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무사히 늙어서 같이 라인볼 쳐야 되거든. 법이 우리를 약하게 해도, 결국엔 보호해 주겠지.”
카이든의 눈길이 다니엘이 서명하고 있는 펜에 머물렀다. ‘E. J. 로부터’……. 그의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슨 마음으로 이베카와의 백년해로를 말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그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침묵의 지대를 지켰다.
아직 법은 유효하지 않다. 그러므로 카이든에게는 수사국 강령과 조직의 판단이 모든 가치의 우선이었다.
* * *
다소 늦은 밤, 다니엘이 왕비궁을 찾았을 때 이베카는 책상 위에서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그가 들어오자 그녀를 지키고 있던 수사국 직원 둘이 재빠르게 빠져 나갔다. 키가 큰 갈색 머리 여자와 다소 소년같이 생긴 푸른 머리의 남자였다. 다니엘은 그들을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은 채로 이베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베카? 침대에서 자요. 이대로 자면 허리 아플 텐데.”
다니엘의 말에 이베카는 눈을 번쩍 뜨고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더니 황급히 머리를 넘기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니엘은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녀가 허둥지둥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오셨어요? 저 안 졸려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다니엘이 싱긋 웃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난 졸린데. 법전 그만 보면 안 될까?”
“아, 네!”
이베카가 급히 법전을 덮었다. 왠지 그의 웃고 있는 푸른 눈이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레이나와 시드가 이제 그만 자라고 해도 그녀는 무거운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잠들어 있으면 다니엘은 그녀를 깨우지 않고 그대로 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혹시 부담될까 그녀는 기다렸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평일에는 그가 꼬박꼬박 마중 나와 주니까 매일같이 보는데, 주말에는 궁에 앉아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만일 레이나와 시드가 없었다면 그 기다림은 더 지루하고 잔혹했을 것이다. 다니엘은 끔찍하게 바빴기 때문이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비밀 통로를 통해 오라고 했지만, 그녀는 어차피 그가 그의 침실에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인을 만난 강아지처럼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이베카의 이마에 그가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이베카는 문득 그에게 안기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신 칭찬해 달라는 의미로 조심스럽게 말을 시작했다.
“1조의 내용 말인데요, 그 필요성에 대한 보고서라도 만들어 보려고요. 알아봐야 할 적절한 사례도 찾은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거라면 다 해요, 이베카.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걸 믿으니까. 하지만…….”
그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습격에, 독살에, 무섭지 않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녀는 혹시라도 다니엘이 ‘위험하니 하지 마라’라는 말을 할까 봐 겁이 나서 재빠르게 소리쳤다. 정말 한심한 말이지만, 그녀의 효용이 떨어지면 그가 그녀를 지금처럼 매일같이 찾지 않을까 봐 겁났다.
어느 순간 너무나 쉽게, 산산조각 난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사람. 그로 인해 삶은 더 불편해지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녀의 기다림은 언제나 보답 받았고, 그는 다시 되짚어 보고 싶은 순간을 자꾸만 만들어 주었다.
법무국 바로 앞까지 마중 나올 때 마주치는 눈 사이로 번지는 웃음, 부드럽게 서로를 얽어매는 손가락, 그녀의 이런저런 생각을 차분하게 들어주고 응원해 주는 목소리.
마음에 걸리는 것들을 묻어 둘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순간들이 많았다. 어차피 그런 건 그녀 혼자만 입 다물고 눈 감으면 되는 것들이었다. 다니엘도 그녀가 한밤 중 안리크와 있었던 일을 묻어 주지 않았는가. 그들 사이에 필요한 것이 세상 다정한 부부라는 포장이라면 이베카는 그 포장에 기꺼이 응해 줄 수 있었다.
그것만 해도, 이 남자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충분히 좋았다.
부드럽게 입술 사이를 가르며 들어오는 따뜻한 혀도, 아무리 조심스럽게 시작하더라도 결국에는 온 입 안을 감아오는 입맞춤도 좋았다. 점점 깊숙하게 혀를 잡아끄는 움직임에 숨결이 달뜰 때면 어느새 그녀의 몸은 그에게 가둬져 있곤 했다.
정사 때만 보이는 그의 흐트러진 표정을 볼 때마다, 그녀가 살짝 찡그리기라도 하면 괴로운 표정으로 어르듯이 한숨을 토해내며 그녀의 몸을 더 꽉 끌어안는 손길을 느낄 때마다 이베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응, 아…….”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유두가 어루만져지며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흩뿌려졌다. 그녀의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은 연신 붉은 자국을 만들었다. 아찔한 통각과 함께 적나라하게 그의 욕망이 새겨졌다.
“아무도 모르겠지.”
유륜을 부드럽게 애무하다가도 장난스럽게 유두를 꽉 눌러 짓이기도 하는 손길에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그녀가 꼼짝 못하도록 온몸을 사용해 가두는 것을 좋아했다.
