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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21화 (21/79)

21화.

“모르겠어? 넌 지금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아무리 따뜻하고 다정하게 웃어 주신다고 해도 믿으면 안 돼. 넌…… 넌 전하가 얼마나 빠르게 기술국의 설립을 결정했는지 몰라. 이익 앞에 단호하신 분이야.”

문득, 이베카는 모든 이해관계가 이념에 우선한다던 다니엘의 단호한 말을 기억해 냈다. 그녀가 떠올리는 이상이 그에게는 단지 안정을 위한 수단일 뿐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 역시, 다니엘에게는 유용성을 지닌 하나의 도구일 것이다. 이미 알면서도 상기할 때마다 쓰라린 그 사실을 애써 무시한 채 이베카는 고개를 저었다.

의심이 된다고 할지라도 안리크에게 말할 건 아니었다.

“좋은 분이셔. 아까도 내 곁을 계속 지키셨잖아. 나를 아끼신다고.”

“너를 아낀다면…….”

그가 이를 갈았다.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됐어. 무수한 적의 표적이 되는 그런 일에 네 이름을 올리면 안 됐다고. 난 회의장에 있었어. 전하는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 네가 가진 것들을 모두 인용했어. 귀족 출신이다, 왕비다, 산하기관 직원이다! 그리고 결과를 봐. 하루도 안 되어 넌 죽을 뻔했어. 이제 시작인 걸 몰라?”

“…….”

“손을 떼, 이브. 그냥 이혼하겠다고 해. 지금이라도 도망쳐.”

“싫어.”

“이브!”

“난 수사국에서 이미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어.”

“넌 더 이상 수사국 직원이 아니잖아.”

“그래도 과거의 내가 결정한 거야. 혼란스러운 일이 생기면, 내 판단에 따를 거야.”

그녀가 고집스럽게 그를 노려보았다.

“잘했다고 하셨어. 10개의 조항에 제각각 신중하고 깊은 생각이 들어가 있다고. 나와 법무국 직원들의 노력을 알아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분이야.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 이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에 들어간 어떤 간절함을 확인한 안리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늘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하셨어. 우리는 동료라고, 같은 편이라고.”

“제발, 이브.”

안리크가 이마를 짚었다.

“전하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이브, 왕위 쟁탈전 때 전하는 온갖 귀족 영애들을 돌아가며 만나는 건 물론 왕비 자리를 암시하며 희망 고문을 잔뜩 시켰지만 결국 그중 마음에 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여자에게 다정한 말을 하는 건 그 분께 너무 쉬워.”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게다가 말했잖아. 찾고 계시는 여자는 따로 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훨씬 더 많이.”

“…….”

E. J.? 이베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더 설명해 줄까? 그럼 확실해지겠어? 매일같이 궁에 부르던 여자라 난 잘 알고 있거든. 너 만한 작은 키에, 너처럼 보랏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 네 눈을 바라보며 그 여자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베카는 더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는 사라진 그 여자를 찾고 계셔. 그 여자가 돌아와도 전하께서 네게 그런 달콤한 말들을 해 줄 것 같아?”

흔들리는 그녀의 눈빛을 본 안리크가 말을 이었다.

“심지어는 네 자매들처럼 옅은 금발을 가진 여자였어.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그만. 그만해.”

이어지는 안리크의 말이 듣기 싫어서, 이베카는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들은 말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안리크는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에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베카는 어지간하면 절대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하와 난 처음부터 사랑 같은 건 배제한 관계였어. 네가 관여할 바가 아냐.”

안리크가 그녀의 손을 잡고 내렸다.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로 그는 낮게 말했다.

“너, 마음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너처럼 관찰력이 좋고 추론력이 뛰어난 애가 전혀 못 알아차렸을 리 없어. 전하께 아무런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아? 진심으로?”

그녀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그녀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후계를 말하며 지금까지 매일 밤 그녀를 안았다. 그가 준 은밀하고 엄청난 쾌락이 그에게 마음을 주게 된 계기에 조금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말마따나, 이 세상에서 둘만이 한 행위기 때문에 묘한 끈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자신이 안리크와 어떤 사이인지 뻔히 알면서도 한 번도 묻지 않았고, 여전히 E. J.에게 받은 펜을 썼다. 복잡하고, 어렵고,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안리크가 격양된 어조로 재차 말했다.

