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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28화 (28/79)

28화.

자신은 안리크를 왜 좋아했을까. 답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고 시간을 같이 보낸 유일한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백작가의 생활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마음을 준 건 당연한 일이다.

같은 이유로 그녀는 다니엘에게도 너무 쉽게 마음을 열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따뜻했고, 손을 잡아 주었고, 가족이라고 말해 주었고, 마중을 나와 주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잘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고, 하나하나 만들어 갈 때마다 응원해 주고 지지해 주었다.

왕이 아니어도 되고, 그렇게 잘생기지 않아도 되고, 잠자리에서 그토록 쾌감으로 몰아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방치된 채로 막 성년이 된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 주기만 했다면 그녀는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넘어간 마음. 어느새 모른 척하는 것도 아픈 습관이 되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모르는 척하고 외면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눈치가 빠르지 않고 경계심이라도 없었다면 다니엘이 주는 호의에 담뿍 행복하기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용히 의심을 마음속에 담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당장 다니엘을 붙잡아 이것저것 캐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베카는 둘 다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속으로만 곪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안 자요?”

다정한 목소리가 귀에 흩뿌려졌다. 이베카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썹을 만지고, 곧게 뻗은 콧날을 쓸고, 예쁜 입술 안에 살짝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눈이 놀란 듯 웃었다. 그녀의 손가락을 그의 혀가 부드럽게 핥았다.

이브 진이 누구예요?

목 끝에 차오르는 슬픈 질문을 감추기 위해 그의 가슴에 그녀는 급히 입을 맞추었다.

어차피 지금 아이는 생기지 않는데, 왜 저를 안았던 건가요?

하지 못하는 질문은 차곡차곡 서럽게 쌓였다.

쉽게 제 마음을 가지고, 의지하게 하려고요? 그래서 정말, 장기말 중 하나로 쉽게 쓰려고?

미묘하고 복잡한 건 싫은데. 대놓고 묻지 못하는 건 싫은데.

어머니, 저는 마구간지기의 딸이 맞나요?

평생을 하지 못할 질문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서 마음에 칼날로 박혔다. 그녀는 고인 눈물을 들키기 싫어 자꾸만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배에 입 맞추고, 그의 허리에 입 맞추고, 그의 다리 사이에 입 맞추고.

좋았던 정사의 끝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등 뒤에 전해지는 체온이 허탈했다.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지 못하는 질문은 스스로를 우울에 잠식시킨다. 그녀는 열여덟 해를 그렇게 살았다.

다 그녀가 그를 너무 과하게 마음에 담은 탓이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대했는데, 안리크와 함께 있는 것도 그냥 넘어가 주었는데, 그녀는 그에게 남은 여자의 흔적 하나로도 하루 종일 우울해질 만큼 욕심이 생긴 것뿐이다. 그는 그녀에게 애정을 주고, 그녀는 그에게 ‘일’을 해 주면 되는데.

그 생각만으로 이베카는 밤을 완전히 지새웠다. 그를 생각하면 캄캄한 밤이 꼬박 지나갈 때까지 얼마든지 웃음과 울음을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눅눅한 괴로움을 꾹꾹 눌러 담아, 자신을 해칠 것을 알면서도 머금을 수밖에 없는 마음.

막연히 상대의 마음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과 그 여자의 정체를 실제로 아는 것은 타격의 차이가 너무 컸다.

하필 이름도 이브라니. 안리크가 붙여 준 애칭과 같았지만, 그녀와 모든 것이 완전히 달랐다. 수사국이 인정하는 당당한 에이스와 부적응으로 기억마저 지운 채 쫓겨난 자신 사이에는 너무 큰 격차가 있었다. 질투심보다 더한 좌절감이 그녀를 어둡게 물들였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정말로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안리크는 열흘에 하루씩 나오는 휴가를 받아 아침 일찍 궁을 나서고 있었다. 요즈음 그는 그의 주군인 다니엘을 바라보는 마음이 괴로웠다.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다 생각했으나 지금처럼 그 마음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호한 대상이 이베카라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난 안리크 네가 좋아.’

그도 이베카도 동갑내기였고 생일 역시 비슷했기 때문에 거의 동시에 성년을 맞이했다. 이베카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는 왕궁의 호위무사로 들어가기로 한 바로 전날 밤, 그녀는 우물거리며 그에게 벼락 같은 고백을 했다.

‘너도…… 너도 날 좋아하잖아. 아니야?’

그 말은 영원히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안리크는 백작가에서 사물처럼 존재하는 이베카에게 언제나 연민을 느꼈다. 애초에 ‘렌카’의 성을 가진 이방인이었던 그가 가지는 이질감과는 결이 다른 소외감이었다.

