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상처가 얕은데요.”
이베카가 살짝 허리를 틀어 보이며 중얼거리자 다니엘이 표정을 굳혔다. 생각지도 못한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어떻게 저 상처가 얕다는 겁니까.”
이베카는 그가 뿜어내는 분노에 살짝 놀랐다. 잠시 눈을 굴리던 그녀는 다정하게 그의 손을 쓸었다.
“전하,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나요?”
“세 시간입니다.”
“세 시간…… 저녁은 드셨나요?”
“…….”
“저녁 드시고 오세요, 전하. 저는 어차피 의료국에서 처방해 주는 대로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 겸상을 하지 못할 듯합니다.”
“아뇨, 오늘은 여기 있겠습니다.”
“저 호위무사들을 다 데리고요?”
“물러나라고 할까요? 혹시나 눈을 떴을 때 불안해 할까 봐…….”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대답했지만, 이베카는 간절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쏟아냈다.
“궁이니까 안전하잖아요. 전하, 전하께서 끼니를 거르시면 제가 불편해서 편히 쉬지 못해요. 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오늘은 이만 저를 혼자 두시면 안 될까요?”
“…….”
“부탁이에요.”
일어나자마자 부디 혼자 있게 해 달라는 이베카의 말에 다니엘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의 뺨을 감싸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볼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상한 부끄러움에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뛸 때 즈음 그가 그녀를 놔주고 낮게 말했다.
“부탁이라고 하니.”
그는 다시 한 번 짧게 그녀에게 입 맞추고 일어나 뒤를 돌았다. 이상한 싸늘함을 마음에 둘 여유조차 없었다. 이베카는 그와 그가 대동한 호위무사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의 시녀들에게 식단을 말해 주고 있던 의료국 직원의 팔목을 잡았다.
“저기…….”
“올리타 게이트입니다. 올리타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 올리타, 있잖아…….”
그녀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난 것을 눈치챈 올리타는 빠르게 시녀들을 뒤로 물리고, 정자세로 그녀를 향해 앉았다. 다니엘을 재빨리 내보낸 이유가 있었다. 이베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호, 혹시…… 아직 달거리 날짜가 남아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임신 중이거나 하면 아이에게 안 좋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건 알 수가 없나?”
그녀는 자신이 반말을 쓰는지 존대를 쓰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간절하게 속삭였다. 임신인지 아닌지도 아직 모르지만, 아이에게 안 좋을 수 있다면 다니엘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후계의 의무를 말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실패’했을 때에 그가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네?”
하지만 이베카의 말에 딱딱하다 싶을 정도로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던 올리타의 표정에 당혹감이 어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올리타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왕비님, 피임약 복용 중이시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이베카가 아연실색할 차례였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올리타를 바라보았다. 올리타는 가방에서 의료일지를 꺼내 다시 한 번 읽었다.
“작년 9월에 피임약을 복용하신 상태입니다. 복용하신 피임약은 제기스트라로, 부작용이 없고 달거리 날짜를 잘 맞춰 주는 대신 가장 가격이 비싸며 기한은 1년입니다. 당연히 올해 9월까지는 임신이 되지 않을 겁니다.”
“……그거 언제 기록이야?”
“국혼 직전의 검사 결과입니다. 묻지 않으셨고 특이한 질병이 없었기에 왕비님께 따로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작년 9월이라면, 자신이 수사국에 있었을 때였다. 당연히 기억에 없었다. 이베카는 자신의 달거리 주기가 일정함을 알고 있었다. 단순히 달거리 주기를 맞추기 위해 피임약을 복용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새로 알게 된 사실에 잠시 말문이 막혀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전하께서는 모르시고 계신데, 왜 검사 결과를 보고하지 않았어?”
“…….”
올리타는 신중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어?”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전하께는 검사 결과를 즉시 보고했습니다.”
이베카는 할 말을 잃었다. 8개월 전 자신이 피임약을 복용했다는 것도 놀라운데, 다니엘 역시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그는 왜 첫날밤부터 후계를 이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녀는 충격에 휩싸여 잠시 숨을 골랐다.
“왕비님께서 알고 계시다시피 큰 상처는 아닙니다. 시약을 꼬박꼬박 드시고 식사를 거르지 않으시면 이틀 후에는 출근하셔도 될 겁니다. 의료국에서 병가 처리를 법무국에 공문으로 보내겠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당분간 과도한 움직임은 지양하는 편이 좋고, 저는 하루에 한 번씩 일주일간은 진료를 위해 오겠습니다.”
올리타는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에 떠났으나, 이베카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차피 지금 아무리 잠자리를 같이 해 봤자 아이는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니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모순의 연결고리가 아무리 고민해도 생각나지 않았다.
에윌은 말했다. 다니엘에게 충성을 바치는 건 괜찮지만, 그 상냥한 언행을 믿지 말라고. 이미 납득할 수 없는 틈이 생긴 이상 믿고 싶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베카는 다니엘이 앉아 있던 의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테이블 위의 꽃병 위치가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어…….”
