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래서 멀리한다고? 일부러?”
“자유로운 여자인데, 억지로 내 곁에 둬 봤자 새장 안에 가두는 것밖에 더 되나. 수사국 생활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왕비 자리는 더 싫어할 거야. 게다가 난 어차피 평범한 행복을 주기 힘들어. 늘 바쁘니까.”
“그래도 현재는 소중한 법이야. 땡땡이라도 좀 치고 궁 밖으로 기어나가고 좀 그래. 내가 좋은 데 소개시켜 줘?”
“안 돼. 분명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은데 정신 차리고 있어야지.”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늙어서 라인볼을 칠 수 있게 해 줘야 해, 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리고…… 더 가까이하면 보내 주지 못할 상황까지 올 것 같아. 내가 권력으로 그 여자를 잡고 가둬 둘까 봐 나 자신이 무서워. 사실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지만 그럼 그 여자 기억에 내가 더 최악으로 남겠지.”
“그런 여자를 보낼 수 있겠어?”
루벤의 심드렁한 질문에, 다니엘은 만들어진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말했다.
“나는 부모님도, 카이든도, 리젠도, 형도, 아셰도 보냈어. 괜찮아지겠지. 신경 쓸 게 여자 문제 말고 한두 개인가.”
* * *
다니엘과 이베카는 아주 담담하게 마지막 보고를 끝냈다. 카이든이 3개월 정직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이베카는 자신이 준 펜으로 보고서에 결재를 하는 다니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브, 그동안 고생 많았어.”
“예.”
“어제 카이든이 왔었어. 종합 보고서 제출을 부탁한다고 직접 말했는데 받아들이더군.”
“예, 들었습니다.”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이베카는 자신의 목소리가 부디 무덤덤하기를 바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카이든이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금세 바꿀 거면, 대체 왜 카이든보다 재밌었다느니, 과장을 빨리 달 것 같다느니, 그런 말들을 해서 이상한 친밀감을 쌓게 만들었을까.
이제 그 누구도 그녀의 하루를 묻는다거나, 직접 차를 내려 준다거나,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의견을 묻는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레이나와 시드가 있었지만 무언가 다니엘과 느낌이 달랐다. 다니엘은 진심으로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궁금해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맡은 임무는 있어?”
“스타람 밀수 건에 임시 투입되었습니다.”
“……몸조심해.”
“네.”
그게 끝이었다. 이제 이베카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아주 먼발치에서나 다니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연회라도 있으면 그는 다른 귀족 영애들과 춤을 출 테고, 그러다가 적당한 여자 골라서 국혼도 하겠지. 이베카는 그 모든 것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감정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저렇게 잘생기고, 부지런하며,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닌 왕이다. 귀족 영애들은 대화 몇 번 나누는 것만으로도 몇날 며칠을 설레어 했다고 했다. 자신은 세 달 동안 매일같이 그를 봤고, 우연한 사건이 그들 사이의 선을 넘게 했으며 또 특별한 날에 이상한 유대감마저도 생겼다. 마음이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베카는 수많은 남자들이 그랬듯이, 이러다가 말 것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마음에 담았던 남자가 한둘인가. 그토록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안리크도 쉽게 잊었는데.
그래서 이베카는 스타람 밀수 사건에 투입되어 지방으로 내려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려고 애썼다. 아메니티에서 벗어나 일에 파묻히다 보면 가벼운 호감쯤이야 금방 잊힐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이 담담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뒤, 한 달이 흘렀다. 스타람의 유명인 예술가 리한 카드민이 요란하게 국경을 넘어 왔고, 그 혼란을 틈타 제국의 2황자인 이단이 몰래 입궁했다.
다니엘이 루벤에게 말했던, ‘심상치 않은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 * *
이베카는 스타람 밀수를 추적하느라 아메탄 왕국의 남쪽 지역, 렌토까지 다녀오는 길이었다. 꼬박 한 달 동안 잠입했으나 미꾸라지들밖에 잡지 못했다. 확실히 지금 스타람 물건들에 대한 밀수는 흐름이 이상했다.
“다녀왔습니다, 과장님. 관련 보고서입니다. ‘킹’이라는 거대한 세력이 있는 것까지는 파악했는데 그 외에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레이나와 팀을 이루어 다녀왔으나 딱히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와일스는 보고서를 받으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그래도 한 달 만에 온 수사국이 이상하게 뒤숭숭했다. 물론 굉장히 큰일이 벌어진 건 알고 있었지만 단순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브.”
“예.”
“안 그래도 수사국장님이 네가 오면 할 말이 있다고 하셨다. 조금 쉬고 들어가 봐.”
이베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쉬고’? 수사국에서 그런 말은 절대로 괜히 나오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인데. 그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그대로 국장실에 들어갔다. 어차피 수사국 직원이 조직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수사국장 루카스는 딱 봐도 고민이 아주 깊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제가 지방 출장만 다녀오면 자꾸 큰일이 터지네요.”
