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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15화 (15/79)

15화.

왕비인 이베카도 그럴 것이다. 4년간의 기억은 없어도 그 길을 이어 걸을 수는 있겠지. 게다가 어쩌면 가족이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일한 친구 대신, 정말로 공식적인 가족이 생기기도 했다. 그녀는 보고 있던 법전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몇 줄 읽기도 전에, 다니엘이 나타났다.

“전하?”

그녀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이 시간에 어찌…….”

그는 특별 휴가 기간 내내 저녁때마다 일과를 마치고 그녀를 찾아왔다. 비밀 통로를 통해 궁의 이곳저곳을 다니고, 다정하고 상냥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그녀를 안고 잠들었다. 그러나 보통 노을이 질 때 즈음에 찾아오는 것과 달리 오늘은 한낮이었다.

“오늘이 특별 휴가 기간 마지막이잖아요.”

다니엘은 싱긋 웃었다. 이베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바빠질 텐데, 조금 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어서요.”

이베카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법의 초안을 만드는 것, 아이를 갖는 것 두 가지의 목적 외에 자신을 찾는 이유를 아직 추론하지 못했다. 아이를 만드는 것이야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닌데, 왜 그는 매일같이 찾아와 그녀와 꽤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연무장에 가 볼래요? 왠지 가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네!”

다니엘의 말에 이베카는 흥분해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했으나 차마 왕비가 칼을 던진다는 소문이 궁에 돌면 다니엘에게 민폐가 될까 봐 얌전히 지내던 차였다.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궁을 나섰다. 그녀는 그제야 그녀의 궁 밖에 늘어선 호위단을 보았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안리크에게 눈길을 주려던 찰나, 다니엘이 어깨를 더 밀착시키며 끌어안는 것처럼 그녀를 당겼다. 그러면서 각도가 비틀어지는 바람에 그를 볼 수 없었다.

뒤에 따라붙고 있을 안리크와 인사는커녕 눈 한번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녀는 어리둥절하여 다니엘을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왕족들이 쓰는 연무장은 궁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호위단들에게 들어오지 말라고 이른 뒤 단 둘이 넓은 연무장에 들어갔다. 이베카는 결국 안리크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한쪽 벽에 정렬된 무기를 구경했다.

“체술 1등으로 졸업했다던데.”

“네.”

이베카는 배시시 웃었다.

“옷차림이 이래서…… 다 보여 드리지는 못하지만…….”

정렬된 무기들 중 단검을 두 개 빼들고, 그녀는 휙, 휙 하고 저 멀리를 향해 던졌다. 작은 단검이 본디 활을 위해 만들어진 과녁의 중앙에 차례로 정확히 박혔다.

뿌듯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던 그녀는 흠칫 놀랐다. 당연히 놀란 얼굴로 환하게 웃어 주며 대단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묘한 감정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의 그라면 당연히 칭찬을 쏟아 줘도 모자랄 판에, 그의 눈에는 이상한 서러움마저 감겨 있었다. 애매해진 분위기에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아…… 역시, 음, 왕비가…… 이런 부문에 능한 것은…… 좀 보기에 그렇지요?”

시무룩한 목소리로, 그녀는 재빨리 덧붙였다.

“앞으로 안 던질게요.”

“이베카.”

다니엘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당당하라고 했잖아요.”

“…….”

“이베카의 4년을 믿겠다고 했잖아요. 이런 거 잘해서 수사국 들어간 거잖아요?”

이베카는 그에게 잡힌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자주 잡았다. 손을 잡는다고 해서 아이가 생기는 것이 아닌데. 여자의 손을 잡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까? 문득 그녀는 그가 E. J. 의 손도 이토록 따뜻하게 잡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녀의 마음이 요동치며 상냥한 남편에게 기대려고 할 때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E. J.를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낮은 자존감 때문이기도 했고, 그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경계심이기도 했다.

“연무장에 언제든 와도 되고, 갖고 싶은 무기가 있다면 가져도 돼요. 남들 앞에서 보여도 되고, 숨기고 싶다면 숨겨도 되고.”

“……남들에게는 숨길게요. 괜히 민폐가 될까 봐 겁나요. 다른 귀족 영애들은 취미로 검술을 한다면 몰라도, 암기인 단검 같은 건 던지지 않으니까.”

그녀의 차분한 말에 다니엘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왜 왕비라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데 그게 이베카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질문에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음, 뭔가, 평범하게 얻은 자리가 아니니까…….”

“그대는 내 하나뿐인 왕비인데,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건가요?”

그런 문답이라면 그녀는 이미 혼자서 수십 번씩 해 보았다.

왜 에셀번이라는 대귀족가에서 태어났는데 늘 주눅 들어 있어?

나는 다른 자매들처럼, 평범하게 태어난 애가 아니니까.

