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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23화 (23/79)

23화.

“아, 잘 부탁해요.”

레이나는 싱긋 웃으며 이베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왕비님, 시드가 몇 살처럼 보이세요?”

“음…… 스물셋?”

이베카는 정상적인 학제를 마쳤을 때 신입의 나이를 냉큼 댔지만, 레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계산하지 마시고, 정말로 보이는 것 그대로요!”

“여, 열여섯?”

이베카의 대답에 레이나는 발작하듯 웃어 댔다. 그런 레이나를 옆에 두고 시드는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나가 수사국 직원치고 상당히 발랄하다면 시드는 누구나 상상하는 딱딱한 수사국 직원 그 자체였다.

“스물아홉이랍니다! 동안이 스트레스인 남자예요.”

“……아. 좋은, 좋은 거 아닐까요?”

“아니에요. 너무 어려 보인다며 좋아했던 여자한테 차인걸요.”

“레이나, 입 닥쳐.”

“왕비님, 제게 더 떠들라고 명령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쿡쿡거리며 숨죽여 웃고 말았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인데도 레이나는 그녀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그래서인지 동성 친구나 자매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해 본 적 없는 그녀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법무국으로 출근을 하는 길에, 레이나는 그들의 호위에 대하여 설명했다.

“하나는 법무국 밖에, 하나는 법무국 안에 있을 거예요.”

“안에요? 그럼 법무국 사람들이 몹시 불편해할 텐데…….”

“몰래요. 수사국 사람들은 남들 모르게 완벽히 기척을 숨길 수 있어요. 당연히 하루 종일은 힘들지만, 일과 시간의 절반씩 번갈아 가며 법무국 안에 있는 건 가능해요.”

“……그거, 상당히 문제가 되는 지점 아닐까요? 남몰래 사찰이 가능하다면…….”

“이브나 왕비님이 수사국에 남긴 비기 중 하나예요. 이런 비기들이 없다면 수사국이 어떻게 아메니티의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겠어요?”

“…….”

“왕비님도 직원이실 때 다 했던 일이랍니다.”

그 말에 낮게 주의를 준 것은 시드였다.

“레이나, 말이 많아.”

“그래도 법무국 안에 우리가 있다는 건 알려드려야 하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을 때 갑자기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놀라실 테니까. 사실 수사국의 비기는 정말로 극비 사항이긴 한데, 상황이 너무 특수하니 어쩔 수 없겠죠?”

레이나는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이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그녀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모든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수사국에서 자신과 그녀가 친한 동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편하게 말을 걸어 주는 레이나를 보며 그녀는 이상한 기대가 들었다. 레이나의 말처럼, 수사국에서의 그녀는 정말 현명하고 유능하여 동료들에게 사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왜 자신이 기억도 버린 채 다시 과거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짐작처럼 엉망진창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4년 동안 백작가에도 가지 않고 안리크도 찾지 않았다는데, 동료들 사이에 섞여 외롭지 않았을 수도 있지. 여러 가지 비밀 임무를 받아 기척을 숨겼을 때도 있었겠지.

왠지 레이나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수사국에서 근무할 때에는 열여덟처럼 주눅이 들어 있거나 외로움에 몸부림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시드를 흘끗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시드도 제가 수사국 직원이었을 때를 아세요?”

“모릅니다.”

대답은 민망할 정도로 칼 같았다. 그리고 더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미 사라진 시간이고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금해하지 마세요. 레이나 너도 쓸데없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라.”

그의 말은 엄격할 지경이어서, 법무국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 * *

법무국에는 습격을 받은 지 사흘 만에 출근했다. 법무국의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거의 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뿐이라 그녀를 정신없게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퇴근길에 수사국 직원과 걸어 가다가 그녀를 보았던 법무국 직원들이 마치 무용담을 얘기하듯 자꾸만 같은 얘기를 반복하기에 조금 피곤했을 뿐이었다.

“갑자기 퇴근 시간 가까이에 수사국 직원들이 몇 명 와서 대헌법 10조항에 대해 따지고 들 줄은 몰랐다니까?”

“수사국 직원들 거만해서 다 우리보고 오라 가라 하지, 절대 직접 안 오는데 마음이 급하긴 급했나 봅니다. 하긴, 직권을 없앤다는 거니 화는 나겠지요.”

“게다가 법무국 독립이라니! 원래 산하기관에서 가장 권력이 센 곳이 수사국이었는데, 꼼짝 없이 법을 지켜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게 받아들이기 힘들긴 할 겁니다.”

이베카는 어디에선가 기척을 숨기고 있을 시드가 이 모든 말을 듣는다면 상당히 기분 나빠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그 덕분에 퇴근이 늦어지고, 수사국 직원들이 그 습격을 보았기에 다행이지요.”

