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의 이유-17화 (17/79)

17화.

뮤엘튼은 이를 갈았다. 레비나인 백작은 대표적인 루벤의 편이었는데……. 능구렁이 같은 왕은 재위와 동시에 루벤파의 귀족들을 싹 몰아 버리는 대신 살살 구슬려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몰살을 예상했던 진보파 귀족들은 그 뒤로 다니엘이 가끔씩 던지는 진보적인 정책 몇 개에도 만족하며 무조건적인 충성을 말하곤 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전하께서 저희를 배려해 주어 귀족가의 여식을 왕비로 맞으시고 그 주체로 만들어 주시니 믿음이 갑니다.”

다니엘은 또 다른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에셀번 백작은 회의가 끝날 때까지 탁자를 노려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회의장의 위태로운 분위기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다니엘은 레비나인 백작과 이야기하느라 뮤엘튼 공작이 회의가 끝나자마자 에셀번 백작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다니엘의 뒤에서 그림처럼 회의장을 지키고 있던 안리크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백작.”

에윌 에셀번은 아메탄 왕국에서 가장 고위 귀족인 뮤엘튼 공작의 속삭임에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알아서 처리하게. 시에린은 둘째를 임신 중이고, 에드워드는 잘 크고 있네.”

뮤엘튼 공작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시에린은 뮤엘튼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 에윌의 첫째 딸이었다. 에드워드는 시에린의 첫째 아들로, 장성하면 에셀번 백작가의 양자로 들어오기로 합의된 그의 손자였다.

“다섯 자매 중, 이베카가 홀로 마구간지기를 닮았다지? 그 동안 거둬서 차별하지 않고 기른 것만 해도 은혜일세.”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끝낸 뮤엘튼 공작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멀어졌다. 에윌은 그 무례함에 노여워할 수가 없었는데, 어차피 시간을 주었더라도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

이베카는 법무국에서 퇴근한 뒤 연무장에 있었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과녁을 향해 단검을 차례로 던졌다. 예전에 안리크가 그녀의 작은 체구와 짧은 팔에 알맞다며 직접 가르쳐 준 체술이었다. 이제는 딱히 쓸 곳도 없었으나, 잡념을 없애기에는 좋았다.

다니엘은 그녀에게 2년의 시간을 주었다. 2년 동안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칠 거라고. 그녀는 제국의 반란군이 선포한 공화주의 원칙까지 참고하며 법무국의 얼마 안 되는 직원들과 토론하고 또 토론한 뒤 일주일 동안 일단 열 개의 조항을 만들어 다니엘에게 건넸다.

법무국장 오렘은 막내 직원에서 왕비가 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반발이 상당할 겁니다, 왕비님. 귀족들은 평민과 무엇 하나도 동등해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결국엔 힘들다고 봅니다.’

이베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국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저는 평민 출신입니다. 그것도, 가장 귀족들에게 반감이 심하다는 영리한 평민이지요. 저는 언제나 왜 나보다 멍청한 귀족들이 나보다 평생 더 잘사는가, 라는 질문을 무시하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다만 아메탄은 평민에게 부와 명예의 길이 열려 있으므로 눈을 감은 것뿐입니다.’

‘…….’

‘하지만 모든 영리한 평민들이 산하기관 입사에 성공하지 않습니다. 공화주의에 휩쓸리기 가장 좋은 부류들이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명분을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화주의가 맞고 맞지 않고를 떠나, 혁명이 일어나면 많은 사람들이 다칩니다. 하지만…….’

이베카는 늙은 법무국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의견은 산하기관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짐작하건대, 수사국에서는 반발이 클 겁니다.’

이베카가 본디 수사국에 몸을 담았음을 의식하는 발언이었다.

‘수사국은 직권을 가진 유일한 산하기관이고, 왕족도 건드리지 못하는 자치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또한 법을 지켜야 한다면 행동에 제약이 몹시 생깁니다. 그리고 그런 사안이 아니어도, 향후 50년은 수사국에게 상당한 위기가 될 겁니다.’

‘왜요?’

‘마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브나 왕비가 가장 많은 고대 마법으로 고유의 비기를 준 곳이 수사국입니다. 그 비기가 사라지면 많은 문제가 생길 겁니다. 단순히 일이 번거로워지는 다른 산하기관과 다릅니다.’

‘……고유의 고대 마법까지도……요?’

‘마력이 점차 사라지는데 고대 마법이라고 안 사라지겠습니까. 이브나 왕비의 마법은 결국엔 모두 풀릴 겁니다. 정보국에서는 30년에서 40년으로 예측하고 있지요. 정말 길어 봤자 50년일 겁니다.’

