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녀가 비록 반쪽이지만, 두 개의 삶을 살면서 느낀 바였다. 평민들과 귀족이 삶에 임하는 자세는 시작점부터 상당히 달랐다. 그녀 역시 수사국에 오지 않았더라면 정략혼을 당연히 여겼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귀족가의 혼사는 당연히 중요한 전략입니다. 역사적으로, 잘 맺은 혼약으로 위기를 벗어난 가문들이 많습니다. 자기 인생 하나 살고 끝나는 산하기관 직원들과는 애초부터 그 무게가 다릅니다. 남들 뒷얘기, 미용과 몸치장, 사치와 향락은 사랑에 모든 것을 걸 수 없기에 벌어지는 치밀한 계산이며, 그건 가문의 무게를 지었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죠. 산하기관 직원들이나 가끔 왕족들까지도 귀족 영애들을 무시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군요. 그대는 산하기관 직원인데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저는 지켜야 할 가문의 이름이 없으니까요. 그 때 그 때 마음 가는 대로 삽니다.”
이베카는 ‘이브 진’으로 대답하며 싱긋 웃었다. 그 집단에서 나와 봐야 보이는 것이 있었다. 이브 진으로 반쪽짜리 인생을 살다 보니 안리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녀도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3왕자가 왕이 되는 시대. 에셀번 백작가에는 아직 후계자가 없고, 정략혼으로 보낼 수 있는 다섯 명의 딸들은 모두 장기말 그 자체였다.
귀족가에 태어나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었던 나날들에 대한, 1,000년을 이어 왔듯이 향후 1,000년도 에셀번의 가문이 번영해야 한다는 핏줄의 의무. 에윌은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진 않아도 에셀번의 이름을 가진 그녀에게 정략혼을 바랐을 텐데, 그녀는 아예 도망쳐 버렸다.
“그럼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니엘의 긴 속눈썹을 한 번, 안리크의 무표정을 한 번 바라본 이베카는 예를 갖추어 물러났다.
* * *
그 날 저녁, 이베카는 레이나, 시드와 함께 왕립 마법 대학 앞에 있는 가장 큰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원래 이베카가 돌아오고 나서 바로 거나한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지만 셋 다 워낙에 바빠 미루고 미루다 보니 한 달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어때, 이브? 전하는 친절하셔?”
레이나는 혀가 꼬부라져서 키득거리며 물었다. 이베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늘 똑같으세요.”
“재미없네. 가까이서 보니 엄청 잘생겼다거나, 아니면 생각보다 별로라든가, 뭐 그런 재미있는 정보 없어?”
시드가 한숨을 쉬며 레이나를 노려보았다.
“제발, 레이나. 뒷말은 좀 자제해. 누가 듣고 있을 줄 알고.”
“수사국 직원들이 듣고 있겠지.”
“시끄러.”
이베카는 피식 웃으며 술을 마셨다. 시드를 볼 때마다, 남동생 같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와 무뚝뚝한 성격이 재미있었다.
“이브, 잘 좀 해 봐. 혹시 알아? 세상 재미없고 무뚝뚝한 카이든 빈자리를 네가 채우고 최측근이 될지. 좀 말랑말랑하고, 재밌는 얘기 좀 속삭여 드려. 애인에게 하는 것처럼, 사랑과 관심을 듬뿍 담아서.”
“그러게요, 그런 거라면 제가 전문인데. 오늘 보고서에는…… 차기 왕비에 대한 판돈까지 적혀 있었어요. 참, 전하도 피곤하시겠어요.”
“어머, 차기 왕비? 네가 좀 연애 상담이랍시고 옆에서 속살거려서 배당 높은 영애로 어떻게 해 봐. 물론 그 전에 그 상대가 누군지 우리한테 얘기는 해 줘야 돼. 전 재산 걸어야지.”
시드는 시종일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이베카는 레이나와 잔을 부딪치며 킬킬 웃었다. 레이나와 함께 가벼운 연애에 대한 농담을 하는 것은 이베카의 오랜 취미생활 중 하나였다. 레이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브, 지방 순회 때 재미있는 일 좀 얘기해 봐.”
“별거 없어요. 그냥 귀엽게 생긴 애 하나 있기에 철없는 귀족 영애 연기 좀 하면서 만나 준 것뿐이에요. 자주 보다 보니까 질려서 순회 도는 김에 영원히 작별한 거지.”
“뭐가 질려? 귀여웠다며.”
“오래 보면 별로더라고요. 제가 귀엽고 어린 남자 취향이 아닌가 봐요.”
두 여자가 수다를 떨 때면 항상 침묵하며 자리를 지킬 뿐인 시드가 말없이 자신의 앞에 있는 잔을 비웠다. 이베카가 술에 취한 나른한 얼굴로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살짝 풀린 혀로 유세부리듯이 말하는 품이 귀여웠다.
“진짜 전하께 연애 상담이라도 해 드려야 되나.”
이베카가 손가락 하나를 들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정은 관성, 순정은 자기기만, 욕정은 환상인 법이라고.”
그녀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나가 깔깔거리며 박수를 쳤다. 시드가 못마땅한 한숨을 쉬어 보였지만 이베카는 멈추지 않았다.
