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 상냥한 말씨 속에서 그녀는 깊은 허무함을 눈치챘다. 어쩌면 가족들이 인간적으로 대해 주지 않았다고 괴로움에 몸서리쳤던 그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깊은 공허함. 위로의 말조차 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왕위에 혼란스럽고, 외롭고, 그리고 당황스럽지. 모든 결정에 확신이 들지 않아 어려워. 내 자신이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어.”
“……환경의 변화에 흔들리는 건 당연한 거예요. 곧 익숙해지시고, 좋은 주군이 되실 거예요.”
그녀는 낮게 대답하며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근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아.”
이베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을 들으며 호수 근처의 공원에서 아이들이 라인볼을 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인볼은 라켓과 끈이 연결되어 쉽게 랠리를 이어 갈 수 있는 구기였다. 석양이 내리는 호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외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 둘. 이베카는 충동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저도 엄청 외롭게 컸거든요. 자매가 넷 더 있었는데, 꼭 둘씩 라인볼을 하더라고요. 저는 한 번도 껴 보지 못했어요.”
“뭐? 왜?”
“그냥, 언제나 혼자라서요. 그래서 유일하게 함께 있어 주는 것 같은 남자한테 매달려 보기도 했었어요.”
“…….”
“그 사람한테 차이고 늘 혼자로 살 줄 알았는데, 수사국에 들어와서 좋은 동료들이 생기고 그래서 옛날의 그 외로움은 이제 아득해졌어요. 가족은 선택할 수 없지만, 곁에 두는 사람은 선택할 수 있으니까.”
혼자 남은 왕에게, 이베카는 싱긋 웃어 보였다.
“라인볼은 난이도가 쉬워서 애나 노인이 하는 구기잖아요?”
문득, 그녀는 그가 왕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고, 그저 매일 만나는 편한 친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어린애일 땐 라인볼을 한 번도 못 쳐 봤지만, 노인이 돼서는 꼭 매일같이 가장 가까운 사람과 라인볼을 칠 거예요. 그때는 함께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전하, 아니, 다니엘도, 지금은 혼자 같겠지만 결국 새로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행복해질 거예요.”
“이브.”
다니엘은 피식 웃어 보였다.
“좋은 사람이네. 카이든이 멀리 가서 그대와 생일을 보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야. 걘 위로는 형편없거든. 수사국에 들어온 지 몇 년 됐지? 혹시 대학 후배인가?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저는 수사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지금 같지 않았어요. 늘 의기소침해 있었고, 지독한 애정 결핍에, 아무도 못 믿고 매사에 의심만 많았거든요. 하지만 열여덟 해를 눈치 보며 살았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환경이 바뀌니 차차 극복했던 거죠.”
“열여덟…….”
“전하께서 전혀 좋아할 만한 애가 아닐 거예요. 그러니 지금 알게 된 것이 다행이에요.”
“난 지금의 내 모습이 가장 마음에 안 드는데.”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쟁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 입장이지. 더 어렵고, 더 흐릿하고, 더 위험한 길이야. 마음도 못 잡고, 갈팡질팡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부끄럽군.”
“적응하시고, 환경이 달라지면 또 달라지실 거예요.”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전 산하기관에 들어와서 너무 좋아졌거든요. 아마 제 스스로 성취해 낸 최초의 인정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산하기관은 절대 나가지 않을 만큼 저는 제가 좋아요. 전하께서 아메탄을 잘 이끌어나가시면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아지실 거예요.”
여러모로 이상한 날이었다. 아마도 생일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베카는 주머니 속에서 잡화점에서 몰래 휘갈긴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싱긋 웃으며 받아들었다.
별다른 것을 안 했던 저녁이니만큼 내용도 별다른 것이 없었다. 그저 ‘탄신일을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전하’ 같은 말이 아니라, ‘생일 축하해요, 다니엘. 오늘 행복했기를. -E. J.’라는 짧은 문구를 썼을 뿐이었다.
“수사국에서,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동료들이 응원해 줘서 저는 정말로 모든 것이 많이 달라졌어요. 다니엘은 신중하시니까 뭐든 잘 하실 거고, 결국엔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 줄 거고, 그래서 행복해지실 거예요.”
“잘 할 수 있는 일…….”
“저 단검 던지는 거랑, 추론 하는 거 보셨죠? 수사국의 보배랍니다. 연기도 얼마나 잘하는데요. 완전 수준급이에요.”
이베카가 당당하게 말하고, 씩 웃었다.
“다니엘도 잘해 주세요. 저 진짜 늙어서 라인볼 쳐야 하거든요. 전쟁이라도 나면 수사국 직원이 제일 많이 죽을 텐데, 죽음은 무섭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니까요.”
다니엘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메나타 호수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죽 둘러보고, 또 다시 그녀를 바라본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어쨌든 예쁘게 꾸미고 온 것은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상하게 다니엘과 순식간에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데이트 후기 말해 줘.’