백작 부인은 이베카와 마주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했고, 자매들은 함께 공부하면서도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에셀번 백작가의 셋째 영애’에 대한 말이 나오지 않도록 그녀에게도 자매들과 똑같은 교육 기회와 훌륭한 식사, 넓은 방이 주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베카는 눈치껏 식당에서도 가장 구석에 앉았고 식사는 중간 즈음의 속도로 끝마쳤다. 손님이 오는 것 같으면 조용히 하녀에게 아프다는 말을 속삭인 뒤 도서관에 처박혔다. 안리크는 이베카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으나 가족이 되어 줄 수는 없었다. 언젠가 떠날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년이 되면 당연히 백작가를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너는 에셀번 백작가의 귀족 영애고, 집안에서 맺어 준 혼처와 결혼해야 해.’

그가 그녀를 거절한 이유는, 그래도 그녀가 ‘에셀번’이라는 이름을 지키길 바랐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는 왕족의 무기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은퇴할 때까지 결혼을 할 수 없고 가족을 만들 수 없다. 열흘에 한 번씩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제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호위무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그는 당장 앞길이 막막했다. 어느 상단의 호위단 정도로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생계에 권위를 포기한 수많은 몰락 귀족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대귀족의 딸인 이베카가 자신을 선택한다면 에셀번 백작가에 큰 피해가 되었다. 에셀번 백작가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어린 양자가 장성하여 가문을 물려받을 때까지 든든하게 받쳐 줄 기반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섯 자매는 당연히 에윌의 뜻에 따라 정략혼을 해야 했다. 집안의 수치와도 같은 이베카를 겉으로는 백작가의 평범한 영애처럼 동등하게 대우한 이유이기도 했다.

‘제발 나를 은혜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지 마.’

안 그래도 뒷소문이 무성한 이베카가 함께 거둔 고아 청년과 눈이 맞았다는 소문이 돌면 에셀번에 큰 불명예가 된다. 그는 그럴 정도로 배은망덕하지 못했고, 이베카가 가진 것 없는 자신에게 와서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적어도 에셀번 백작이 연결해 줄 사람은 자신보다는 사정이 나을 것이 뻔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받은 것이 분명한 이베카의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그녀가 내민 손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단번에 수사국에 들어가 버릴 줄은 몰랐다. 그리고 4년간 그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춰 버릴 줄도 예상조차 못했다. 4년 뒤 정신을 잃은 채 수사국 직원에 의해 백작가에 배달된 그녀는 열여덟과 똑같은 표정으로 갑자기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왕은 어린애 같은 그녀를, 누구에게나 거절당했던 그녀를 어르고 달래며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 그는 서슬 퍼런 얼굴로 회의 때마다 쏟아지는 이베카에 대한 비난을 눌렀다. 이베카를 회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그녀를 배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겁먹어서 모든 것을 그만두는 상황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일까.

“안리크?”

그가 생각에 잠겨 궁 안을 걷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늘 회의장에서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에윌 에셀번 백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하의 곁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니 휴일인가 보구나.”

“예. 막 출궁하려던 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각에 궁은 어찌…….”

에윌은 평소에 소 닭 보듯이 하던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낮게 말했다.

“급하지 않으면 나와 어디 함께 가지 않겠나.”

“예?”

“왕비님께 가는 길이다.”

안리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다니엘은 묘하게 이베카와 안리크가 마주할 수 있는 시야를 막곤 했다.

처음 이베카가 궁에 들어왔을 때에는 절대로 이베카의 궁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으며, 궁 안에서의 이동도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듯했다. 마중을 나가거나 할 때에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절대로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게 했고. 이베카가 습격 받은 날 그토록 빠르게 그녀의 궁을 떠났던 것도 안리크와 그녀가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이 싫어서인 것 같았다.

단 둘이 있었던 것이 들킨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내 말은 듣지 않아도, 같이 지냈던 네 말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

“무슨 말 말씀이십니까?”

“너도 늘 그 회의장에 있지 않느냐. 왕위 쟁탈전 때 온갖 귀족가의 딸들이 그 조각 같은 얼굴과 다정함에 홀려서 제 아비를 들들 볶곤 했는데…… 이베카가 가장 심각하게 빠져 버릴 줄이야.”

“…….”

“왕비님이 에셀번의 이름을 가진 이상 나는 무조건 말려야 한다. 네가 이베카를 조금이라도 친구로 생각했다면 너 역시 말려야 하는 게 맞다는 건 회의장 분위기를 봤으니 알겠지.”

안리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자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에윌과 함께 간다면 다니엘도 그를 탓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그는 휴가였고, 당연히 행선지는 그의 자유였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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