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러나 그냥 넘어가기에는 평소와의 괴리가 좀 괘씸한지라 장난을 좀 걸어 볼까 하여 충동적으로 놀려본 것뿐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명료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답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그저 당당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는 보고서 결재를 잠시 미루고, 빙글빙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는데.”
대충 죄송하다는 말 몇 마디만 듣고 보내려던 그는 눈앞의 수사국 직원과의 대화를 좀 더 이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짐짓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귀여운 애인들한테 하던 것처럼 사랑과 관심을 좀 더 보여 주지 그래. 아, 그래도 이런 저런 추론으로 내 심경을 알아챈 건 재미있었어.”
“…….”
이베카는 귀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술자리에서 그런 미친 소리들을 지껄여 가지고……. 하지만 왕이 제안하는데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 달 동안 마주친 다니엘의 인성을 믿으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이런 말들로만 끝나는 건 아닙니다.”
애매하게 마무리해서 카이든이 돌아올 때까지 고생하느니 아예 다니엘의 마음에 들거나 아니면 된통 기분을 상하게 해서 담당을 바꿔 버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충분한 사랑과 관심을 단기간에 보여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여유로워 보이던 다니엘이 당황한 듯 미소를 거두었다. 이베카는 괜히 말했나 싶어 입술을 재빨리 깨물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자신이 더 민망한 것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그게 무슨…… 손끝이라니…….”
마치 어린애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았다. 이베카는 눈을 깜빡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신체적인 접촉을 뜻하는 거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늘 대화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던 국왕이 이토록 의도하지 않은 당황스러움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베카가 가만히 다니엘을 바라보자 그가 황급히 말했다.
“그 누가 되었든, 결혼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책감이 드는…….”
변명하듯 이어지는 다니엘의 어조에 이 화제에 대한 부끄러움이 배어 있는 것을 눈치챈 이베카의 입이 벌어졌다. 무슨 왕이 이 정도의 주제에 갑자기 부끄러움을 탄단 말인가! 여자와 단 둘이 이런 스킨십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이 처음인 듯했다.
다소 어이가 없어서, 이베카는 멍하니 물었다. 편하게 말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니까.
“저기, 전하……. 여자와…… 손을 잡은 적은 있으신가요?”
“춤을 추거나 에스코트를 할 때?”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이베카는 자신이 조금 전만 해도 덜덜 떨었던 것을 잊고 조심스레 한 번 더 물었다.
“이, 입을 맞추신 적은요?”
“……상상도 해 본 적 없는데. 그냥 그런 생각들 자체가 굳이…….”
이베카는 향후 아메탄 왕가의 후계가 걱정되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는 왕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결혼하지도 않은 상대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죄책감을 가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전하는 앞으로 후계 문제에서 자유로우실 수 없습니다. 왕비에게 아이를 보지 못하면 비를 들이셔야 하고, 그것이…… 왕좌의 무게이기도 하지요. 아메탄 왕가를 유지하셔야 하니까요. 지금까지 이어져 온 1,000년의 역사를 또 다시 이어서.”
“하지만…….”
“자연스러운 것이니 앞으로도 죄책감 같은 것은 갖지 마세요. 선대왕께서는 한 명의 여자를 사랑했지만 비는 셋이었습니다. 만일 선대왕께서 사랑하는 여자와만 관계를 하셨다면 전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마지막 말도 괜히 한 것 같아 이베카는 잠시 멈칫했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뒤를 생각하지 않는 발언들을 많이 하지? 아마도 언제나 물처럼 부드럽게 흐르던 국왕이 평소와 다른 옷차림과 말투로 그녀를 대하고 있어서인 것 같았다. 환경에 따라 사람은 자꾸만 바뀌기 마련이니까.
다행히 다니엘은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않았고, 대신 탐색하는 눈으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그대도 사랑하지 않아도 몸을 섞은 적이 있나?”
이베카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과 불꽃이 튀는 건 다르니까요. 욕정이란 환상과 같아 본디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충족하기 전에야 몸이 달아 엄청난 것처럼 생각되지만 막상 채우고 나면 별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은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보고서에 서명했다. 이브는 보고서를 받아들고 꾸벅 인사했다.
“그럼 편한 밤 되십시오, 전하. 제 발언이 불편하셨다면 수사국에 일러 담당을 바꾸…….”
“아냐.”
이베카의 말은 바로 끊겼다.
“조금 더 노력해 봐.”
인위적이고 거만한 어조로, 그가 씩 웃었다.
“네?”
“오늘 밤은 카이든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으니까. 혹시 알아? 빠르게 과장이라도 달지?”
이베카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 * *
“사실 저는 지금 3개월간 지방을 돌고 왔잖아요? 그런데 그 3개월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얼떨떨해요.”
레이나가 출장이었기 때문에, 이베카는 시드와 단 둘이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시드는 아무 말도 없이 밥을 먹으며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베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샐러드를 포크로 푹푹 찍었다.
