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 아읏…….”
그녀는 그의 위에 앉아 허리를 움직였다. 그녀가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그의 꾹 다문 입술에서 신음 소리가 배어 나왔다.
“이베카, 하…….”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자신도 허리를 튕기기 시작하자 그녀의 눈앞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골반을 감싸 안은 채 그의 허리가 밀어붙이듯 움직였다.
자신의 안쪽을 가득 채운 이물감이 기뻤다. 강렬한 자극과 쾌감만큼이나 그와 맞닿아 있다는 만족감이 좋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을 때 순식간에 무너지듯 달려드는 그의 모습이 기뻤다.
그 기쁨은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고 아리면서 오는 기쁨이었다. 그 목이 멜 것 같은 순간들이 그녀의 마음 속 결핍을 채워 주는 것 같았다. 이 정사가 끝나면 다시 이상한 씁쓸함이 남더라도.
거의 몸을 가누기가 어려워질 때까지 그는 집요하게 그녀를 안았다. 기어이 그녀가 녹초가 되어 그의 몸에 늘어지고 나자 다니엘은 얄밉게도 평소의 단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열락에 빠져 흐트러진 눈을 하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던 그때가 아득하듯, 마치 애를 달래는 것처럼 그녀를 토닥이는 것이었다.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안 해도 돼요. 다른 방법이 많아요. 뼈대가 되는 10개 조항만 해도 대단한 거예요.”
“……전하.”
그녀는 잠시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 하고 싶어요. 정말로, 계속 하고 싶어요.”
“……왠지 그럴 것 같더라니.”
“사실 더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평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어요. 적어도, 검수라도.”
“산하기관 직원들 말고?”
“네.”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베카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늘 생각했어요. 왜 나는 내 잘못도 아닌데, 다른 피를 타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차별받는지. 오늘 문득 아무리 아메탄의 성을 가졌어도, 지젤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위험한 발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일 다니엘이 뭐라고 하면, 로즈리의 언행을 일러바칠 참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힘을 얻은 이베카는 차분하게 말했다.
“평민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니, 의견이라도 듣도록…….”
그러나 다니엘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베카는 좋은 마음으로 생각한 방안이겠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라요. 내게는 언제나 이해관계가 이념에 우선합니다.”
다니엘은 부드럽지만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영리하고, 어느 정도 부가 쌓인 평민들이 공화주의 사상에 매료되기 딱 좋은 사람들이지요. 그들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를 두면 적어도 ‘우리의 목소리를 왕이 듣지 않는다’라는 명분은 댈 수 없겠지. 그런 마음으로 허가하겠습니다.”
이베카는 다소 실망했다. 다니엘이 자신의 억울함에 공감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선을 긋겠다는 듯이 명료하게 말했다.
“이베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서 왕권을 약화시키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철저히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지. 내란을 피하고 싶어서, 아슬아슬하더라도 평화가 좋아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공화주의에 선동당하지 않도록 아낌없이 현금을 뿌리는 게 그 이유예요. 내가 자비로워서가 아닙니다.”
이베카는 다니엘의 푸른 눈이 문득 서늘하다고 생각했다. 아, 이 사람은 왕이지. 그녀는 새삼 그 사실을 짚어 주는 다니엘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기본적으로 선량해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성군은 아니다. 그는 만일 대헌법이 완성되면 온갖 정의와 인권, 평등과 자유 등의 단어를 갖다 붙이며 홍보하겠지만, 진심은 그저 최악을 두려워하는 것뿐이었다.
성군인가. 아니면 단지 계산적이고 영리한 지도자일 뿐인가.
“그래서…….”
그는 이베카의 생각을 안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뼛속까지 이기적인 내가 아니라, 그대가 해 줘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그녀는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저 ‘왕’이었고, 평화라는 더 큰 목표를 위해 몇 발짝 물러나는 것뿐이지 실제로 정의에 대한 신념은 없었다. 그래서 직접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믿지 못해서.
그런 그가, 그녀를 믿고 이 중요한 일을 맡겼다.
“이베카, 모든 발걸음에 당당해지세요. 언제나 내가 그대의 편이라는 걸 잊지 말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포근하게 닿았다. 이베카는 눈을 감았다. 뻔한 말, 당연한 말, 그래서 오랫동안 바라는 줄도 몰랐던 말. 그 예쁜 말과 따스한 손길만 있다면 그녀는 다른 것들 정도야 덮고 넘어갈 수 있었다.
