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지만 그러면, 저와 결혼하신 이유가…….”
“나이 들어서, 내 라인볼 상대가 되어 준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정말.”
이베카는 다니엘이 너무 어려웠다. 그녀에게 잘해 주고 상냥했기에 더욱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효용에 맞는 요구를 하면서, 또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뻔히 목적이 있는 결혼을 했으면서, 쓸모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한다.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뻔히 따로 있으면서, 자꾸만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고 평생을 말한다.
“그대가 내게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늘 곁에 있을 테니까. 잘하면 함께 기뻐해 주고, 못하면 괜찮다고 위로해 줄게요.”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거짓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이베카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녀의 곁에 늘 있어 주겠다고 말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했다.
“그러니까 왕비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면 돼요.”
이제 결혼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아직 낯선 면모가 많은 남자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 주는 걸까. 그것도 남들이 다 속을 파악할 수 없으니 주의하라고 경고한 국왕이.
이베카는 떨리는 손으로 그를 마주 안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따스함이었다. 곧 간절해질 온기, 언젠가는 떠나갈까 봐 불안해질 호의.
“이제, 우리의 편은 우리뿐이니까.”
처음부터 겉돌았던 가족들도, 대귀족가의 어린 영애라며 묘하게 거리를 두던 대학 동기들도, 정작 그녀가 내민 손은 잡아 주지 않던 안리크도 이렇게 그녀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베카는 어딘가의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아니라서 어딘가 위태롭더라도 그의 체온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베카는 간절하게 속삭였다.
“잘할게요.”
에윌이나 안리크의 말도 있고, 그녀 역시 누군가를 믿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믿고 싶은 사람이었다.
3. 밀려오는 밤
뮤엘튼 공작은 능구렁이 같은 왕이 선택한 왕비가 이베카 데 에셀번이라는 사실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아메탄의 개국 공신 가문으로서 커다란 권력을 유지해 왔다. 보수파 귀족의 수장이기도 한 뮤엘튼 공작은 다니엘이 왕자였을 시절부터 그를 지지했으며,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그는 회의장에서 선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왕을 향해 이를 갈았다. 당연히 윌리엄과 생모가 같고, 루벤과 대립각을 세운 인물이니 보수파로 대표되는 친제국적인 정책을 펼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지했다. 그런데 막상 왕위에 오른 다니엘은 전혀 그의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문제는 다니엘의 실책, 예를 들어 이단 황자를 몰래 아메탄에 들여와 아메니티의 마력이 끊겼다거나 하는 사실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기술국의 설립 같은 위기를 타협하는 개혁만이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니엘은 제국에 전쟁 지원금을 보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듯 보수파 귀족들의 불만을 잠재웠는데,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워 뮤엘튼 공작은 늘 마음을 놓기 어려웠다.
이베카 데 에셀번이라니. 뮤엘튼 공작은 다시 한 번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에셀번 백작가는 언제나 중립을 유지하는 너구리 같은 귀족이었다. 에셀번 백작가의 첫째 딸이 자신의 며느리가 되며 혼약으로 엮었다 싶었지만, 둘째 딸은 또 진보파의 귀족과 결혼했다.
이런 이중적인 혼사 때문에, 뮤엘튼 공작은 에셀번 백작가가 완전히 자신의 편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에셀번 백작가를 자신의 수중에 둘 생각이었다.
어차피 세력이 약한 귀족들은 어딘가 편입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안정된 후계가 없어 손자를 양자로 삼아야 하는 에셀번 백작가라면 집어 삼킬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던 차에 에셀번에서 왕비를 낸 것이다.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왕비는 산하기관 직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정치에 관여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카를 왕과 이브나 왕비의 전례가 있지요.”
당연히 자신의 딸이 다니엘의 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니엘은 가장 위태로운 중립 귀족 가문에서 왕비를 선택하고 그녀를 정치와 분리해 버렸다. 회의에조차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은 몹시 이상한 일이었으나, 선왕비 테스티에 대한 반감인가 하여 불안함을 억지로 넘겼다.
그러나 다니엘과 이베카가 결혼한 지 딱 3주가 되는 날, 다니엘은 회의장에서 그 부드러운 미소로 모두의 입이 벌어지는 선언을 했다.
“법무국을 독립시키려고 합니다.”
모두 다 다니엘의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정적을 지켰다. 산하기관을 독립시킨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법권을 집행권과 분리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법권을 집행권의 위에 둡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도, 귀족도, 산하기관 직원도, 평민도 똑같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은 너무나 쉽게 말했고,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은 갑자기 내리꽂힌 말을 해석하지 못해 한동안 자신들끼리 수군거렸다.
