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그대가 카이든의 자리를 넘보고 있으니 다행이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억지로라도 앞에 앉혀 둘 수 있었으니까.”
“……여동생께서는…… 감금 중이시니…… 뵙기 어려우시겠군요.”
그나마 궁에는 그의 여동생이 있었다. 태자인 윌리엄을 죽인 죄로 감금당해 있지만……. 다니엘은 최근 반 년 사이에, 가까웠던 모든 사람을 잃었다. 형도, 동생도, 친했던 친구들도. 그는 조용히 웃어 보였다.
“그 애는 내가 이 자리에 딱히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알고,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운 것을 아는 유일한 애지.”
이베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열여덟 해를 혼자서 외롭게 살아 오다가, 이제야 좋은 동료들과 마음에 드는 조직에서 소속감을 느끼며 즐겁게 살고 있었다. 자신과 정확히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왕의 쓸쓸함을 짐작하는 것조차 마음이 아렸다. 혼자였던 경험이 있기에 공감할 수 있는 외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고든의 전입 결재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야. 이 왕위에 희생된 충성이니까.”
이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번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제가 그 입장이더라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을 거예요.”
“부상을 당해서 다시는 수사국에 있지 못하게 되어도?”
“목숨을 바치게 되더라도.”
그의 눈이 가만히 이베카를 바라보았다. 반쯤 놀리면서 오늘도 억지로 데려왔는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역시 보통이 아니다. 그녀의 왼손에서 빠르게 날아가던 단검이 문득 떠올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이베카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왕족과 귀족이 핏줄과 정통성을 지키는 것처럼…… 수사국 직원들은 아메탄 왕국을 지킵니다. 우리는 진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것뿐이에요. 진실과 정의, 애국을 말하는 수사국 강령에 따라서.”
“죽으면, 이 모든 즐거움이 끝인데. 아메탄 왕국은 그대를 기억하지 않아. 산하기관 직원은 셀 수 없이 많으니까.”
“국왕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데요. 아, 죄송합니다.”
“왕명을 잊었나. 편히 말해.”
“그토록 많은 희생과 충성에, 통치로 보답할 왕족을 믿고 있는 것이지요. 이 나라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이 소중히 여겨 주면 됩니다. 정치가 귀족들의 동물 싸움으로 변하기 전에 왕족이 윤리적 규범과 정당성으로 길을 잡아 주실 거라 믿어요.”
‘전하’라는 말을 쓰지 못해 ‘당신’으로 순화했지만 다니엘은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귀족들이 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명분을 찾는 일도 분명 중요하고요.”
그녀는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그의 푸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희 산하기관 직원들은 말의 안장 같은 존재들입니다. 말이 어디로 향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여할 수 없어요. 다만 기수인 국왕께서 우리로 인해 말을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몰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하는 귀족들의 참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을 안전한 곳으로 최대한 오랫동안 끌고 가려는 목표는 같지 않습니까.”
“…….”
“기수는 한 명이니 당연히 외로우시겠지만…… 전하를 위해 힘쓰고 있는 저희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유념하시어,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당신을 믿고 의지하는 존재가 많으니,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그녀는 언제나 혼자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쓸데없이 깊었다.
다니엘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그대는 한 명인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모두를 대변하는 것 같아. 그러니 자꾸 내가 그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게 되는 거겠지.”
주변에 늘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왕좌에 오르고 난 뒤 진정으로 홀로 된 왕은 뭐든지 명쾌한 수사국 여직원에게 충동적으로 속삭였다.
“……나, 사실 이 자리가 두려워.”
“…….”
“어린 시절부터 왕위를 탐내 본 적 없거든.”
그저 왕위에 오르는 것이 형과 어머니를 죽인 세력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했을 뿐.
그러나 현실은 동화처럼, 왕위에 오르고 나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이후 이어가야 할 나날들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의 어깨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베카는 가만히 그의 정석적으로 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 부담감을 아는 탓이었다. 어느새 다니엘의 말투가 진지해졌다.
“차라리 전쟁이 나서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면 목숨을 다 바쳐 나라를 지키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도 아니지. 전쟁은 제국에서 나고 있으니.”
“전쟁이라고 생각하세요? 진압될 반란이 아니라…….”
“단순히 진압될 반란으로 보여?”
이베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 큰 내란으로 번져 대륙이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 시기였다. 아직 일반인들은 그 양상을 아주 조금밖에 모르지만, 수사국 내에서는 반란군의 뒤에 공화 정부가 있으며 스타람 공화국 역시 배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전하.”
