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이브?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급한 보고서입니다.”
그녀가 천천히 말에서 뛰어 내렸다. 다니엘의 주변에서 그림자처럼 있던 안리크가 눈에 보였다. 다니엘은 말에 앉아 활을 옆에 있던 호위 무사에게 넘기고 그대로 이베카의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스타람까지 배후에 있다면 제국의 내란은 쉽사리 잡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그의 표정은 보고서를 읽을수록 심각해졌고 이베카는 그에게 알 수 없는 연민이 들었다.
왕위에 앉자마자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절대적인 마법의 힘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제국은 마력이 사라지며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메탄 왕국은 애초부터 제국의 인정으로 정통성을 부여받은 약소국이었다. 내란으로 시끄러운 제국에게 휘말리지 않기 위해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지도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중립 귀족 집안인 이베카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으며 중립을 지키고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안리크, 펜을 하나.”
다니엘이 한숨을 쉬며 결재를 위해 가장 가까이 있던 안리크에게 펜을 달라고 했을 때였다. 이베카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느끼고 갑자기 휙 돌아서 수풀 가운데에 단검을 세 개 던졌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다니엘도 안리크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긴장된 표정으로 수풀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풀 쪽에서 비틀거리며 풀썩 쓰러진 것은 사슴 한 마리였다.
“아…….”
이베카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혹시나 멧돼지 같은 거친 야생 동물일까 봐 빠르게 사살했습니다. 서명 중에 혹시라도 다치실까 봐요.”
갑자기 수풀을 헤치며 달려오는 야생동물의 기척을 느낀 이베카가 일단 단검을 날린 것이었다.
사슴을 쫓고 있던 귀족가의 청년 하나가 아쉽다는 듯이 다른 방향에서 뒤따라 달려 나왔다. 이베카는 정중하게 사과하고, 사슴에 꽂힌 단검을 회수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손수건에 피를 대충 슥 닦았다.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역시 수사국 직원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움직임이 빠르다니.”
그녀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잡고 보니 사슴이라, 괜한 소동을 일으킨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제복 사이로 단검을 밀어 넣는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다니엘뿐만이 아니었다. 안리크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의 손짓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흐트러진 금발 머리를 다시 한번 대충 묶고, 다니엘에게 결재가 끝난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루카스에게 전해. 스타람에 대한 그 어떤 정보라도 모으라고. 그 섬과 사병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바가 두려울 정도로 없으니. 마법을 못 쓰는 그들의 군대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파악을 하고 있어야 해. 긴급 사안이니 새로운 사실을 알 때마다 보고하도록.”
“네.”
그녀가 목례를 하고 다시 말에 올라타 떠나려는데, 사슴을 쫓아오던 젊은 귀족이 감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사국 아가씨, 여기 온 김에 솜씨 좀 더 보여 주면 안 될까요? 아니, 무슨 검을 그렇게 잘 써? 여기서 조금만 더 놀다 가. 나도 좀 가르쳐 주고. 화살에 비할 바가 아닌데?”
이베카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에게 말을 건 귀족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베카를 못 알아보겠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어머니의 외가, 레델톤 공작가와 핏줄이 연결되어 있는 외사촌이었다. 어지간한 난봉꾼이라는 소문은 자매들의 수다를 엿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짐승을 죽이는 여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술기입니다. 배우고 싶으십니까?”
그녀가 가고 나면 뒤에서 산하기관 직원 주제에 오만방자하다며 방방 뛸 것이 뻔했지만, 이베카는 말 몇 마디 섞어 본 적 없는 난봉꾼 외사촌의 집적거림에 응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바로 옆에 있는 느티나무를 향해 품속에서 꺼낸 단검을 차례로 다섯 개 던졌다.
“너, 건방지게…….”
순간적으로 몸을 추하게 움츠린 외사촌이 뒤늦게 허리를 다시 펴고 눈을 부릅떴다. 단검 다섯 개가 느티나무에 정확한 간격과 각도, 똑같은 깊이로 꽂혔다. 이베카는 냉담한 눈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부탁하신 대로 솜씨는 보여 드렸습니다. 수사국에서도 저만큼 단검을 잘 다루는 이는 없으니 좋은 구경 되셨을 겁니다.”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왕에게 예를 표하고, 능숙하게 말을 몰아 단검을 회수한 뒤 사냥터를 떠났다. 다니엘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대놓고 귀족의 편을 들어줄 땐 언제고 정작 고위 귀족 앞에서 꼿꼿한 것이 재미있었다. 남자는 다 똑같다고 회의적인 발언을 할 때는 언제고 집적거리는 남자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에도 재능이 있다.