눈썰미가 좋은 그녀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꽃병이 180도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백작가에서 많이 하던 놀이 중 하나였다. 이베카의 관찰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는 안리크가 종종 그녀의 방 사물을 조금씩 바꾸고 그 밑에 쪽지를 넣어 두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녀들이 모두 그녀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떠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꽃병을 들었다. 거짓말처럼 두 번 접은 흰 쪽지가 나타났다. 침대에 다시 앉은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폈다.
[오늘 새벽 2시, 동쪽 벽의 두 번째 창문을 열어 - A. R.]
시녀들이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이베카는 재빨리 온갖 마력을 끌어내어 쪽지를 불태웠다. 형편없이 줄어든 마력 때문에 고작 이 정도의 마법에도 머리가 띵했다. 마력이 이토록 사라지고 있으니, 이브나의 고대 마법도 언젠가는 풀리겠구나…….
그 순간 이베카는 지금껏 생각하지 못한 어떤 가능성을 갑자기 떠올렸다. 그녀의 기억은 이브나의 고대 마법 때문에 지워졌다. 고대 마법이 완전히 풀릴 것이라고 한 정보국의 예측대로라면 앞으로 30년. 약 30년 후면 그녀의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피임약을 먹었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베카는 이유도 모르면서, 문득 두렵다고 생각했다.
* * *
이베카는 숨을 죽이고 일어났다. 새벽 2시였다. 두통을 핑계로 물린 시녀들이 완전히 자리를 비운 걸 확인한 그녀는 재빨리 동쪽 벽의 두 번째 창문을 열었다. 그러는 중에도 허리에 통증이 느껴져 아랫입술을 물어야 했다.
창문을 열자마자 나뭇가지에 올라타 있던 안리크가 훌쩍 뛰어 단숨에 그녀의 궁 안에 들어왔다.
“……미쳤어?”
창문은 열어 주었지만, 이베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속삭였다. 이 상황이 남들에게 당당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왕비가 밤중에 궁에서 첫사랑을 몰래 만나는 상황이었다. 안리크는 숨을 고르고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이브, 이혼해.”
“무슨 소리야?”
“이혼하라고. 나는 전하가 널 이 정도로 이용할 줄 몰랐어.”
안리크의 목소리는 낮고 다급했다. 이베카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새벽 2시였지만,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부정한 짓을 저지르는 것처럼,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 아무래도 목숨이 위험해. 경고하려고 했지만, 벌써 놈들이 움직일 줄이야…….”
“놈들이…… 누군데?”
“귀족가의 놈들. 너를 없애면 이 모든 일들이 엎어지거나 어려워질 걸 알고 있다고. 세상에, 이브, 법으로 귀족을 강제한다고? 평민도 귀족도 같은 법을 지키라고? 그딴 위험한 생각을 대체 왜 한 거야?”
“아직 귀족가라는 증거는 없잖아. 그리고 법 말인데…… 전하의 제안이었고, 난 정말로 합리적인 제도라고 생각해.”
“너, 그 조항 초안에 네 이름을 박은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린 줄 알아?”
이베카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리의 적의만 봐도 나머지 귀족들이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지 뻔했다. 안리크가 그답지 않게 말을 쏟아내었다.
“전하를 건드릴 수는 없지. 반역이고, 궁을 벗어나지 않으시고, 호위도 잔뜩 붙어 계시니까. 하지만 넌 쉽다고. 넌, 넌…….”
“알아.”
“…….”
“에셀번에서, 날 보호해 주지 않을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전하께서 보호해 주실 거야.”
“웃기지 마. 내가 말했잖아. 전하를 믿으면 안 돼. 널 정말로 보호하고 싶으셨다면…….”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법에 네 이름을 붙이는 것도 말도 안 될 뿐더러…….”
“하지만 내가 만들었는걸. 그럼 대체 누구 이름을 붙여? 내가 한 일인데 왜 기록에 남기면 안 돼? 오히려 내 이름이 없었다면 더 화가 났을 거야.”
“나를 네게 붙이는 것이 정상이야.”
“…….”
“호위무사들 중 나보다 실력이 좋은 사람은 없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켄타나 에스더가 아니라 내가 있었다면 넌 조금도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 그런데 전하는 날 네게 줄 생각이 조금도 없으셔.”
이베카는 가만히 안리크를 바라보았다. 열 살 때부터 같이 자랐고, 삭막하고 외로웠던 백작가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말상대가 되어 주었던 친구. 그래서 그와 결혼해서 진정한 가족을 만들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에게 고백을 하고, 거절당하고, 수사국에 입사하고, 그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4년이 흐르고. 그 사이에 그녀는 피임약을 먹었다.
그녀에게 다른 남자가, 정확히 말하면 다른 연인이 있었나. 가능성은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