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다…… 좋아요. 굳이 잠자리 말고도 말이에요.”
“다른 건 뭐가 있어요?”
다니엘이 그녀의 귓가에 입 맞추며 말했다.
“참고할게요.”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마중 나와 주시는 거, 좋아요.”
이베카는 그의 품속에서 꼬물거리며 말했다.
“번거롭게 멀리까지 나와 주시지만, 너무 좋아서 안 오셔도 된다는 말을 못하겠어요.”
“내가 좋아서 나가는 건데, 뭐.”
“하지만 바쁘실 텐데요.”
“오는 길에 다치지 말라고, 헤매거나 낯설어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의 눈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득해 보였다. 이베카는 그 아득함을 모르는 척했다. 그녀가 알 수 있는 따뜻함만 해도 충분했다.
“혹시나 다른 곳에 가지 말라고요.”
“하지만 먼 길을 혼자 오셔야 하잖아요.”
“같이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어서 괜찮아요.”
잘 할게요, 이베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말에 정신없이 들뜨는 마음을 억지로 꼭꼭 눌러 내렸다. 안리크 말대로, 달콤한 말로 그녀를 이용한다고 해도 좋았다. 그녀에게 비밀이 많은 사람이어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도 좋았다. 왕이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든 잘 해낼 것이다. 이상한 불안함과 서글픔을 꾹 눌러 참고, 그녀는 눈을 꼭 감았다.
* * *
다음 날, 왕비궁에 뚱한 표정의 키가 작은 행정국 직원이 불려 왔다. 리한 키드민의 담당자였으며 그와 동행하여 제국까지 다녀왔고, 몇 달 전에 아메탄 왕국으로 무사 귀환한 유진 유니트였다.
유진은 수사국에 하도 많이 불려 다닌 터라 리한 카드민 일로 왕비가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하자 다소 지긋지긋한 마음으로 왔다. 그러나 생각보다 왕비인 이베카의 태도가 거만하지 않아 놀랐다.
“음, 그러니까…… 신변 보호 명령을 받은 거죠?”
“예. 왕명이었습니다.”
유진은 자신을 몰아붙였던 수사국 직원들보다도 더 패기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유진이 알고 있는 왕비에 대한 정보는 귀족 영애라는 것, 법무국에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 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 외의 가십거리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소 주눅 든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작은 여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녀가 겪어 본 귀족들은 거의 다 거만하고 도도하기만 했는데.
“수사국에서는 직권으로 암살을 결정했다고 들었는데.”
“암살 시도 현장에 같이 있었습니다. 파견된 수사국 직원하고 같은 방도 썼고요.”
왕비궁에 서 있는 두 명의 수사국 직원을 흘끗 본 유진은 한숨을 한번 쉬고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마법을 쓸 수 없었고, 리한이 빠르게 눈치채서 실패했습니다.”
“신변 보호 명령이 있었으니 난감했겠네요.”
“뭐, 난감할 것까지는 없었습니다. 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걸요. 제가 수사국 직원하고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음…….”
“그래도 한 사람을 두고 다른 명령을 따르고 있는 두 사람이 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 흩어져서 귀국했습니다.”
“흩어져서? 그럼 그 수사국 직원도 돌아온 건가요?”
“저보다 먼저 돌아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일행들이 모두 제국 땅을 건너오며 죽었다고 들었어요. 내란 중이었으니 모두 다 살아오기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아. 혹시 그 직원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세요?”
유진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수사국 직원들을 흘끗 바라보며 반문했다.
“수사국에서 잘 알지 않을까요? 저는 정말 피상적인 것밖에 모릅니다.”
수사국 직원들의 굳은 표정을 확인한 유진은 한숨을 한번 쉬었다. 그녀는 수사국 직원들에게 별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예전부터 행정국과 수사국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으며, 제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상당히 많이 시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파란 머리의 수사국 직원은 직접 리한의 실력을 파악한다며 불시에 공격한 적도 있었다.
수사국에서 왕비에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챈 유진이 줄줄 말을 시작했다.
“그나마도 변장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수사국에서는 외형을 바꿀 수 있다는 말도 도니까요. 어쨌든 제가 드레스를 빌려 입을 수 있었을 정도로 키가 작은 편이었습니다. 금발에…… 눈은 보랏빛이었고요.”
레이나와 시드의 표정이 점차 더 굳는 것을 흘끔 확인한 유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더 자세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야무지고 똑 부러지는 전형적인 수사국 직원이었어요. 책임감도 강하고 잠입 연기도 잘하고요. 수사국에서 암살 전문으로 단독 파견할 정도였으니 실력이 정말 좋았을 겁니다.”