대놓고 왕이 빈정거리는데도 덜덜 떠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다가, 작은 위험이라도 감지되면 망설이지 않고 단검부터 날리는 대범함이라니.
“빨리 과장 되겠네.”
다니엘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는 동안 그 옆에서 안리크는 놀랍도록 빠르게 단검을 던지는 수사국 여직원의 잔상을 상기했다. 4년 가까운 시간동안 전혀 모습조차 볼 수 없는 이베카가 생각난 탓이다.
백작가에 발걸음을 안 할 줄도 몰랐거니와 자신에게조차 연락 한번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브라는 여자가 왼손으로 단검을 빠르게 던지는 모양새는 이베카와 비슷했으나 외양이나 성격이 완전 달랐다.
그리고 안리크는, 이베카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웃는 다니엘을 보고 그녀가 그의 마음에 들었음을 눈치챘다.
* * *
이베카가 이틀 후에 집무실에 들고 온 것은 산하기관 전입 명단 정리 보고서였다.
아메탄 왕국의 산하기관은 모두 여덟 개이고, 입사는 대학 시절의 성적으로 정해진다. 하지만 당연히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이 생기거나 갑자기 일이 많아져 일손이 부족할 경우 전입TO가 생겼다.
1년에 한 번씩 신규를 받으니 전입TO가 자주 나는 편도 아니었고, 부서를 옮긴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라서 산하기관 전입은 흔하게 벌어지는 일은 아니었다.
“여기 이 문장, 고든 에머슨의 부상 관련해서…… 카이든이 변장을 들킨 이유가 눈 색깔이라고? 자세하게 말해 봐.”
“……수사국에서 아무리 외관을 바꾸더라도 눈 색깔은 못 바꿉니다. 카이든의 새까만 눈동자는 워낙에 흔치 않다 보니까…….”
다행히 다니엘은 더 파고들지 않았다. 다만 착잡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든 에머슨이 수사국에서 정보국으로 옮긴다고…… 부상이 심한가 보군.”
국왕이 산하기관 직원들의 이름을 다 알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고든 에머슨은 그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불법 마법 상점을 급습했을 때에 커다란 역할을 한 남자라 기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부상이 심해 평생 날랜 움직임이 불가능하다는 의료국의 진단까지 있었다.
“네. 어차피 더 있어 봐야 민폐만 된다고……. 하지만 정보국이 나이 든 사람 있기엔 더 좋다며 씁쓸한 내색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씁쓸하겠지. 한때 동료였던 이들에게 평생 감시 받는데.”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수사국을 나가게 되면, 특히나 다른 기관에 몸을 담게 된다면 수사국에서 활동했던 기억들을 모두 지우거나 평생 감시를 받아야 했다. 기억 삭제 마법은 산하기관을 고대 마법으로 축복한 이브나가 남긴 수사국의 비기이기도 했다.
대다수의 비기는 국왕에게도 비밀이지만, 기억 제거만큼은 전 국민이 알고 있었다. 역대 수사국장들은 기억 제거 그 자체가 수사국이 철저하다는 것을 공표하는 증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든 에머슨은 수사국에서 10년을 근무했는데, 결국 그 결과가 감시받는 삶이라니.”
“저희 모두 그런 것쯤이야 각오하고 입사했습니다.”
이베카는 젊은 국왕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10년이 아닌 20년이 날아가더라도 아메탄 왕국을 이어 가기 위한 발걸음이었다면 수사국의 그 누구라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
“……그래도 마음 편하게 결재가 되지는 않는데.”
다니엘이 턱을 괴고 낮게 말했다. 이베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부상을 당해 수사국에 더 이상 근무할 수 없었을 뿐이고, 그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하더라도 무언가 해결되는 건 없었다.
희생을 당연히 여기며 무심하게 결재를 하는 왕도 마음에 안 들겠지만, 이렇게 결론이 다 난 일에 구태여 마음이 약해져 질질 끄는 왕의 모습도 보기에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부루퉁한 표정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는 듯 그가 미소를 지으며 보고서를 그대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한 번에 결재하는 것은 마음이 좀 불편해.”
“…….”
그럼 두 번째에는 괜찮다는 뜻인가. 국왕의 말에 반항할 수 없는 그녀가 보고서를 받아 드는데, 다니엘이 싱긋 웃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결재하도록 하지.”
“……네?”
“오늘 저녁 식사 전, 내 침실로 와.”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평상복 입고.”
이베카는 이 매끈한 남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짧은 인생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핑계를 대어 이성을 자신의 침실에 부르는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야, 정신 놓고 있지 말고 일해. 멍하니 뭐 하는 거야?”
복도를 걸어가던 시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전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이베카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시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