공화 혁명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공화주의 사상을 아메탄의 실정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 다수를 위한 합리적인 원칙이 그 어떤 사람의 명령보다도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다니엘의 말은 이상적이었으나 분명 그들로부터 포기하라고 하는 것들이 있었다.
“권위가 없으면 위계가 무너지고, 위계가 무너지면 혼란이 옵니다. 전하, 다시 생각하십시오. 평민들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며 종내에는 말도 안 되는 권리까지 요구할 것입니다. 본디 아랫것들은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 우기는 법입니다.”
“법을 인간의 위에 두면, 사람은 다 똑같다는 착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란 조금만 풀어 줘도 쉽게 과거를 잊고 더 풀어 달라며 징징대는 족속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권리를 찾겠다 우기면 나라가 시끄러워집니다.”
뮤엘튼 공작을 비롯한 모든 귀족들이 하나가 되어 반발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그저 에셀번 백작을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에셀번 백작은 두려운 눈으로 탁자의 구석만 바라보고 있었다. 법무국과 연결되는 사람은 결국 그의 딸이었다.
“메데스토 왕국을 아시지요? 우리보다 훨씬 더 넓고 부강한 나라이나 현재 내란에 휩싸여 지옥과 같다고 합니다. 혁명군이 들고 일어나 귀족이란 귀족의 목은 모두 자르고 그 영지를 혁명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나누고 있다고 하는데.”
다니엘은 차분하게 말했다.
“제국조차 피해가지 못한 내란을 아메탄이 아무런 희생 없이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공화주의자들에게 돈을 물려 입을 다물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이 옆에 서 있는 시종에게 눈짓을 하자, 시종이 재빠르게 한 움큼의 서류를 귀족들의 앞에 하나씩 펼쳐 놓았다. ‘대헌법’이라고 명명된 열 개의 조항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초안을 작성한 사람의 이름으로 ‘이베카 데 에셀번’이 박혀 있었다.
“내가 법무국에 있는 왕비에게 부탁하여 초안을 짜 보라 했습니다.”
에셀번 백작, 에윌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결국에는 올 것이 왔다. 그는 왕에게 연속으로 배신당한 것 같아 쓴물이 올라왔다.
처음에 이베카를 왕비로 달라고 했을 때, 그는 당연히 국왕이 뮤엘튼 공작가의 편으로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는 에셀번 백작가를 지켜 주고 뮤엘튼 공작가로부터의 방패가 되어 줄 줄 알았다. 역사적으로, 젊은 왕은 자신을 왕위에 올리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대귀족을 견제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에셀번의 이름을 가진 왕비를 정치에서 배제시킨 것이 첫 번째 배신이었고, 이베카를 이렇게 보수파 귀족들 모두의 적으로 돌린 것이 두 번째 배신이었다. 귀족들은 이베카만이 아니라 에셀번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대체 왕은 무슨 생각으로 ‘이베카 데 에셀번’이라는 이름을 이렇게 선명하게 새긴 것인가. 법무국 주도라고 하면 그 자신에 대한 반발이 심할 테니, 귀족인 왕비의 이름을 들먹여 입막음으로 쓴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번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왕비는 귀족이자, 산하기관 직원이자, 왕가의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의 합의점을 잘 찾아내고, 균형을 맞추어 줄 것입니다.”
“전하,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이 대헌법의 1조만 보아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어째서?”
“그 누구도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함부로 타인의 신변을 결정할 수 없다, 라뇨? 지금 ‘그 누구’에 우리 모두가 포함된다는 뜻입니까?”
“예. 우리가 법을 지키면, 평민들도 무작정 법을 어기며 왕족과 귀족을 다 죽여야겠다고 나서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그렇게 하는 평민들의 발을 묶는 정당성을 지니게 되겠지요.”
“애초에 평민들은 이런 법이 아니어도 저희에게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저는 왕비가 결정한 10개의 조항 모두 마음에 듭니다. 왕명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좋아하는 권리를 이용하여 제가 선언하는데, 법무국은 독립할 것이고 대헌법은 2년 안에 발표될 것입니다.”
회의장에 정적이 흘렀다. 다니엘이 재위한 뒤 회의장에서 ‘왕명’을 말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소한 사안들이라면 몰라도, 이토록 귀족 모두를 찍어 누르는 왕명은 더더욱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용이나 세부 조항에 대해서는 2년간 의논하며 토론할 것이고, 각종 의견은 당연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베카 역시 귀족 여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녀는 적당한 선을 지켜 모두를 만족시키는 부분을 잘 짚어 낼 것입니다.”
“저는 찬성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곧바로 반응한 것은 진보파의 수장으로 불리는 레비나인 백작이었다.
“훌륭한 군주를 둔 덕에, 메데스토의 귀족들처럼 목이 잘릴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