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나약하긴. 아, 역시 핏줄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런가.”
로즈리가 피식 웃었다. 이베카는 푸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혹시나 다니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이 작은 아이가 아메탄의 왕이다.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어미의 딸에게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옳은가?
그녀는 문득 치미는 억울함에 스스로 놀랐다. 수사국의 강령 중 하나가 아메탄 왕족에 대한 충성인데, 상상하지도 못한 거부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 왕궁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그 자리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듯해서 마지막으로 조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로즈리는 씩 웃으며 지젤의 손을 고쳐 잡았다.
“이 넓은 왕궁에 아메탄의 성을 가진 자가 둘뿐이라는 것은, 그만큼 왕궁이 섬뜩한 곳이라는 뜻이에요. 미꾸라지가 감히 설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몸조심하세요. 아직, 후계도 잇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로즈리는 그대로 뒤를 돌아 지젤과 함께 멀어졌다. 이베카는 연무장의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이상하게 분했다. 빙글 돌아서 저벅저벅 걸어 바닥에 놓여 있던 활을 집어 들고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깔끔하게 명중했지만,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과녁을 노려보았다.
* * *
귀족들에게 대헌법 10조항을 내밀던 날, 다니엘 역시 끔찍하게 바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이베카는 그가 밤이 깊도록 나타나지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로즈리가 득달같이 그녀를 찾아 연무장까지 달려오는 판에, 직접 회의에서 대헌법을 발표한 다니엘을 찾아올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이 뻔했다.
문득 이베카는 자신을 정치에서 분리하고 싶다던 다니엘의 말이 어느 정도는 ‘보호’를 뜻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 일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초안을 제출하고, 다니엘이 의견을 수합하여 주면 수정하고. 거꾸로 말하면 모든 불만과 항의는 다니엘이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이상한 책임감을 느꼈다.
1조를 ‘그 누구도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타인의 신변을 결정할 수 없다’로 정한 것은 그에게 이단 엔리히와 리한 카드민의 일례가 상당한 상처로 남았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신변을 결정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베카는 나중에 자신의 자식이 그런 부담스러운 선택의 장에 서지 않기를 바랐다.
제국의 반란군이 발표한 임시 헌법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상당히 상위 조항에 존재했다. 제국의 폭군이었던 황제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낌 없이 죽인 것을 의식한 조항이었다. 이베카는 법전을 앞에 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침대 위의 그림이 벌컥 옆으로 밀린 것은 그때였다.
“전하?”
그녀는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실내복 차림의 그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침대에 엎어졌다.
“와, 피곤해. 잠자리에 든다며 모두 쫓아냈는데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물러나지를 않아. 어쩔 수 없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어째서…….”
그가 고개를 살짝 들고 씩 웃었다. 이베카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피곤해 보이는 푸른 눈에 미소가 감도니 왠지 홀리는 것 같았다. 새삼 아무리 흐트러졌어도 조각같이 준수한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별처럼 반짝이는 금발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보고 싶어서.”
“어…….”
“아무리 기다려도 비밀 통로로 왕비가 오지는 않기에, 내가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베카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안아 주지도 않네.”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서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고, 가까이 다가온 그가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그녀는 살짝 손을 올려 그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았다.
“오늘 힘드셨죠?”
이베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니엘은 눈을 반쯤 감고 대답했다.
“이런 귀족도 있고, 저런 귀족도 있으니.”
제대로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베카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요?”
대답이 없었다. 이베카는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래도 그녀가 만든 조항들인데,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에셀번의 성을 가지고 있는데, 편을 들어줄 수도 있다고 아주 조금은 기대한 탓이다.
물론 에셀번 백작은 에셀번에 힘이 되라고 그녀를 왕비로 밀어 넣은 것이지, 왕비에게 에셀번이 힘이 되어 주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실망이 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그 미련이 그녀는 지긋지긋했다.
“뭐, 대놓고 반대는 하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왕비인 딸이 만들었는데 대놓고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지한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에셀번 백작의 뜻은 명확했다. 이베카는 문득 다니엘 역시 에셀번 백작가의 지지를 바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니엘의 머리카락을 쓸던 손짓을 멈췄다. 다니엘이 의아한 듯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베카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토해내듯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아버지가…… 아버지가.”