“매너도 없지, 자기들 퇴근 늦다고 우리 퇴근 시간을 배려도 안 하고 그 시간에 와?”

“원래 수사국 직원들은 다 제가 제일 잘난 줄 알죠.”

법무국 사람들은 신나서 이야기를 계속했고, 이베카는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화제는 금방 전환되었다.

“그런데, 범인은 누구예요? 밝혀졌나요, 왕비님?”

“아뇨, 수사국에서도 놓쳤다고 들었어요.”

이베카는 싱긋 웃었다. 하지만 또 한 번 법무국 사람들은 수사국도 예전 같지 않다느니, 마력이 줄어드니 가장 박탈감이 심할 것 같다느니 한바탕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배후를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아서 하나를 꼽기에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베카 역시 이틀 동안 혼자 배후를 열심히 생각했다.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로즈리 쪽 사람들이었다. 자신에게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가장 첫 번째 사람이니까. 현재 왕위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딸 지젤뿐이니 왕권이 약화되는 것이 싫을 수도 있었다.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 뻔한 보수파 귀족들도 당연히 후보에 올랐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 짐작하는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사람은 아버지 에윌 에셀번이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발표된 10개의 조항에는 당연히 ‘에셀번’이라는 성이 들어갔을 테니까, 다른 귀족들의 저항에 누구보다도 민망하고 또 타격도 컸을 것이다. 에셀번 백작이 회의 때 다니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생각을 짐작케 했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지요. 그것보다, 의논드리고 싶은 사안이 있어요.”

이베카는 펜을 돌리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니엘이 준 펜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본디 왼손잡이였지만, 가뜩이나 다른 자매들과 외형이 다른데 홀로 왼손잡이인 것을 들키기 싫어서, 그녀는 절대 왼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밥을 먹지 않았다.

레이나가 왼손에 펜을 들려 준 것을 보면 수사국에서는 정말로 자유롭게 살았다는 뜻인데…… 아직은 차마 왼손에 펜을 들 자신이 없었다. 왼손으로 글씨를 쓴 적도 아주 어릴 때 몇 번 빼고는 없었고.

그녀는 씁쓸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평민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어요. 산하기관이 평민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아마…… 평민들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이베카는 마른 침을 삼켰다. 로즈리에게 연무장에서 당했던 수모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따뜻한 말들은, 새로움을 말할 때 힘이 되어 준다.

‘이베카, 모든 발걸음에 당당해지세요. 언제나 내가 그대의 편이라는 걸 잊지 말고.’

누군가는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필요한 순간이 있는 법이다. 이베카는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내뱉었다.

“서글프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다가…… 억울함에 분노할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

“평민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닐 테니까.”

이베카는 자신이 어떤 선을 뛰어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귀족답지 않았을까? 역시 마구간지기의 핏줄을 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확실히 불행한 성장 시절을 겪은 게 분명하다고 속으로 동정하고 있을까?

그 많은 질문이 그녀를 주눅 들게 해도, 말을 계속해서 이을 수 있었다.

“귀족도 귀족 나름의 고충이 많아요. 갖고 있는 게 많아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무거워서 힘들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는걸요. 저는 귀족이 그르고 평민이 옳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음…… 그저…….”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법무국 사람들은 모두 평민들이다. 귀족이 평민들 앞에서 힘들고 슬픈 감정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권위를 상하게 한다면 하는 일이었다. 모두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정적을 깬 것은 법무국장 오렘이었다.

“평민 대표가 대헌법에 관여한다면 훨씬 더 시끄러워지겠지만, 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자문 정도만을 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신분제 폐지라든가, 영지의 배분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나오면 피곤해지거든요.”

“……그렇게 급진적인 말도 나올까요?”

“왕비님.”

오렘은 흰 수염을 쓸며 허허 웃었다.

“다 제가 옛날에 했던 생각들입니다. 갖지 못한 사람들은 본디 세상에 불만이 많은 법입니다. 그리고 그 불만을 들어줄 가진 자들은 거의 없죠.”

“그럼, 지금은…….”

“지금은 가진 것이 많아졌죠. 법무국장까지 올랐으니 기득권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브나 왕비님이 허락하신 이 작은 권리로도 제 입을 다물게 하기는 충분합니다.”

이베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현금을 뿌리고 있다는 다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이해관계는 이념에 우선한다고.

그녀는 혼자 생각했다. 자신은 평민들보다 훨씬 더 부유하게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박탈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해관계보다 중요했다.

‘이베카 데 에셀번’의 이름을 단 법이 세상에 나오면…… 불만인 사람들은 많겠지만, 적어도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박탈감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자존감을 낮게 하며 스스로를 미워하게 하고, 그래서 나약하게 만든다. 그녀는 다니엘 앞에서 나약한 자신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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