심장이 꾸욱, 하고 눌리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 이 모든 예쁜 말에 보답하고 싶어. 다 가진 이 남자의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
그리고 다음 날, 이베카는 습격을 받았다.
* * *
습격은 그녀가 법무국에서 퇴근하던 오후에 이뤄졌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궁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켄타를 비롯한 세 명의 호위무사가 그녀를 둘러쌌다. 그리고 순식간에 복면을 쓴 괴한들이 그들을 덮쳤다. 이베카는 품에 단검을 지니고 있었으나 단검은 하나뿐이었고 괴한들은 너무 많았다.
법무국 건물은 왕궁과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어쨌든 산하기관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위협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법무국에서 왕궁으로 가는 길은 충분히 일반인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왕비님, 조심하세요!”
켄타의 외침 이후 순식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베카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 명의 호위무사가 괴한들과 겨루는 것을 지켜보았다. 괴한은 호위무사들이 결정타를 날리려고 하면 멀어져 사라지고 다른 괴한들이 달려들었다.
이베카를 지키는 것이 우선인 호위무사들은 그들을 쫓아가지도 못했다. 그에 비해 아무런 공간적 제약도 받지 않은 괴한들은 그 수가 많아 호위무사들의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압당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던 이베카가 켄타의 머리를 노리는 괴한에게 제복 속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던지려고 허겁지겁 왼손을 품에 넣었다. 그러나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챘는지 괴한 중 하나가 곧장 그녀의 허리에 검을 박았다.
“왕비님!”
“……윽.”
울컥하고 뜨거운 피가 쏟아졌다. 그녀는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며 괜찮다고 소리쳤다. 허리 쪽이니 생명에 지장이 없어…… 마력도 안 느껴지니 단순 찰과상이야……. 하지만 그녀 자신의 목소리조차 통증 때문에 느껴지지 않았다.
때마침 저 멀리서 수사국의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 몇 명이 법무국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다가 그들을 발견하고 갑자기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님! 왕비님! ……찮으세요?”
그녀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무릎이 툭, 하고 꺾였다. 수사국 사람들이 달려오자 괴한들은 재빨리 흩어졌다. 수사국 직원들 몇 명이 괴한들에게 따라붙고, 한 명이 그녀를 재빨리 부축했다. 법무국 직원들 또한 놀라서 그녀에게 다가왔으나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품에 안은 수사국 직원의 낯선 얼굴과 분홍빛 머리카락만 흐릿하게 눈에 담겼다.
“왕비님!”
검은색 수사국 제복을 입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여자였다. 이베카는 눈을 깜빡거리며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어조면서도 안심시키는 것처럼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괜찮아요, 치료만 하면 되는 상처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레이나?”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의식을 잃었다.
이베카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모든 치료가 끝난 상태였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다니엘이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늘 단정했던 그의 얼굴이 거뭇거뭇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정신을 잃은 것 같지도 않은데 다니엘의 상태가 자신보다도 안 좋아 보였다. 거칠한 안색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뿐만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 역시 초조함과 다급함이 묻어났다.
“이베카, 괜찮아요?”
“……네. 어차피 급소도 아니고, 마법 공격도 아니니 금방 나을 수 있는 상처예요.”
그녀의 차분한 대답에 다니엘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료국 제복을 입고 있는 산하기관 직원에게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그렇죠?”
“……예.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니엘의 뒤에 호위무사들이 가득 서 있었다. 한 번도 왕비궁에 그의 호위무사들이 들어온 적 없었기에 그녀는 다소 놀랐다. 잔뜩 표정이 굳어 있는 안리크와 눈이 마주치자, 다니엘이 그녀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았다.
“이베카, 상황이 기억나요? 혹시 특이 사항이라도 있었어요? 수사국 직원을 곧 보내겠지만…….”
“배후가 안 밝혀졌나요?”
“……네.”
“별달리 특별한 것은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 켄타와 메리엔, 에스더는…….”
문득 자신이 다치자마자 전투고 뭐고 즉시 중단하고 제 쪽으로 몸을 돌리던 호위무사들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났다. 다들 급소를 보였으니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부상이 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의료국의 치료를 받고 있어요. 이베카, 정말 괜찮아요?”
“이 정도면 걸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맞죠?”
그녀는 의료국 산하직원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안경을 쓴 나이대가 좀 있는 갈색 머리의 여자인 의료국 직원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에 큰 지장은 없을 테지만 무리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