“…….”
“죄송해요. 그래도, 편을 들어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전하.”
“대체 뭐가?”
그가 몸을 일으키고, 그녀의 옆에 앉아 눈을 마주보았다. 이베카는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해 눈을 내리깔았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 아버지의 친딸이 아닐 거라는…… 말이 많……았어요.”
이베카는 떨리는 제 목소리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안리크가 첫사랑이라는 것조차 알고 있던 왕이니 이런 사안까지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르고 있다면 직접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그가 에셀번 백작가의 협력을 바랐던 거라면 지금에라도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 하니까.
“그, 그래서…… 아버지가 저희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혹시나, 그 목적으로 저를 선택하셨다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녀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다니엘이 한숨을 쉬었다.
“다 알고 있었어요.”
“…….”
“당신에 대해 내가 모르는 것은 없어요.”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숨이 멈췄다.
“이베카, 앞으로 나한테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요. 그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내게 당당해도 돼요.”
“하지만 결혼의 이유가…….”
다니엘은 그녀의 우물거리는 말을 자르고 산뜻하게 웃었다.
“나 당신하고 늙어서 라인볼 치려고 결혼한 건데, 진짜로. 그게 내 유일한 꿈이에요.”
“…….”
“힘들 거라는 거 알아요. 18년간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극복하려면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래도 자꾸 미안하다고 하면…….”
다니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소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내가 좀 슬퍼서 그래요. 괜히 데려와서 힘들게 하나, 싶고.”
그 말에, 이베카는 감동하기보다는 와락 겁이 났다. 괜한 징징거림이었을까. 가족에 편입된 적이 한 번도 없는 그녀는 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들자 순식간에 긴장이 되었다. 다니엘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주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많이 지쳐 보이니, 이만 갈게요. 에셀번 백작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말아요. 이베카, 나는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면 토론할수록 당신의 10개 조항이 참 많은 생각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느껴요.”
“…….”
“정말로, 정말로 잘하고 있으니…… 아니, 이런 말도…….”
다니엘은 살짝 웃었다.
“잘하고 있는데, 못해도 돼요. 이렇게 말해야 하나.”
이베카는 다니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그녀를 안지 않고 그냥 간다고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 무언가에 실망하여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조금 사라진 걸까? 어쩌면 아까 로즈리에게 던진 ‘내 아이가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이 씨가 되어서? 다니엘이 빙그레 웃고 그녀의 뺨에 입 맞추는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왜.”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이베카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옷자락을 말없이 꾹 쥐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못 참을 것 같은데…….”
살짝 웃으며 그가 이베카의 몸을 확 끌어안았다. 귀를 천천히 핥다가 입술로 내려오는 그의 혀를 느끼며 그녀는 몸을 떨었다.
다정하고 맑은 그 눈이 욕망에 흐릿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날카롭게 눈치챌 때면 이상한 안도감이 몰려왔다. 풀어헤쳐지는 옷 사이로 급하게 살결이 마주했다. 맨살에 닿는 공기는 차갑고 집요하게 닿는 손길은 뜨거웠다. 그녀는 먼저 그의 단단한 페니스에 손을 갖다 대고 천천히 부드럽게 쓸었다.
“으…….”
꾹 눌러 참는 듯한 그의 낮은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음핵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성기를 매만져 주며 마주한 얼굴에서 열기와 신음 소리가 섞였다.
다가올 더 큰 쾌락을 알기에 아쉬우면서도 절제하는 똑같은 표정으로, 그들은 정적 속에서 서로의 감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손길이 더 빠르고 거칠어질수록 웃음기는 사라지고 몸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그녀를 번쩍 들어 급하게 그의 무릎에 앉혔다. 젖은 그녀의 아래에 단숨에 성기가 들어왔다. 그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고, 숨결이 어깨에 흩어졌다. 집요하게 유두를 괴롭히는 애무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교접한 아래쪽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