이베카는 농담을 던지며 그의 앞에 섰다.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를 않나, 갑자기 스타람의 유명인이 넘어오지를 않나, 반란군 수장이 궁에 들어오지를 않나.”
분명히 아주 어려운 명령이 들어올 것이 뻔했다. 이제 막 주임을 앞에 둔 말단 직원으로서 수사국장을 독대할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입사 직후, ‘이브 진’이라는 인격을 만들어 주었을 때 이후 국장실에서 처음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브.”
“예.”
“리한 카드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판단하기에는 정보를 아직 충분히 듣지 못했습니다.”
루카스는 보고서 하나를 내밀었다. 카이든이 직접 심문한 리한 카드민의 입국 경위였다. 공화정이 싫고, 왕정 국가가 싫어 아메탄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리한 카드민은 사실상 ‘공화주의’라는 사상을 이렇게 전 대륙에 흩뿌린 당사자이기도 했다. 사상적 배경이 되는 책을 썼을 뿐더러 워낙에 인기인이라 금방 유명해졌던 것이다.
보고서를 넘기는 이베카의 표정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루카스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담당자인 행정국 직원에게 신변 보호를 명령하셨다. 하지만 여러모로 수상쩍은 사건들이 많아.”
“…….”
“특히 리한 카드민의 하숙집. 여기가 밀수 경로와 묘하게 이어져 있어. 나는 이 일이 아주 오랫동안 계획되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어. 도망치던 2황자가 우연히 리한 카드민을 발견하고 우연히 함께 아메탄에 들어왔다? 유명인 둘이 함께 넘어오는 건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전하께서 신변 보호를 명하신 건 어쩔 수 없으셨을 겁니다. 전 대륙에 이렇게 요란을 떨며 망명해 온 왕정주의자를 처분하기란 까다롭고…… 예술인은 건드리면 폭군 소리를 듣기 쉬우니…….”
“전하께서는 리한 카드민을 이용하고 싶어 하셔. 공화정에도 맹점이 있다는 증거로 홍보에 사용할 심산이신 것 같아. 뭐, 그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치지.”
“…….”
“하지만 제국에서 직접 리한 카드민을 불렀어. 황제 폐하께서 공연을 보고 싶다며 공물의 행렬에 끼어서 보내라고 하셨지. 곧 제국에 보낼 예정이야.”
“그럼…….”
“위험해. 제국의 황제가 만일 아메탄 왕국에서 황자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큰 비극이지. 수사국 독단이지만, 이브, 우리는…….”
그가 이베카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한 카드민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베카는 담담하게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이런 말을 직접 하는 이유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수사국 독단이야. 전하께 망명한 예술인을 죽인다는 부담을 안기고 싶지는 않다.”
“예.”
“제국에 곧 리한 카드민, 그의 담당자, 공물 행렬, 그리고 공연을 위한 악단이 함께 파견될 예정인데…….”
이베카는 담담하게 루카스의 명령을 기다렸다.
“네가 적임자야.”
“예.”
“왕립 음악단에 이미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 들킬 염려가 없고, 암살에 가장 능한 사람 역시 너고. 여차하면 그냥 마력을 집어넣어 봐. 스타람인에게 마력을 집어넣는 시도는 지금까지 아무도 안 해 봤지만.”
“예.”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수사국 직원이라면 누구나 조직의 판단을 신뢰하고 그에 따라야 했다. 이베카는 꼭 강령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정체성과 마찬가지인 수사국의 명령을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루카스는 어느 때보다 피로해 보이는 얼굴로 눈을 가렸다.
“추가 인원은 편성해 주기 어려워. 공식적이지 않은 비밀 임무인데다가, 지금 밀수판 쫓아다니느라 타 부서 직원의 손까지 빌려야 할 지경이니까. 게다가 제국은 전쟁 중이야.”
“지금까지, 모든 수사국 임무에서 목숨을 걸어왔습니다, 국장님.”
이베카는 루카스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싱긋 웃었다.
“뇌가 뜨거운 물에 손을 집어넣는 결정을 한다고 해서 손이 거부하는 법이 있습니까? 저는 수사국의 수족입니다. 그런 것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국에도, 아메탄 왕국에도 들키면 안 되니 무조건 때를 잘 노리도록 해. 전투에 휩싸일 때 몰래 사살하는 것이 가장 깔끔할 거야.”
“예.”
루카스는 이베카에게 출발 일자, 일정, 명단 등이 적혀 있는 계획서 하나를 내밀었다. 이베카는 계획서를 받아들고 목례한 뒤 국장실을 나왔다.
암살 명령을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그녀는 그 동안 수많은 범죄자들을 죽여 왔다. 보통 잠입해 있다가 큰 싸움이 벌어지면 사각 지대에서 단검을 던지거나 독침을 날리는 종류의 포지션을 가장 많이 맡았다.
근접전에서는 약하지만, 원거리 암기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수사국의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 누구나 인정하는 그녀의 장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서, 그것도 내전 중인 외국에 파견되는 것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