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전 늘 성적이 좋았거든요. 정말 생각나는 부서가 없어요.”
“마법도 잘 하고 검도 잘 쓰니, 의료국이라든가…….”
“죄송하지만 제가 생명 존중 사상이 그다지 없어서요.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없애는 데에 재능이 더 있는 것 같아요.”
“재무국은?”
“숫자에 목숨 걸어야 되는 일이잖아요. 진짜 최악인데요…….”
“법무국 어때? 귀족 편도 잘 들고 산하기관 직원 편도 잘 들고 왕 편도 잘 드는데.”
“흠.”
“괜찮아?”
“법무국은 워낙에 인원이 작아서 TO조차 없는걸요. 그래도 하면 잘 할 것 같긴 해요. 제가 본디 인간 소외에 관심이 많아서. 생각해보니까 진짜 괜찮은 것 같아요. 뭐, 행정국이나 약제국 같은 부서보다 훨씬 흥미롭네요. 제일 나아요.”
생일 때 하루 함께 밥을 먹고 편한 대화를 했다고, 이베카는 정말 스며들 듯이 생각보다 다니엘을 편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다니엘 역시 그녀에게 언제나 편안하게 질문을 던졌고 무슨 대답을 해도 화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편안한 티타임처럼 그녀는 점차 그 시간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브.”
“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가끔은 이렇게 아이들이나 할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그녀에게 던져 온갖 생각을 다 하게 만들 때도 있었다. 이베카는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전하께서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생각해 보니 여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아직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럼 좋아한다는 말은 해 봤을까. 묘한 이질감을 꾹꾹 눌러 담으며 그녀는 따뜻한 찻잔을 들고 대답을 기다렸다.
“……잘 모르겠어. 그저, 그냥 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는 그녀가 쿠키를 다 먹자 자신의 접시에서 집어 그대로 그녀의 입 안에 넣어 주었다. 이베카는 순간 입술에 느껴지는 그의 손가락 감촉에 놀라 눈이 커졌다.
“궁 밖에서 자유롭게 사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말해 봐,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쿠키를 급히 삼킨 그녀는 입술에 남은 온기를 의식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음…….”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정말로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였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 사람과는 데이트조차도 해 본 적이 없지만.”
“다른 남자들과의 차이점은?”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 너무, 너무 어려운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안리크가 떠올랐다. 남자 때문에 울어본 것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가만히 말을 이었다.
“그냥, 상관없는 것이 사랑이었던 듯해요.”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다니엘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이베카는 수사국에 가기 전, 안리크에게 진짜 자신의 가족이 되어 달라 했던 밤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사람을 혼자 사랑하면 많이 쓸쓸해지는 것 같아요.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괴로움과 외로움, 전하지 못하는 마음에 대한 답답함과 서러움, 문득 울컥 솟구치는 억울함과 끝없이 쏟아지는 생각들…… 그 조용한 고통이 나를 갉아 먹어 방황하고 헤맬지라도…….”
“…….”
“그래도 상관없는 게 사랑이겠죠.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이 나를 그렇게 쓸쓸하게 두도록 가만히 두겠어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베카는 그 침묵 속에서, 다니엘이 그녀에게 별다른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있단 걸 알아챘다. 그의 눈에는 이해라기보다는 온갖 감정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녀에 대한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덧없고, 우리의 발버둥은 잊힌 채 기록만이 남아 또 지겨운 역사를 이어 가겠지만.”
이베카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기록에조차 남지 않는 이런 마음은 그저 헛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던 것 같아요.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 되어도.”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카이든도 다니엘의 이런 모든 질문들에 이렇게 진지하게 답했을까 궁금했다. 다니엘은 카이든에게도 이렇게 매일 차를 내려 주고, 가슴 깊숙이 묻어 둔 온갖 생각을 다 끄집어 낼 기세로 말을 걸었을까?
그녀는 완벽히 귀족적인 손짓으로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딴생각에 잠겼다. 찻잔에 남은 찻물에 비친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그녀의 마음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저기, 전하…….”
“응?”
“왜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보세요?”
그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턱을 괴고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그가 대놓고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는 건 또 처음이라 그녀는 그 시선을 견디며 정자세로 기다렸다. 얼마나 대단한 대답이 나올까 기대하던 그녀는 생각보다 짧은 대답에 살짝 실망했다.
“알고 싶어서.”
“…….”
그녀는 차마 왕에게 뭐라고 할 수 없어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으나, 솔직히 말하면 다니엘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생각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야 당연히 없었고, 레이나와 시드 역시 성인이 되어서 만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서로에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퍼붓지는 않았다.