생일날에 나누기에는 너무 무거운 얘기였다. 결국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메탄 왕국을 생각하느라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일어나,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다니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본능과도 같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열 살 이후 생일 때마다 안리크와 쿠키를 먹었고, 수사국에 들어오고 나서는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만일 다시 생일을 혼자 보낸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쓸쓸했다.
생일날만큼은 이 남자가 이렇게 만들어진 웃음을 짓는 거 말고, 조금 더 즐거운 하루를 보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보여 준 조금의 속마음에 대한 대가였다. 왕위가 두렵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그가 왕이라고 해서 위로를 못 해 줄 이유는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곁에 있어 줄 수 없는 그의 진짜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다니엘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산하기관 월급이 꽤 되거든요. 선물 하나 사 드릴게요.”
“뭐?”
“문 상단의 잡화점에 가요. 거기 물건들은 보증서가 따라와서, 어지간하면 중간은 가거든요.”
“괜찮아. 난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학창 시절이 그리우신가 본데, 학생들이 많이 쓰는 펜이라도 사 드릴게요. 결재할 때 쓰세요. 지난번에 보니까 호위무사에게 빌려 쓰시던데.”
순간적인 충동에 그를 끌고 아메니티 거리를 걷던 그녀는 제 손을 감싸는 그의 체온에 왠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간지러움을 느꼈다. 아, 이렇게 왕의 손을 함부로 먼저 잡아도 되나? 하지만 싫어하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갑자기 혼자가 된 왕에 대한 연민이라도 좋았다. 그녀는 그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홀린 듯이 문 상단의 잡화점에 가서 그와 함께 별것도 아닌 펜을 골랐다. 선물 주는 사람의 이름을 새겨준다고 하여 ‘E. J. 로부터’라는 각인도 박았다. 다니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가 주는 펜을 받아 품에 넣었다. 사흘 뒤에는 비교도 안 되는 선물이 그의 앞에 넘쳐나겠지만, 이베카는 그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한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잘 쓸게, 고마워.”
“뭘요.”
아직도 날이 저물지 않아서, 이왕 나온 김에 아메니티의 명소인 메나타 호수라도 산책가자며 거리를 걷는데 이베카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석양빛에 메나타 호수는 반짝이며 빛나고, 아메니티의 사람들이 평화로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 멀리 왕궁이 마법구에 감싸여 꿈결처럼 빛났다.
이베카는 흘끔 그림처럼 웃고 있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혼자 대학가의 술집에 앉아 있었을 그의 심정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해졌다. 석양이 지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의 옆모습을 보며 이베카는 잠시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하게 웃고 있지만……. 그리고 저 의미 없는 웃음이 온갖 귀족가 영애들에게 흩뿌려지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브.”
“네?”
“왜 그런 표정이야?”
“……무슨 표정이요?”
“내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표정.”
후줄근한 후드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다니엘이 평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 그녀가 씩 웃으며 농담을 했다.
“……엄청 예뻤나 보죠?”
“참신한 아부네.”
그녀는 그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괜찮으세요? 혼자라는 거.”
“글쎄. 사실은 익숙하거든.”
“……네?”
“어느 날 후궁의 손에 어머니가 어이없게 돌아가셨지.”
이베카는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니엘의 친모이자 왕비였던 스잔나가 왕의 첩이었던 테스티의 계략에 빠져 죽은 것은 전 국민이 아는 사실이었다.
“나는 친형, 윌리엄의 행보를 위해 내 인생을 걸고 도와 줄 생각이었지만…… 가장 아끼던 여동생이 형을 죽였어.”
왕가의 일이라 그저 이야깃거리로 끝냈을 뿐이지만 그 폭풍 속에서 가만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것은 눈앞의 다니엘뿐이었다. 그녀는 새삼 다정하게 말하고 있는 그가 얼마나 외로울지 실감이 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 형제 중 하나는 죽고, 하나는 멀리 떠나고, 하나는 감금 상태지. 그 인격에 대해 의심조차 안 했던 첫째 형은 약자에게 자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잔인한 사람이었고, 언제나 멀리 있던 이상을 말했던 둘째 형은 사랑하는 여자조차 못 지킨 부족한 사람이었고, 가장 가깝고 나와 닮았다 생각했던 여동생은 사람을 죽이고 그걸 감쪽같이 속인 영악한 사람이었어.”
“…….”
“홀로 남는 건 익숙해. 어쩌면 그게 싫어서, 걱정이라고는 없던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알고 있는 카이든과 리젠을 그리워하는 걸 수도 있겠지. 윌리엄이 죽으며 왕위 쟁탈전에 뛰어든 순간, 나 역시 외로워질 것이라는 걸 알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