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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22화 (22/79)

22화.

안리크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한 뒤, 들어왔던 창문으로 훌쩍 뛰어 내렸다. 단 둘이 남자, 다니엘은 천천히 일어서 창문을 닫았다.

이베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 둘이 되었고, 그가 그녀의 앞에 섰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요.”

어조가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평소와도 같은 상냥한 말에 이베카는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가 평소처럼 너무나도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이틀 후면 출근할 수 있다는 올리타의 보고서를 받았는데, 더 쉬고 싶으면 더 쉬는 게 어때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과 다정한 미소……. 이베카는 춥지도 않은데 오한이 들어서 잠옷 자락을 꽉 쥐었다. 차마 그가 어딘가 미친 사람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에 힘을 간신히 주며 그녀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할 일이 많아서…… 이틀 후에 출근하겠습니다.”

“사실은 출근시키고 싶지 않아요. 왕비가 위험에 처하는 건 끔찍하니까. 그만두고 싶다면 말해요. 나도 어느 정도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요.”

혹시나 그만두라고 할까 봐 이베카는 허겁지겁 말했다. 안리크가 저더러 ‘전하의 개’처럼 행동한다는 게 이런 뜻인가 싶었으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다니엘은 살짝 웃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수사국 직원들의 보고서도 받았습니다. 배후는 놓쳤으나 포기할 것 같지 않다고. 왕비에게 붙인 호위무사들이 부상을 당했고, 다른 호위무사를 붙여도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수사국 직원들이 법무국에서도 붙을 겁니다.”

“……예.”

“여러 사안이 복잡해서, 수사국 직원들이 붙는 것은 원치 않았는데. 지금은 수사국도 믿기 어렵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몹시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미 예전에 리한 카드민으로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이 갈린 적이 있는지라.”

“…….”

“어쨌든 배정된 수사국 직원들도 둘뿐이라, 법무국에서 궁으로 오는 길에는 제가 매일 마중을 나갈까 합니다.”

“네?”

“……내가 수사국을 믿지 못해서, 경고 차원이기도 해요.”

이베카는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온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안리크를 대할 때의 그 섬뜩함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 친절한 어조. 이베카는 안심이 된다기보다는 그가 뿜어내는 위화감에 대답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저, 전하께서, 지, 직접요?”

“네. 안리크 렌카만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부드러운 질문 하나로 이베카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베카가 눈을 내리깔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고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입술을 훑던 그의 혀가 뱀처럼 그녀의 혀를 휘감고, 결국에는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것같이 정신없는 입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귓불을, 턱선을, 날개뼈를 쓸고 그럴 때마다 키스는 농염해졌다. 그녀가 숨을 쉬고 헐떡일 때 그가 살짝 입술을 떼고 속삭였다.

“……나는 잘 참아요.”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겨우 마주한 그의 눈이 선득하게 빛났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두려운데 무엇이 두려운지 정확히 파고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사랑해요.”

그녀의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한쪽 팔로 지탱하며 그가 속삭였다.

“좀 더 이베카가 준비되었을 때 말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분위기가 자꾸만 너무 극단적으로 바뀌어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사랑한다는 말이 달콤하다기보다는 믿기지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무섭다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가 대답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혀를 밀어 넣었다. 마치 벌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농염한 정사를 치르는 것 같기도 한 길고 긴 입맞춤이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그는 중간중간 속삭였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대가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는 입맞춤만으로도 지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잔뜩 혼미하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그는 단정하게 싱긋 웃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잘까요?”

그가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 주며 곁에 누웠다. 이마에, 볼에, 코끝에 짧게 입을 맞춘 그는 그녀를 평소처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이베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혹시 피임약을 복용했던 걸 알고 계시냐는 질문을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작년 9월에 피임약을 먹었다는 것은 일전에 다른 남자와 관계가 있었다는 뜻이다. 게다가 오늘 안리크와 한밤중에 같이 있는 것을 들켰다.

이 모든 상황을 없는 것처럼 여기는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고, 어떻게 된 일이냐 묻는다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엄두가 안 날 만큼 분위기가 기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베카는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아까, 다시는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부드러운 말을 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왈칵 밀려들었을 때 느꼈던 좌절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할지라도 그녀는 다니엘이 주는 온기가 절박했다.