그래도 내 부모님은 나를 딸로 인정했기에 에셀번의 성을 준 것 아닐까?

하지만 난 금발이 아냐. 혼자 흑발이라고. 거울을 봐. 스스로가 제일 잘 알잖아. 아버지를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걸.

“하지만 우리는…….”

하지만 우리는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가 아니잖아.

한참 전에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과 대답을 반복하던 이베카는 문득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결혼은 처음부터 어긋나 있었다. 아무리 남편인 왕이 친절하고, 그녀에게 잘해 주고, 서러울 정도로 다정한 말을 건네도…….

정략혼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결혼에는 사랑이라는 요소가 있어야 했다. 누구나 부모 자식 간에 혈연이라는 요소를 기본적으로 생각하듯이. 주군으로 모시고, 좋은 동료로 서로를 믿어도, 결혼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었다.

이베카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자신에게 조소했다. 자꾸만 실체도 모르는 E. J.에 대해서 묘한 좌절감을 느끼고, 왕비라는 자리가 왠지 자꾸만 자신의 효용을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처음부터 결핍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셀번의 셋째 딸이라는 자리가 언제나 불편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귀족가의 영애로 뛰어난 교육을 받고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았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핏줄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모든 것이 불안하기만 했다.

“라인볼이라는 경기를 알고 있나요?”

그리고 다시 입을 다문 그녀에게 다니엘은 부드럽게 화제를 돌렸다. 라인볼이라면 끈으로 연결된 공을 서로의 라켓으로 치는, 경기보다는 놀이에 가까운 구기였다.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종종 공원에서 라인볼로 시간을 때우는 경우가 많았다.

“예전에 윌리엄과 많이 했었는데. 루벤과는 친하지 않았고, 아셰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는 연무장 구석에서 작은 라인볼 구기를 꺼내 라켓 하나를 이베카에게 휙 던졌다.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라켓을 받고, 다가오는 공을 빠르게 쳐냈다.

이베카도 다니엘도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았기에 랠리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공을 주고받고 있으니 어느새 우울한 생각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먼저 지친 이베카가 헉헉거리며 공을 놓쳤을 때, 다니엘이 밝게 웃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와, 어릴 때 윌리엄과도 이만 한 랠리는 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베카, 역시 합격이에요.”

“……네?”

“나는 적절한 나이에 왕위를 물려주고 좀 쉴 생각이거든요. 공원에서 라인볼이나 치면서.”

“…….”

“이베카와 치면 되겠네. 상대를 찾을 필요도 없겠어. 우리, 노인이 되면 조금 더 즐겁게 살아요.”

이베카는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미래였다. 그는 정말로 평생 자신과 함께할 생각일까? 사라졌다던 E. J.가 돌아온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을까? 법을 만들고 아이를 가진 이후에도 당연하다는 듯 곁에 있어 줄까? 그 중간에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랑하지 않아도, 편안한 친구처럼 평생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일까?

가족은 피가 섞여야 하고 부부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피가 섞이지 않았기에 아버지 앞에서 늘 죄인이었던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 말하는 미래가 이질적이어서 놀랐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는 이베카에게 다니엘은 갑자기 펜을 하나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받은 펜에는 문 상단의 각인과 함께 음각이 새겨져 있었다.

‘D. A. 로부터’

“이건…….”

“내일부터 출근하면 펜을 자주 써야 할 테니까. 선물이에요.”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이베카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다른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펜을 품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그의 이름이 박힌 펜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E. J. 에 대해서 묻지 못한 이유는, 그 역시 안리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들어진 행복이라고 해도 깨고 싶지 않았다.

“잘 쓰겠습니다.”

이베카는 다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급 펜은 아니고 기성품이지만…….”

이베카가 딱히 기뻐하지 않는 것이 펜의 가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문 상단은 밀수에 전혀 손을 대지 않던 아메니티 최고의 상단이었는데, 내가 기술국을 세우며 밀수업자들은 모두 인정해 버린 탓에 위상이 꽤 많이 추락했어요.”

“…….”

“다들 훌륭한 결정이었다며 나를 추켜세우지만, 모든 결정에는 희생이 있다는 걸 알아요. 모든 현상에는 양면이 있어요. 이베카, 이 사실을…… 유념하며 일해 주기를 바라요.”

“예.”

이베카는 차라리 업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했다. 말수가 적어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갑자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 전하.”

땀을 꽤 흘렸다는 사실 때문에 신경이 쓰여 이베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밀어냈으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베카.”

이런 건 후사를 잇는 것과 관계없는데.

“앞으로 많이 힘들어질 거예요. 내가 최대한 지켜 주려고 하겠지만.”

“…….”

“그만두고 싶을 땐 언제든지 그만둬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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