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평민 대표라니, 나라가 엄청 시끄러워지겠네요.”
레이나는 법무국에서 나오는 그녀에게 먼저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이베카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역시…… 반발이 엄청나겠죠?”
그녀가 금세 풀이 죽자, 레이나는 깜짝 놀라서 양손을 저었다.
“아니, 뭐, 그런 말이 아니고…… 아녜요, 왕비님. 오히려 내란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는 있을 거예요. 나랏일에 핏대 세우며 불평불만 가득한 사람들의 소통 창구를 만들어 주는 일이잖아요. 엄청 시끄럽겠지만, 전 내란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전쟁은 끔찍하잖아요.”
“조용히 해, 레이나.”
시드는 조용히 경고했다. 레이나가 시드에게 눈을 흘겼다.
“시드, 왕비님께서는 말동무가 필요하실 수도 있다고.”
“우리 임무는 왕비님의 보호지, 말동무가 아냐. 감정적으로 굴지 마라.”
이베카는 시드의 낮은 말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일이 커지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니엘이 그녀를 믿겠다고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믿고 맡긴 일이라면 최대한 잘 해내고 싶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기 위해선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언제나 웃어 줄 단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법은 그녀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역사에 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베카는 왠지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죽고,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도 아메탄 왕국의 첫 대헌법을 만든 사람은 이베카 데 에셀번이다. 에셀번은 언제나 그녀를 부끄러워했으나, 그녀는 에셀번에 부끄럽고 싶지 않았다. 작은 자존심이었다.
탄생은 환영 받지 못했을지라도, 죽어서는 여러 사람에게 기억될 것이다.
“어? 전하께서 오세요. 정말로 마중 나오실 작정이신가 봐요. 바쁘실 텐데 궁 밖까지.”
이베카는 눈을 들어 이어진 길을 보았다. 빛나는 금발의 젊은 국왕이 한 무리의 호위단을 이끌고 그녀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환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하, 이 먼 길을 어찌…….”
마중을 나오더라도, 이렇게 멀리 나올 줄은 몰랐다. 법무국 건물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눈을 보고 다니엘이 싱긋 웃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빨리 보려고 일찍 나왔어요. 기다리기 힘들어서.”
“그래도, 홀로 걸으셔야 할 길이 꽤 길었을 텐데…….”
“그런 건 상관없고.”
이베카는 문득, 오늘 있었던 일들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시드가 막았기 때문에 레이나와는 나눌 수 없었던 수많은 말들.
그녀는 남편의 눈을 바라보고 조심스럽게 웃었다. 어젯밤의 끔찍한 기억을 묻어두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처럼 다니엘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한 남편의 탈을 쓰고 마중을 나와주었다면, 그녀 역시 최선을 다해 여느 다정한 아내들이 하는 것처럼 장단을 맞추고 싶었다.
“오, 오늘요……. 법무국에서요…….”
이런 사소한 말들이 지루하진 않을까?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잡담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대학에서도 대다수가 평민인 학생들이다 보니 한참 어린 대귀족인 그녀에게 먼저 다가오지 못했다. 이베카 역시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갈 정도로 자존감이 충분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말에 흥미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가 평민 대표 이야기를 꺼냈는데, 오렘 법무국장님이 어떤 말을 하셨냐면…….”
다니엘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했던 대화는 어느새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녀가 신이 나서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이상하게 함께 걷는 길이 하나도 멀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잘 들어 주고, 함께 이야기를 해 주고, 더 자세한 상황을 묻자 이베카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잘 했어요, 이베카. 분명히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베카의 결정을 현명하다고 평가할 거예요. 역시 잘 할 줄 알았어.”
그는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 오렘 법무국장이 그런 면도 있었어요? 재미있네.”
문득, 이베카는 그와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살던 시간이 그에게 전달되며 누군가와 함께하는 기억으로 다시 쌓이고 있었다. 재잘대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이 웃어 주는 다니엘이 좋아 그녀는 마음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맞아. 이젠 법무국 TO를 늘리긴 해야 해. 내년부터 대학 정원부터 조정해야겠어요.”
어차피 업무에 관한 모든 일은 그녀가 직접 전하지 않더라도 더 깔끔하게 정돈된 보고서 형태로 그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러니 효용 없는 대화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괴한들이 그녀를 덮쳤던 악몽 같은 순간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예쁜 마법구들이 둘러싼 왕궁이 눈앞에 보이고, 한적한 오솔길에는 신록의 푸르른 나뭇잎들이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저 멀리 아메니티의 번화가에서는 활기찬 소리가 들려오고, 그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은 깊고 맑았다.