“곱상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사실 하루 종일 왕비랑 이런 짓 하는 상상 중인데.”
“아으…… 흐읏, 음, 하아…… 그건, 그래요.”
이베카는 다리를 오므려 꼬려고 했으나 그에게 저지당하고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는 침실 밖에서 보면 이런 모습을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단정했다. 잠자리에서의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고, 이베카는 그 괴리감에 아직도 적응이 어려웠다.
“……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알아요.”
그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그녀의 손을 함께 이끌었다. 부끄러워 미칠 것 같은 이베카의 손가락을 쥐고,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음핵을 살살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민망하여 몸부림을 쳐도 놓아주지 않았다.
“난 숨기는 것에 익숙하거든.”
“하읏…… 하지, 마…… 부끄러워요, 아!”
다정하고 능숙한 손길에 자신의 손가락이 동원되자 이베카는 헐떡이며 신음을 삼켰다. 그의 푸른 눈이 그녀의 음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끌거리는 애액이 그들의 얽힌 손가락을 흠뻑 적셔서 그녀는 눈을 꽉 감았다. 온몸이 발개질 정도로 민망하면서도 그래서 더 자극적인 쾌락이었다.
“짐승 새끼 같지?”
그가 자신의 단단하고 뜨거워진 페니스를 일부러 그녀에게 꾹 누르며 속삭였다. 온몸을 감싸는 쾌감에 그녀가 다리를 버둥거릴 때마다 그의 손짓은 더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릴 때까지 그는 거세게 음핵을 누르고 진동시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속살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응? 미친 놈 같잖아…….”
귓가에 작게 내려앉는 그 낮은 목소리마저도 달콤한 것 같다고 하면 아마 그는 그녀를 더 미친 사람 취급할지도 몰랐다.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젓자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드디어 그녀의 손을 놓아준 그가 부드럽게 질 입구를 쓰다듬으며 음산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같이 있어도 박고 싶어서 정신을 못 차리는데.”
곱상한 왕의 입에서 나올 법하지 않는 말에 이베카가 숨을 들이켤 무렵, 그대로 그의 페니스가 그녀의 안으로 진입했다. 이제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녀의 안을 헤집는 그의 커다란 존재감은 언제나 버거웠다.
“아…… 좋아.”
만족감이 어린 한숨을 내쉬며, 그가 그녀의 내벽을 가득 채운 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로 재차 질문이 쏟아졌다.
“좋아요, 이베카?”
“아응, 하…… 아, 아앗…….”
그의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어떻게 저렇게 큰 것이 내 몸에 들어오지, 라며 현실감이 없었던 그의 페니스는 느릿하게 밀려들어 오다가 빠르게 빠져나가곤 했다. 커다란 이물감에 헐떡이면서도 깊은 성감대를 그대로 자극하는 움직임에 그녀는 언제나 입술을 꽉 깨물곤 했다.
“아, 아…… 하아!”
“……얼른.”
그녀의 벌어진 입 속으로 그의 혀가 다시 진입해 이곳저곳을 비집기 시작했다. 꽉 끌어안은 몸에서 뜨거운 체온이 얽혔다. 그가 허리를 그녀에게 내려찍으며 집요하게 한 곳을 꾹 밀고 들어올 때마다 그녀는 마치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조, 좋아요…… 아, 너무, 너무 좋아…….”
그녀가 그의 숨결 속에서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너무 예뻐, 이베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발간 뺨에 상을 주듯 닿았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아래의 움직임은 아마 그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 몸부림을 치고, 시트를 꼭 잡은 채 교성을 지르고, 그러다가 그의 어깨에 손톱자국을 내도 그는 그녀를 언제나 한계까지 몰아갔다.
“아, 아읏! 아, 아…….”
결국 몇 번이나 강렬한 쾌감이 그녀의 몸을 덮치고, 아찔한 절정에 올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릴 때까지 그의 허릿짓은 계속되었다. 여린 속살을 가르는 그의 움직임은 지칠 줄 몰랐다. 그녀가 헐떡이며 절정의 여운에서 정신을 못 차릴 때 즈음, 강렬하게 그녀를 몰아붙이던 그에게서도 신음이 배어 나왔다.
그녀를 꽉 끌어안은 그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사정했다. 허벅지 사이로 비릿하면서도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진이 다 빠져서 언제나처럼 그에게 늘어져 안겼다.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였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간신히 눈을 뜬 그녀는 아직도 화끈거리는 아래를 의식하며 민망함에 한숨을 쉬었다. 그는 그녀가 의식을 차린 것을 눈치채고 평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웃어 보였다.
“좋았어요?”
“……왜 그런 거 물어보시는 거예요?”
“내 옆에서 계속, 행복했으면 좋겠어서 하는 말이에요. 눈치 보는 거죠.”
정사가 끝난 뒤의 그는 잠자리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또 다르게 정갈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제공하는 것들’만 보면 모두 다 완벽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