“아셰 왕녀님이 윌리엄 태자님을 독살할 정도로 악독하신 분이었나 싶고, 왕위를 그토록 염원하시던 루벤 2왕자님은 갑자기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떠나 버리셨고, 왕좌에 앉으신 다니엘 전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다정하고, 상냥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함께 있다 보면 뭔가 느낌이 묘해요.”
차마 지난 술자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니엘이 모두 들었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시드는 레이나와 자신이 붙어 있으면 할 말 못 할 말 다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얘기까지 하면 이제 아무 소리도 못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시드가 묵묵히 식사를 하다가 말했다.
“기본적으로 선량하신 분이지. 그 정도면 폭군이 되시진 않을 거라는 데에 세 달 월급이라도 걸 수 있어. 하지만 왕족은 언제나 겉과 속이 다른 법이야.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지 몰라. 그게 군주로서의 자질이기도 하지만. 왕위에 오르신 후 생각보다 진보파 귀족들을 내치지 않아서 지금 모두 다 당황하고 있다고 들었어.”
“음.”
“너무 얽히지 않도록 해. 어차피 두 달 후면 카이든은 돌아오니까.”
시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베카는 배시시 웃었다.
“그래도 정말 잘생기셨어요. 미남의 정석이랄까. 보고 있으면 눈은 호강하는 느낌이에요.”
“샐러드 내 거 더 먹을래?”
“아, 감사해요. 그런데 선배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안 드세요?”
“오전에 과장님께서 간식을 돌려서. 넌 보고서 내러 가느라 못 받았겠지만.”
“어쩐지! 다들 점심 먹으러 안 가시더라…… 그런데 선배님은 왜 오셨어요?”
이베카가 눈을 굴리며 말했지만 시드는 무뚝뚝하게 표정의 변화 없이 귀 뒤를 긁을 뿐이었다.
“난 끼니 안 걸러.”
“아.”
“어쨌든 지나치게 가까이 하지 마. 왕족과 가까웠던 산하기관 직원치고 결말이 좋았던 적이 없잖아.”
“전하께서 절 좋게 보시지도 않았는데요, 뭐.”
이베카는 볼멘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한 달간은 관심도 없으시다가, 요새는 중간도 못하고. 어쨌든 별로 마음에 드는 업무는 아니에요. 재미도 없고.”
시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차라리 현장을 뛰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이베카는 단검을 빠르고 정확하게 던지는 것으로 수사국 내에서 유명했다. 안리크에게 배운 기술에 뒷받침하여 수사국의 훈련까지 더해지니 온갖 암기를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온갖 위험한 일에 투입된 적이 많았지만 그 때마다 이베카는 꽤 좋은 성과를 냈고, 그 성취 경험들이 예전의 주눅 들어 있던 천덕꾸러기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조금만 참아, 카이든이 곧 오니까.”
친하지도 않은 후배 카이든을 이토록 기다리게 될 줄이야. 이베카는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그 술자리에서의 대화를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불편할 일은 아니었을 텐데.
* * *
이틀 뒤, 급한 보고서를 들고 입궁했을 때 다니엘은 귀족들 몇몇과 사냥 중이라는 답을 들었다. 제국의 반란군에 대한 보고서였기 때문에 이베카는 망설이지 않고 말을 빌려 사냥터로 향했다.
반란군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 공화주의라는 것을 알고 나서 다니엘의 신경은 그 무엇보다도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번 보고서는 스타람 섬이 그 뒤를 봐주고 있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상당히 긴급한 내용이었다.
그의 평소 행실로 보아 사냥을 즐길 것 같지는 않고, 그저 귀족들과 함께하는 사교 모임으로 취급할 것이 뻔했다. 그런 그가 사냥중이라고 해서 급한 보고를 미루는 것을 원하진 않을 것 같았다.
어렵지 않게 사냥터에 진입한 그녀는 시녀들에게 다니엘의 위치를 듣고 그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몰다가, 갑자기 시야에 잡힌 다니엘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
사냥터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다니엘의 옆모습이 새로워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사냥감을 보는 냉정한 눈매에는 순간적으로 잔인함이 맴돌았고, 굳게 다문 입술엔 긴장이 어려 있었다. 한 치 흔들림도 없는 자세와 단단히 일어선 근육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전하께서는…… 저런 표정과 긴장을 다 감추고 있으셨구나.’
이베카는 자신이 대체 왜 서성이는 줄도 모르는 채 가만히 왕의 활시위를 바라보았다. 다니엘의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 어느 짐승을 맞추었을 때까지 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고, 사냥개가 달려 나감과 동시에 다니엘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짐승을 볼 때의 잔인한 눈매는 어느새 사라지고 다정한 눈매가 웃었다. 그러나 이브는 그 상냥한 얼굴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한 것임을 눈치챘다. 비꼬는 듯한 반말이 여전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