누군가가 제 이야기를 목적 없이 들어 준다는 것은 따뜻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내일도…… 마중 나오실 거예요?”
“그럼요. 혹시 귀찮아요?”
“아뇨!”
이베카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좋아서요.”
“그럼 이베카가 은퇴할 때까지 매일 나올게요.”
다니엘은 가볍게 대답했다. 어느덧 그녀는 그의 뒤에 있는 안리크를 잊어버렸지만, 안리크는 그들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
안리크는 이베카가 이렇게 맹목적인 표정을 짓는 모습을 처음 보아서 혼자 놀랐다. 다정하고 선량한 얼굴로 회의 때마다 교묘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그의 주군은 이베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너무나 빠르게 파악했다. 무조건적인 애정과 신뢰, 다정한 대화와 경청,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상냥한 말들까지.
하지만 그 대가가 목숨에 대한 위협이라면 너무 불공정한 거래 아닌가. 안리크는 그의 주군을 믿지 않았다. 그가 호감을 보였던 여자, ‘이브 진’은 당당하고 영리했으며 자존감이 높았다. 그에 비해 정신 연령은 열여덟이고, 애정결핍이 눈에 보이며 정서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이베카를 그가 진심으로 사랑할 리 없었다.
관찰력이 좋은 이베카도 이미 이 다정한 일상이 어느 정도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물어 따지다가 지금의 온기를 잃을까봐 모른 척하는 마음이 뻔했다.
결혼한 지 이제 한 달이다. 낮은 자존감의 이베카는 달콤한 말을 쏟아내는 다니엘에게 폭 빠질 수 있는 시간일지 몰라도, 다니엘은 여러모로 부족한 아내에게 한 달 만에 정을 붙일 타입이 아니었다. 자신과 새벽녘에 만난 것을 봤으면서도 그대로 묻어 버린 사람이다. 그가 만일 아내를 진정 마음에 두었다면 그렇게 냉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베카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얼굴로 다니엘에게 안겨 있었으나, 안리크는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함이 부디 서운함이 아니기를 바랐다. 이러나저러나 그가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상대가 아니었다.
* * *
두 번째는 독살 시도였다. 다행히 지난 습격 이후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에 대한 검열이 삼엄해져서 주방에서 왕비궁에 오기 전에 발각되었고, 주방의 시녀 몇 명이 배후를 말할 새도 없이 그대로 자살했다.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세요.”
일주일 안에 그녀를 죽이려는 시도가 벌써 두 번째였다. 배후는 알 수 없었다. 두 사건이 같은 사람의 사주라는 것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모든 기득권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레이나와 시드가 법무국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는 아예 그녀의 곁에 붙어서 호위하기로 결정되었다.
“자취를 감추고 숨어 있으면 더 불편해 하실 거잖아요.”
레이나가 그녀의 궁에서 싱긋 웃었다. 호위무사들도 따로 붙었으나, 배후를 추적하기에는 수사국 직원이 최대한 그녀와 붙어 있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게 수사국의 의견이었다. 그 말에 딱히 반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둘 다 편히 있으세요. 앉아도 되는데.”
“그건 안 됩니다.”
시드가 무뚝뚝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베카는 풀이 죽어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법전에 코를 박고 열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법무국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어도 대헌법을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고작 10개 조항으로 시작했지만, 이제 2년간 더 다듬고 다듬어 수많은 조항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녀는 다니엘이 지시한 이 일이 좋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지켜야 하므로, 수많은 사유가 필요하고 또 단어 하나하나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 과정 하나하나가 뿌듯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차별, 미묘하게 꽂히는 시선, 객관적이지 않은 잣대, 서술할 수 없어서 위로받지 못하는 감정…… 그런 것들이 법에는 없었다. 법 앞에서 그녀는 그녀의 자매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그 잣대가 그녀는 어떤 방면에서 인간의 삶을 지지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니엘은 이해관계가 이념에 우선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다. 뭐, 그런 것들은 다니엘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정치에서 독립시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법이 아니고, 소외당하고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만들어진 정의로우면서도 따뜻한 법. 단어 하나하나에 사례 하나하나를 곱씹고 있는 그녀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저기…… 진짜 앉아도 돼요.”
한참을 법전만 들여다보던 그녀가 시드와 레이나를 흘끗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이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베카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사실…… 누가 미쳤다고 왕비궁에 들이닥쳐서 절 죽이겠어요? 호위무사들도 많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