유진의 무심한 설명에 이베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더 설명해 줄까? 그럼 확실해지겠어? 매일같이 궁에 부르던 여자라 난 잘 알고 있거든. 너만 한 작은 키에, 너처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
문득 안리크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심지어는 네 자매들처럼 옅은 금발을 가진 여자였어.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이베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 직원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요? 외국에 갔다고 수사국 직원들이 그러던데.”
“제가 돌아온 이후 본 적은 없습니다. 뭐, 외국에 갔을 수도 있겠네요. 수사국 직원들은 워낙에 여기저기에 두문불출하고 그러니까요.”
유진은 아무 생각 없이 냉큼 대답했고, 이베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전하께서는 사라진 그 여자를 찾고 계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베카는 고민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은 알고 있어요?”
“이브 진이요.”
E. J.?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생일 축하해요, 다니엘, 오늘 행복하기를,]
어지러울 정도로 동글동글한 낯선 글씨체가 시야에 맴돌았다.
“나중에 들었는데, 루카스 진 수사국장님의 먼 친척이었다고 해요. 그리고 왕궁음악단…….”
“유진 유니트.”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시드였다. 시드는 단순히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뿐이지만, 유진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비님. 수사국에서는 제게 더 이상 발언을 허가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때다 싶어 냉큼 이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례하다며 수사국 직원에게 짜증을 낼 줄 알았던 이베카에게서 아무런 말도 없어서, 유진은 다소 실망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이베카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유진.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법이 우리 위에 서게 되면, 더 이상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한 사람을 둔 처분 결정이 다르게 나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아.”
유진은 동그란 눈을 한번 굴리더니,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왕비님. 좋은 법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무뚝뚝한 유진의 표정에 명백한 호의가 담겨 있었기 때문에 이베카는 살짝 놀랐다.
“……산하기관 내에서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 들리실 거라는 걸 알지만…… 저는 리한 카드민을 믿습니다. 수사국에서는 제 말을 믿어 주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언젠가 아메탄 왕국에 돌아올 겁니다.”
이베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본디 공화주의자였고, 아메탄 왕국에 거대한 혼란을 끼친 이단 황자의 입국을 도왔으며 제국의 반란군에 냉큼 합류해 버린 그 남자를 믿는다고?
“그때가 오면 누군가의 감정적인 결정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도가 그를 보호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이라…… 저는 논란의 대상에 있는 1조의 내용이 정말 좋았어요. 아메탄 왕국에서 그를 믿는 사람은 저 혼자지만, 혼자라도 기댈 곳이 생긴 기분이라.”
“…….”
“소중한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 왕비님을 지지할 거예요. 수사국 직원들이야 아니겠지만.”
유진은 쌓인 것이 많다는 표정으로 흘깃 수사국 직원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요. 내가 뭐라고 너무 큰일을 저지르나 싶었는데.”
“왕비님이시니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유진은 담담히 말했다. 이베카는 처음 본 산하기관 직원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대체 내가 왜? 유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가진 것이 많으시잖아요.”
이베카는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가진 것. 그녀는 귀족의 이름을 가졌고, 왕비의 지위를 가졌고, 산하기관 직원이라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중 단 하나라도 온전한 것이 있던가? 혈연이 없고, 사랑이 없고, 경력이 없다.
이상하게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그 수사국 직원이 부러웠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금발,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능력, 그에 따른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다니엘의 마음에 깊게 새겨진 흔적. 눈가가 시큰거렸다.
유진을 보내고, 이베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레이나와 시드가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당차고, 영리하고, 뭐든지 잘하는 여자.
그날 밤, 이베카는 다니엘과 함께 침대에 누워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달콤한 정사 이후 그림처럼 잠들어 있었다.
왕비로 지목을 받기 전, 법무국의 사람들은 다니엘이 왕으로 결정되었던 ‘최종 재판’ 때의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늘 그림자처럼 존재했던 법무국이 수면에 나선, 아주 얼마 안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다니엘은 약제국의 리젠 하카트를 왕비 자리에 올리고 싶어 했다고 들었다. 그 끔찍한 사건의 진실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밝혀 낸 약제국의 수석.
그리고 이브 진이라는 여자. 제국에 파견될 정도로 수사국장의 신임이 두터웠던 수사국의 직원이자, 안리크마저도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라 평가한 사람. 이베카는 그 두 여자와 자신의 괴리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