레이나의 말이 갑자기 떠올라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냥 왕의 잠행에 따라왔을 뿐인데, 왜 다른 사람은 안 보고 서로만 보고 있었던 것 같지? 게다가 궁에서는 전혀 안했던 서로의 사적인 얘기를 잔뜩 하고……. 하지만 이성 관계에 둔한 왕은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베카는 억지로 상념을 멈췄다.
때마침 다니엘도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마워.”
“……뭐가요?”
“가장 못나고, 가장 힘들고, 가장 혼자라고 느껴질 때에 함께 있어 줘서.”
충동적으로. 이베카는 다니엘의 손을 먼저 잡았다. 손가락이 얽히고, 그 어느 데이트보다도 데이트 같다는 생각을 했다.
6. 과거 (2)
“이브. 점심 먹으러 가자.”
이베카는 종합 보고서를 정리하다가 시드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그녀는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섰다. 레이나가 외근을 나가 있었기에 둘이 식당에 가야 했다.
“어? 오늘 선배님 오프 아니세요? 일주일 내내 철야셨잖아요.”
“사건 하나 터져서.”
“뭔데요?”
“아직 나도 정리가 잘 안 돼서 설명하기 어려워.”
시드는 무뚝뚝하게 말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베카는 기지개를 켜고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검은색 수사국 제복을 입은 시드는 마치 교복 입은 고등학생 같았으나 웃는 법도 없고 목소리도 워낙에 낮아서 귀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베카가 하품을 하며 식판을 놓고 식사를 하는데, 침묵 속에서 밥을 먹던 시드가 문득 던지듯 물었다.
“이제 그 남자 안 만나?”
“네?”
“한 달 전에, 잔뜩 멋 내고 나가던 그 날.”
“아.”
다니엘의 생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혼자 불순한 생각을 하면서 온갖 치장을 다 한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진 탓이다. 그 다음 날, 레이나가 잔뜩 흥분해서 물어봤을 때 그저 저녁 식사를 한번 했을 뿐이라고 대답한 이후 시드와 레이나는 그녀가 누구와 데이트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다.
그 착각을 딱히 고쳐 줄 생각이 없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 시드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만나?”
“만나긴 하는데, 별 사이 아니에요.”
거의 매일 만나긴 하지. 아침마다 보고를 드리니까.
“그럼 왜 만나?”
“곧 정리할 거예요.”
그녀는 콧잔등을 긁으며 되는 대로 대답했다. 몇 주만 더 있으면 카이든이 돌아오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시 정적을 지키던 시드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또 한 번 물었다.
“왜 정리해? 못생겼어?”
“아뇨. 제가 만난 사람들 중 제일 잘생겼는걸요.”
“그럼 성격이 나빠?”
“아뇨. 잘 웃고 다정해요. 저한테는 좀 짓궂은 장난을 치긴 하는데, 음, 그래도 되는 위치라…… 제가 애초에 잘못한 것도 있고…….”
이베카는 왜 이런 대화를 시드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싶었지만,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
“그럼 왜…….”
“그냥, 가진 게 너무 많은 남자라 저랑 안 어울려요. 언감생심, 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에 씁쓸함이 묻어나서 스스로 놀랐다. 시드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네?”
“그 남자는 널 어떻게 생각 하냐고.”
“그거야 모르죠. 근데 특별한 마음은 없을 걸요? 별다른 거 하지도 않아요.”
그녀는 생각에 잠긴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만날 때마다 자꾸 저에 대해서 물어보기만 해요.”
그 말에 시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묵묵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포크로 음식을 깨작거리면서 매일 보고를 하러 갈 때마다 자꾸만 그녀에 대해서 묻는 국왕을 잠시 생각했다.
이상한 생일날 이후, 그녀가 집무실에 들어오면 다니엘은 그녀에게 일단 앉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스스로 차를 내려 주며 그녀에게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이제는 다니엘이 내려 주는 차와 항상 바뀌는 다과가 은근히 기대가 될 지경이었다.
질문은 세상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그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온갖 질문 공세에 당황하는 그녀에게 그는 간단히 왕명이라며 최대한 자세히 대답하라고 말하곤 했다.
“이브, 여기 셋째 줄에 있는 ‘이메스’가 어디 있는 지역이지?”
이런, 답이 정해진 간단한 질문은 아주 드물었다.
“오늘 뭐 했어? 제출하고 나서 이제 어디 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그녀의 하루에 대한 질문은 거의 매일 이루어졌다.
“제국의 반란이 어떻게 될 것 같나? 5년은 넘을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그러나 누구나 궁금해 하는 질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이브, 성적이 안 좋았다면 수사국 말고 어디에 갔을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자신조차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을 받을 때에는 정말로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