차를 마시며 여유 있게 근황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통 귀족들만이 향유하는 티파티 문화였다. 수사국 사람들은 너무 바빠 시간을 맞추기 어렵고, 어쩌다 시간을 맞춰도 술이나 커피를 마시지 여유롭게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이런 시간이 어린 시절의 결핍을 채워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을 소외시킨 자매들이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어느 귀족 영애와도 친하지 못했던 이베카가 이틀에 한 번씩 잘생긴 젊은 국왕이 직접 내려 주는 차를 마신다니!
그리고 다니엘의 질문은 언제나 그녀에게 오롯이 집중된 것 같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어 좋았다.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경청해 주는 다니엘의 표정도 좋았다.
그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보고서 전달 일과는 점차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와 다니엘은 서로 바쁜 와중에도 ‘바쁘니 이제 그만’이라는 말을 서로 꺼내지 않았다.
“수사국 동료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막 입사했을 때에는 사람 눈을 보면서 말도 제대로 못했거든요. 그런데 동료들이,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성공하도록 도와주고, 제 얘기를 잘 들어 주고, 곁에 있어 주고, 함께 응원해 주고 그래서 엄청 좋아진 거예요. 평생 고마워하면서 살아야죠.”
“행복해 보이네.”
다니엘은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좋아하고 잘 하는 일, 좋은 동료들, 평화로운 일상. 그러니 왕비가 되기 싫겠어.”
뒷말은 빈정거림의 의도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그는 술집에서 엿들었던 대화를 잊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이베카는 왠지 모르게, 그 날 다니엘이 그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품에서 그녀의 이름이 각인으로 새겨진 펜을 꺼내 결재를 할 때마다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의 반짝거리는 금발을 한 번만 쓸어 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녀는 작게 미소 지었다.
* * *
“곧 카이든이 돌아올 거야. 정직은 3개월이지만 업무가 바빠서 몇 주 일찍 올라오라고 했어. 전하께서도 카이든이 올라오면 바로 만나겠다고 하셨고.”
“네.”
와일스의 무심한 말에 이베카는 이상하게 심장이 꾹 눌리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이제 다른 업무를 배정받는 건가요?”
“그래. 요새 스타람 쪽이 심상치 않아. 이상하게 밀수가 많이 늘었어. 그쪽 인력이 많이 부족하니까 일단은 거기 지원 나가는 게 좋겠어. 레이나가 좋아하겠군.”
이베카는 본디 국왕에게 올리는 종합 보고서 검토 업무가 몹시 재미없다고 생각했고 현장에서 몸으로 뛰는 업무를 더 좋아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 흥미가 돋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그녀의 옆으로 레이나가 따라붙었다.
“과장님이 뭐라셔? 우리 팀 붙여 주신대?”
“네. 밀수가 기승이라고.”
“잘됐다. 진짜 사람이 부족해서 미치겠다 싶었거든. 근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네? 아뇨, 잠을 못 자서 그런가?”
그제야 이베카는 자신이 기운 없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서운함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이든보다 더 재미있다고, 더 즐겁다고 하셔 놓고 결국 카이든이 올라오자마자 교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시다니. 그럴 거면 왜 자꾸만 자신의 생각을 묻고, 자신의 과거를 묻고, 자신의 특성을 물었던 것일까?
매일같이 직접 차를 내려 주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묻는다고 해서 좀 친해졌다고 생각했나. 이베카는 답지 않게 시무룩해졌다.
“아냐, 너, 이거 남자 문제인 것 같아. 그때 그, 데이트 했다던 남자 때문이야?”
“네? 아니에요. 진짜 별 일 없었거든요.”
레이나의 추궁에 이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잘생기고 성격도 잘 맞는다며. 가진 것도 많고 너한테 관심도 많다며?”
“시드 선배님께서는 정말 입이 가벼우시네요. 그걸 그대로 전하시다니.”
“그 남자가 너 수사국 직원인 건 모르지? 당연히 왕립 음악단 이브 진인 줄 아는 거지?”
“선배님, 다른 얘기해요. 저 그 생각하기 싫어요.”
“어머? 너 진짜 그 남자 괜찮은가 봐?”
“생각할 필요 없다니까요. 그 남자는 저한테 딱히 마음이 없어요.”
“진짜?”
“확실해요. 앞으로 안 만나겠다는 말까지 들었는걸요.”
사실은 카이든에게 본디 자리를 돌려주는 것이지만,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툴툴거렸다. 그녀에게는 실제로 그렇게 느껴졌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그래?”
레이나가 실망이라는 듯이 어깨를 축 내렸다. 그러더니 이베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절대 그 남자에 대해서 말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