한참 동안 그에게 안겨 있었으나, 그 역시 잠이 든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숨이 막힐 것같이 두려웠다.

“저, 전하. 정말로, 정말로 궁에 들어온 뒤 처음이었고…… 다시는 안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오해할 상황이 분명하지만 정말 아무 일 없었어요.”

“알아요.”

대답은 짧았다. 이베카는 더 이상 그가 이 화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를 끌어안은 그 체온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사라진 그 여자를 찾고 계셔. 그 여자가 돌아와도 전하께서 네게 그런 달콤한 말들을 해 줄 것 같아?’

어느 날 이 일이 커다란 약점이 되어 버림받더라도, 오늘은 그저 그에게 안겨 있고 싶었다.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그녀에게 되풀이한 ‘사랑한다’는 말은 그녀의 가슴을 크게 울렸다. 사랑, 사랑이라니. 너무 빠르게 홀렸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잘 자요.”

목소리가 달콤했다. 위기가 닥쳐와야만 인정할 수 있는 감정이 있는 것이다. 이베카는 안리크가 그녀에게 이혼하라고 종용했을 때부터 그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느 깊은 바다에 빠지기까지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그저 재빨리 빠져나오기 위해서 바다에 뛰어들지 않는다. 이미 바다에 홀렸다면, 몸에 달라붙는 물결을 느끼고, 파도에 휩쓸리며 팔다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물을 갈라야 했다. 그러다 언젠가 숨이 막혀 죽는다고 해도, 지금은 그녀를 둘러싼 유일한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사랑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녀가 그를 사랑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그가 사랑을 말할 때 자신의 감정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베카.”

다니엘은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네.”

“눈치챘을지 몰라도, 나는 별로 선량한 사람이 아니에요. 비밀과 침묵, 어쩌면 계략과 거짓말에도 능한 이기적인 사람이지. 사실 당신에게도 숨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긴 어려워요.”

“괘, 괜찮아요.”

이베카는 속삭이듯 재빨리 말했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니, 이해합니다.”

“뭐, 어쨌든 이해한다고 했어요. 잊지 않을게요. 나중에 너무 많이 화내지 말아요.”

나중에? 일단 지금은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이베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하나 알려 줄까요?”

낮은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자조가 섞인 목소리는 이상하게 선득했다.

“나는 내 조카를 죽였어요.”

이베카는 흠칫 놀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조카? 지젤은 잘 살아 있으니, 아마도 수사국 직원이 몰래 말해 준 아셰 왕녀의 복중 태아일 것이다. 그녀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아주 다른 생각을 하며 잠들었고, 바로 다음 회의에서는 웃으며 평소처럼 모두를 대했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다니엘이 꼭 끌어안았다.

“이베카,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에게 내가 차가울 일은 없어요. 그러기엔 당신을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거든. 그러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요. 하지만 안리크 렌카는 다르지.”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한없이 다정한 어조가 분명히 경고를 품고 있었다.

“오랜 친구가 다치는 걸 보기 싫다면 알아서 끊어내요. 그대를 존중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대는 나의 것이고 나도 내가 이렇게 소유욕이 강할 줄 몰랐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이베카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서 세상 사이좋은 부부처럼 끌어안고 누워 그들은 눈을 감은 채로 꼬박 밤을 샜다.

4. 돌아가는 발걸음

“또 보네요, 왕비님. 잘 부탁드립니다.”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훌쩍 큰 키로 반갑게 다가오는 수사국 직원을 발견한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레이나의 짧은 갈색 머리에 꽂은 커다란 리본이 놀라울 정도로 검은 제복과 어울리지 않았다.

“레이나, 내게 배정되었다던 수사국 직원이 당신이에요?”

“사실 한 명 더 있어요. 시드!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와.”

“시끄러워.”

어느새 레이나의 옆으로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다가와서 각을 맞추어 섰다. 이베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제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비님을 뵙습니다. 시드 세타트입니다. 당분간 왕비님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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