오렘의 조언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그녀는 애초에 생각한 50개의 단검을 모두 던졌다. 그녀가 지치지 않고 구석에 있는 활을 집어 드는데, 연무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베카의 뒤에 숨죽이고 서 있던 호위무사 켄타가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 왕비님께 할 말이 있어서 왔으니까.”

연무장까지 친히 방문한 검은 드레스의 여자는 당연히 이베카가 제 쪽으로 와야 한다는 듯이 연무장의 문 밖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윌리엄 태자의 부인인 로즈리가 딸 지젤의 손을 잡고 친히 연무장까지 방문한 것이다.

이베카는 활을 내려놓고 로즈리가 서 있는 연무장 밖까지 천천히 걸었다. 무릎을 굽혀 예를 표한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왕비궁으로 모시겠…….”

“긴 말 할 필요가 없어서 직접 왔어요. 어차피 전하고 싶은 말은 짧으니.”

로즈리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베카는 다니엘의 형수인 그녀를 결혼식 이후에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로즈리의 한쪽 손을 잡고 있는 꼬마 여자애가 다니엘 외의 유일한 아메탄의 성을 가진 아이라는 건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왕가에서 따끔한 말을 해 줄 어른이 궁에 계시지 않으니 결국 내가 한마디 해야겠지요. 왕비는 평민 놀이 하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니 당장 그만둬요.”

이베카는 고요한 눈으로 천천히 반문했다.

“음, 대헌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귀족과 왕족이 평민과 같은 법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경우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무슨…….”

“우려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과도하게 귀족의 권리를 해치지 않도록 제가 잘 조정을 해 보겠습니다. 잘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평민들의 반란을 차단하고 대화로 풀어 가는 길목이…….”

“귀족?”

로즈리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말이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숨이 막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에셀번 백작가의 셋째 영애가 그 어떤 티파티나 피크닉, 살롱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귀족가의 여식들 사이에 유명하답니다. 열일곱이 되자마자 평민들이나 다니는 대학에 가더니 4년 동안 백작가에 발걸음 한 번도 안 했다는 사실도.”

“…….”

“한 번도 귀족에 섞여 보지 않은 그대가 어찌 귀족을 대표합니까? 성만 에셀번이라고 대귀족의 영애인가요? 제가 여기서 은밀한 소문을 한 번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믿어요.”

로즈리는 손을 들어 그녀의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이베카는 이상하게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왕비궁은 본디…… 귀족가에 태어나, 고급 교육을 받고, 태자비 시절을 거친 자들의 자리입니다.”

이베카는 그제야 왜 로즈리가 왕비인 자신에게 이토록 건방진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왕비란 이베카가 아니라 자신 같은 사람을 위한 자리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로즈리는 진심으로 그녀를 부정에서 비롯된 귀족의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대놓고 인정하지 않을 뿐이지, 절반은 천한 마구간지기의 피가 흐를 거라고. 그리고…… 그 생각은 그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베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평민 출신인 테스티가 무슨 짓을 했나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려요. 이번 왕비궁은 부디 평화로웠으면 좋겠군요. 그러니 여기서 멈추도록 해요. 그대만 못하겠다고 나가떨어지면 아무리 전하라도 밀어붙이기 힘드실 테니.”

문득 이베카가 생각했던 것은 법무국장 오렘의 말이었다.

‘저는 언제나 왜 나보다 멍청한 귀족들이 나보다 평생 더 잘사는가, 라는 질문을 무시하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이베카는 대학에서도 성적이 좋았다. 로즈리보다 훨씬 더 잘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 연무장에서 단숨에 그녀의 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었다. 당연히 왕비이기 때문에 그녀보다 지위도 높았다. 백작가에서 자매들이 받은 귀족가의 교육도 동등하게 다 받았다. 예법도 어릴 때부터 완벽히 익혔고 가문을 위해 정략혼까지 했다. 그런데 왜, 단지 에셀번 백작의 피가 섞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해야 하는가.

그녀가 검은 머리로 태어난 것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본질적인 질문에 그녀의 눈이 분노와 반발심에 번득이기 시작했다. 에셀번가도 아닌 상관없는 사람에게 무시 받자 서글픔보다는 억울함이 올라왔다. 말없는 이베카에게 로즈리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같은 왕가의 식구로서 조언하죠. 아이를 낳으면 지금의 결정을 몹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왕권의 축소는 후계자에게도 치명적이에요. 전하의 잘못된 신념으로 종이인형 같은 후계자를 만들 셈인가요?”

“저는…….”

이베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아이가 완벽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완벽한 사람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합리성이 그 애를 규제한다면 그 또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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