“닥치고 아무나 만나다 보면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고요.”
“닥치고 아무나 만나는 거, 좋지!”
“아, 취소. 아무나는 아니고, 좀 잘생긴 사람이 좋겠어요. 이왕 한순간 반짝일 감정이라면.”
레이나는 킬킬거리며 역시 이베카가 돌아오니 좋다고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넌 대체 왜 그렇게 됐냐.”
기본적으로 연속적인 사랑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베카를 보며 시드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베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잘생긴 건 좋으니까, 이왕이면.”
“넌 참…….”
“말했잖아요. 애정은 관성, 순정은 자기 기만, 욕정은 환상. 사랑 같은 건 할 가치가 없어요. 임무나 좀 뛰고 동료들이랑 술 한잔 하면 그만이지.”
이베카는 목소리를 죽이며 씩 웃었다.
“아버지가 없는 반년을 못 견디고, 젊고 잘생긴 마구간지기랑 뒹굴었던 우리 어머니의 피가 역시 제게는 진하게 흐르나 봐요.”
한 때는 그녀를 진하게 괴롭혔던 트라우마가 이제는 농담거리가 될 정도로 이베카는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극복한 상태였다.
그녀는 감정도 성격도 사람의 성향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한 동료 몇 명이면 자존감은 금세 올라가는 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백작가를 나와 ‘이브 진’으로 사는 것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자축하곤 했다.
“이브 말이 맞아. 전하께서는 아무나 고르셔도 돼.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데다 왕위 쟁탈전 시기에 다니엘 전하께 반해서 아버지를 졸라 댄 귀족 영애들이 한둘인가. 다정하고, 부드럽고, 상냥하고, 동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왕자님.”
레이나가 과장된 몸짓을 해 보였고, 시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왕위에 오르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어. 그딴 것들에 신경 쓰시기에 지나치게 바쁘시다. 그리고 왕비 자리는 너희가 장난으로 논할 자리가 아니야.”
“줘도 안 할 왕비 자리에 대해서 떠드는 게 뭐 어때서요?”
이베카는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레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주면 해야지?”
“자유라고는 없고, 하루 종일 바쁜 왕만 기다려야 하고, 행정국이나 약제국이라면 몰라도 왕비가 되면 수사국 임무는 거의 못 맡을 텐데 미쳤어요? 차라리…….”
그녀는 씩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진짜로, 이참에 카이든 루스의 자리를 노려 볼까요? 전하의 최측근이 되면 승진도 빠르겠죠? 선배님들보다 먼저 과장 한 번 달아볼까요?”
당연히 명백한 농담이었다. 이베카는 카이든이 돌아오는 3개월 뒤에도 이 지루한 일을 계속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니엘 역시 이베카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그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직원처럼 여기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다들 말 좀 조심해. 레이나, 너는 애를 다 버려 놨어. 수사국의 푼수는 너 하나면 충분해.”
시드가 한숨을 쉬며 말했지만 레이나와 이베카는 언제나 그랬듯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지난 3년 반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들의 뒷자리에 후드를 둘러쓴 채 두꺼운 안경까지 걸친 청년이 그들의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베카가 시드의 충고를 뼈아프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다음 날 저녁이었다.
* * *
원래는 이틀마다 한 번씩 오전 중에 보고를 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긴급 사안이 터져서 다음 날 이베카는 자정 가까운 시간에 급히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제국의 황제가 반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외국의 일이지만 제국은 아메탄 왕국이 충성을 다하고 있는 국가였고 심지어 산사태가 일어난 곳은 아메탄 국경과도 가까웠다.
외교국의 종합 보고서는 나중에 공식 발표까지 정리하여 도착할 테니, 긴급한 대로 수사국의 보고서라도 신속히 전달해야 했다. 이베카가 급하게 입궁했을 때에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고, 그녀는 알현실이 아니라 다니엘의 침실로 직접 가야 했다.
“잠시 기다리시죠. 전하께서는 옷차림을 추스르고 계십니다.”
거의 뛰다시피 하여 다니엘의 침실 앞에 당도했을 때 그녀를 가로막은 것은 안리크였다. 다니엘 역시 급박한 기별을 받고 이제 잠에서 깬 듯했다.
“갑자기 터진 사안에 바쁠 텐데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들여보내세요.”
문 안에서 들리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어쩐지 단정하지 못했다.
“들어가시지요.”
안리크가 문을 열었고, 이베카는 조심스럽게 왕의 침실로 들어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우나 생각보다는 작았다. 다니엘은 다소 흐트러진 얼굴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처음 보는 왕의 침실에 눈을 깜빡였다. 동향인데 창가에 가림막이 없고, 자정인데 이렇게 막 잠에서 깬 모습이라면 정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나가도 됩니다, 안리크.”
“……하지만.”
“수사국 제복을 입고 있는 직원입니다. 믿어도 되겠지요.”
이베카는 멍청히 보고서를 든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항상 알현실에서 보았던 단정한 모습과 대비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실크로 된 실내복은 수수했고, 그나마도 벌어져 미끈하게 뻗은 쇄골과 단단한 근육이 그 사이로 살짝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