번도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 자연스러운 사살이 어려웠고, 황궁에서 드디어 전투가 일어났으나 이미 황제가 마력을 모두 소모하여 마법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리한 카드민은 그녀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황제와의 독대가 예상치 않게 잡히는 바람에 급박한 시기를 타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베카는 난생 처음으로 실패해 본 암살에 패닉에 빠지기도 전에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암살에 언제나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몰아붙이는 리한을 이기지 못하고, 이브는 간신히 손목을 들어 자신이 수사국 직원임을 밝힌 채 행정국의 담당자 유진 유니트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다 같이 돌아갈 수는 없어요. 이 공증서를 가지고, 내일 아침 악단과 호위단을 챙겨서 아메탄으로 떠나요. 남의 전쟁에서 개죽음당할 수는 없으니.’

유진은 두 패로 갈라서 따로 입국하자는 의견을 냈고 암살에 실패한 이베카는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위단과 악단을 수습하여 대륙을 건너오다가 전투에 휘말리고 도적단에게 습격을 당했다.

“다, 다…… 죽었어요…….”

이베카는 시드 앞에서 눈물을 쏟아내지도 못하며 멍하니 말했다.

“아무 잘못 없는 아메탄의 시민들인데…… 한 명도 못 지켰어요…….”

“이브, 거기 수사국 직원은 너뿐이었고 호위단도 실력이 별로였다며. 너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지켜.”

“저, 전쟁이 처음이라…….”

시드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은 채, 이베카는 의료국 직원의 치료에도 신음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렇게 제가 아무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무력할 줄 몰랐어요……. 임무를 실패한다는 게 이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었는지도…… 정체는 숨겨왔지만 계속 순회 공연을 다니며 그 동안 가까웠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브.”

시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넌 살아 왔잖아.”

“저 혼자만…….”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난 그거면 돼. 그거면…… 다행이라고 생각해. 난 리한 카드민과 직접 붙어본 너 외의 유일한 사람이야. 그러니 내 말 들어. 네 잘못 아니고, 그 누가 갔어도 실패했을 거야. 자책하지 마.”

“임무도 실패하고…….”

“모든 임무를 다 어떻게 성공해?”

“……리한 카드민은 그대로 반란군에 합류했다고 들었어요. 반란군들이 다 그 얘기뿐이더라고요.”

기운이 잔뜩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다 부족해서…… 일을 그르치고…… 같이 지방 출장을 다녔던 저스틴 단장님조차 구해 드리지 못했어요……. 어쩌면 중요한 기로에 선 아메탄을 구할 수도 있었던 사건인데…… 저 때문에…….”

“자책하지 마. 너 이러고 있는 꼴 보면 루카스 국장님도 마음 불편해 할 거야. 말했잖아. 살아 돌아왔으면 됐어.”

이베카는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시드의 말이 맞았다.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루카스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것이다. 이베카는 의료국에서 치료가 완료된 뒤 나가면, 무조건 태연한 척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임무는 실패했고, 수사국에서 그녀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리한이 그녀를 벽에 밀어 붙일 때 난생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강하게 느꼈다. 확신을 가지고 던진 단검이 단 하나도 맞지 않았을 때 그동안 한 번도 과녁을 빗겨간 적조차 없었던 그녀는 크게 당황했다.

전투에 휩싸이고 도적떼를 만났을 때, 이베카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을 다 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처럼 처참하게 몰살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메탄의 얼마 안 되는 호위단은 그대로 휘말려 죽었다. 이베카는 미친 듯이 단검을 던지고 그대로 죽은 시체에서 칼까지 뽑아들며 달려들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상대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아…….”

끝도 없이 밀려오는 적들…… 수사국에서 범죄자들만 상대하던 이베카는 그 엄청난 싸움의 규모에 놀랐다.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싸움과 피에 미쳐 주변을 모두 다 황폐하게 만드는 것.

그녀는 자꾸만 꿈을 꾸었다. 꿈을 꾸면 그녀의 눈앞에서 죽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타났다. 몇 년을 함께 한 악단들은 전투 능력이라고는 없어 가장 먼저 죽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홀로 시체 속을 탈출하고 도망쳤을 때…… 이베카는 온몸을 잠식하는 공포에 하루 종일 떨어야 했다. 아메니티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는 왠지 모든 사람들의 피를 둘러쓰고 살아남은 것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마음에 걸렸던 것은 자신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아메탄이 더 곤란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사실이었다. 당당하게 반란군에 합류하는 리한 카드민을 막지 못했다. 그의 합류로 제국의 내란은 더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시드는 묵묵히 그녀의 옆을 지켰다.

“이브.”

“…….”

“정말 걱정했어.”

“…….”

“돌아와 줘서 고마워.”

이베카는 아주 조금 울었다.

* * *

그때, 카이든은 아주 침울한 얼굴로 새로운 보고서를 다니엘에게 내밀고 있었다. 리한 카드민의 반란군 합류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니엘은 무표정으로 수사국에서 올린 종합 보고서를 찬찬히 읽었다. 수사국 독단으로 그를 처리하기로 결정했다는 대목에서는 약간의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수사국의 의견이 옳았지. 결국 보기 좋게 반란군으로 들어가 버렸군.”

그러나 보고서를 넘기던 그의 손이 멈춘 것은 암살을 위한 파견 직원으로 ‘이브 진’이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였다. 그는 벌떡 일어섰다.

“이브는?”

“네?”

“살아 있나? 귀환 했나? 아직 제국이야?”

“……뒤에 나옵니다, 전하.”

카이든은 그가 이토록 평정심을 잃은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에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기억으로 다니엘은 자신의 형 윌리엄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묵묵하게 가만히 있다가 왕위 쟁탈전에 뛰어든다고 선언했을 뿐이다.

다니엘이 급하게 서류를 넘겼다. 다른 글자는 읽는 것 같지도 않았다. ‘홀로 귀환해서 치료 중’이라는 문구를 발견한 후에야 그는 카이든에게 낮게 말했다.

“어디야.”

“네?”

“내 눈으로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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