“전하께서 하는 모든 달콤한 말의 결과는 변하지 않아. 넌 네 스스로 전하의 곁에 머물면서 네 이름으로 온갖 위험을 직면하고 있어. 왜 그걸 몰라?”

“당당해도 괜찮다고 하셨단 말이야. 쓸모 같은 거 증명하지 않아도 가족이 되어준다고 했어.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했고, 끝까지 믿어주신다고 했어. 넌 전하가 내게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몰라.”

“그런 말들로 넌, 결국 훈련받은 개처럼 그 말에 따르고 있잖아. 네가 백작가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도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어. 네가 약해지는 말들을 다 알고 계시다고.”

“약해지는 말? 그건 누구나 다 알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답답하다는 표정을 보며,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어. 너조차도 말이야.”

“이브, 나는…….”

“널…… 널 좋아했어.”

이베카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안리크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하지만 네가 내 손을 놓은 순간, 나 역시 널 잊은 게 틀림없어. 내게 좋은 남자는 아니라는 걸 난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러니 4년간 너를 찾지 않았겠지.”

“이브.”

“이제야 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 안리크. 너는 내 유일한 친구였고, 그래서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내가 떠나 버린 사람이야.”

“…….”

“하지만, 전하는 달라. 나는 전하를 떠날 수 없어. 그 달콤하고 예쁜 말들에 홀려서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그 순간, 이베카가 말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본 안리크는 멍하니 잡고 있던 이베카의 손목을 놓았다. 침대 쪽의 벽면에 걸려 있던 그림이 옆으로 밀리고, 거짓말같이 굳은 표정의 왕이 그들을 서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전하…… 어, 어째서…….”

다니엘은 그녀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가만히 그들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이베카가 더듬거리며 말도 마무리 짓지 못하자, 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잘 자고 있나 궁금해서. 아프지는 않을까, 무섭지는 않을까, 혹시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면 말상대라도 되어 줘야겠다…… 뭐 이런 마음으로.”

그의 말은 아주 느릿하고 태연했다. 정적 속에서 천천히 이어지는 말들이 오히려 그녀를 극한으로 몰아가며 단단히 옥죄는 느낌이었다.

“그대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우리가 함께 지내지 않은 첫 번째 밤이니까. 나는 왕비가 그립더라고.”

그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이베카는 더 몸을 떨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아, 변명할 말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새벽 두 시, 왕에게는 혼자 있고 싶다고 해 놓고선 첫사랑인 남자를 왕비궁에 몰래 불러들였다. 한쪽 손목은 그에게 잡힌 채로……. 이대로 죽임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안리크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 역시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전하, 이브, 아니 이베카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목숨으로 사죄…….”

“이브? 이베카?”

그가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베카는 그의 평온한 미소가 두려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뭐가 두려운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지된 사고 속에서 늘 곁에 있겠다는 다정한 말이 아득하게 맴돌았다.

“왕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나 하나뿐이다.”

인형처럼 인위적인 미소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음절 하나하나에 분노가 감겨 있었다.

“이제 아비조차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네가 뭐라고 입에 담지?”

이베카는 그가 아랫사람에게 반말을 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토록 섬뜩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던 손짓, 다정한 미소, 따뜻한 말들은 이제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언제 흩어질지 모르는 허상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그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았다.

안리크에게 다니엘을 떠날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어쨌든 그는 그녀에게 유일한 따뜻함이 되었다. 비록 그게 그가 모두 의도한 것이라고 해도, 그녀가 그를 떠나지 못한 채 그의 장기말로 쓰이도록 하는 게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베카는 문득 그를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잘하겠다고, 더 잘하겠다고. 어디까지 쓰임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의심이란 애초에 감정적으로 아래에 있는 사람이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라서야 이베카는 자신이 위화감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치였음을 알았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나가. 내가 이 일을 문제 삼지 않는 건…….”

다니엘은 얼굴에 웃음을 천천히 거두며 낮게 말했다.

“왕비에게 약점이 되는 사안을 수사국에게 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네게 조금의 징계만 내려도 수사국은 꼬리를 밟을 테니까.”

“전하, 부디 제 말을…….”

“나가.”

차마 엎드려 빌지도 못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고,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마라. 왕명이다. 누군가가 혹시 오늘 밤에 대해 묻거든 내가 왕비궁에 대동했다고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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