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다니엘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살짝 안타까움이 담기는 그의 푸른 눈을 보며 그녀는 이상하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미쳤어, 안리크에게도 이렇게 당황해 본 적이 없는데. 너무 잘생겨서 그런가? 아니면 눈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니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베카, 지금도 그냥 당당해도 돼요.”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눈치 보지 않고 해도 되고.”
“음.”
“솔직히 말할게요. 내 옆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난 그거면 돼요.”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면에서 완벽한 국왕이 나타나 청혼한 뒤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며 속삭인다고? 그녀는 그런 동화 같은 일을 믿을 만큼 자존감이 높지 않았다.
다니엘이 부드럽게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어서, 이베카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저는……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빠르게 이뤄내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인정받아야 제 마음이 편해요.”
“왜?”
“…….”
정적이 흘렀다. 아마 날 때부터 사랑받았던 왕은 어떤 일을 해도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의 심정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가 노력해서 아버지의 친딸이 될 수 있었다면 무엇이든 했을 텐데. 차라리 죽을 용기라도 있어서 세상에서 사라졌다면 가족들에게 민폐는 되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죄악이고, 가문의 수치고, 무수한 뒷말의 대상……. 노력해서 없앨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새로운 가족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은 적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겠지. 그녀는 자신에게 친절하고, 눈을 마주쳐 주고, 따뜻하게 안아 주는 이 새로운 가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이미 마음에 품은 다른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베카는 고개를 숙인 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다니엘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법을 만들어 줘요, 이베카. 사실은 그걸 바라고 있어요.”
이베카를 가득 담은 그의 푸른 눈이 이상하게 조금 슬퍼 보였다.
“……네?”
“그대는 왕가의 사람이고, 산하기관 직원이고, 귀족 출신이니까. 아메탄의 세 지배계층을 모두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예요.”
이베카는 너무 놀라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법은 아메탄이 개국한 이후로 이브나 왕비가 ‘산하기관 특별법’을 제정한 것 외에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법보다 중요한 건 너무나 많았다. 왕명, 산하기관의 직권, 귀족들의 회의 결과. 문제의 문제가 생겼을 때나 최후의 수단으로 따져 보는 것이 법이었다. 예를 들어, 왕위쟁탈전 같은 복잡한 사안이 생겼을 때의 처리 방안이나, 뭐 그런 것들. 그러다 보니 다른 산하기관보다 법무국의 사람이 적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법을, 왜요?”
“이베카, 공화주의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이 있지요?”
“……네.”
왕이 언급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단어였다.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공화 혁명은 왕을 끌어내려 죽이자는 것이 그 결론이었으니까. 정상적인 왕이라면 당연히 공화주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한 번도 상상하지 않은 말이 나왔다.
“한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기에 너무 복잡한 세상입니다. 지금은 아메탄이 평화롭지만, 앞으로의 10년은 지난 1,000년보다 더 변화가 심할 거예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였다. 동그라미 다섯 개가 그려진 왕가의 족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왕이라는 레이나의 평가, 왕의 생각을 알 수 없어 두렵다는 에윌의 조언…….
“나는 공화 혁명에 아메탄이 휩쓸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끔찍한 내란의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 않고, 왕족의 상징성이 분명히 국가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
“공화주의는 지도자 위에 법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왕정이라 할지라도 법을 우선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어차피 모두가 합의해야 하지만 누군가는 초안을 만들어야지요. 왕족, 귀족, 산하기관을 모두 만족시키는 법의 초안을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잠시만요, 전하. 그렇다면 법이 왕명 위에 있다는 뜻인가요?”
“수사국 직원에게 들었겠지만, 나는 이단 엔리히를 궁에 들였고 결과는 그의 배신이었습니다. 왕족이 모든 결정을 현명하게 내릴 수는 없어요.”
“산하기관의 직권보다도요? 특히 수사국의 직권은 전하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수사국은 단독으로 리한 카드민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한 채 유능한 직원을 죽일 수도 있는 처사였어요.”
“게다가 귀족들의 회의 결과까지 법 밑에 두신다는 뜻은…….”
“귀족들은 제국의 반란군이 한 달 안에 진압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반란군은 반년이 지난 지금 세를 놀랍도록 불리고 있습니다.”
이베카는 그의 생각이 아주 깊고 오래되었음을 알았다.
“기득권의 반발이 심하겠지요. 모두의 권한을 죽이고 무생물인 법이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니. 평민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겁니다. 그대의 적이 많아질 거예요. 하지만 다수를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니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많은 혼란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베카는 속삭이듯 반문했다.
“지금, 법무국의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왕권은 약화되고, 국가는 조금 더 시끄러워지겠지만…… 끔찍한 내란을 막을 수는 있을 겁니다. 평민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열어 주고, 충성보다는 합리성을 내세운다면.”
“혼자…… 하신 생각이세요?”
“이제 둘이지.”
그가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아주, 어렵겠지만 그대가 내 편이 되어 준다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다니엘은 재빨리 덧붙였다.
“……곤란하거나 신념에 맞지 않으면 당연히 거절해도 돼요, 이베카.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어 선택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며 고개를 저어도 돼요. 억지로 부탁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전하, 저는 당연히…….”
이베카가 빠르게 대답하려는데 다니엘은 그답지 않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베카가 거절하더라도, 당연히 내게 당당해도 됩니다. 아니, 그 어디에도 이베카가 당당하지 못할 사람은 없어요. 부디 싫은 걸 하지는 말아요. 제발 부탁이야.”
다니엘의 부드러운 말은 이베카의 말문을 막았다.
“쓸모라니, 이베카. 모든 사람들이 내 앞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효용을 말하더라도, 당신만큼은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돼요. 누구에게나 특별한 사람은 있잖아요. 내겐 그대가 그래요.”
마음속이 간질거렸다. 청혼까지 포함하여 딱 네 번 본 남자가, 그녀가 원하는지도 몰랐던 말들을 해 주고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서러운 기억들이 울렁이고 일그러졌다. 백작가에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움츠러들었던 기억, 아버지 앞에서 늘 존재만으로도 죄인이었던 기억, 웃고 떠드는 자매들 사이에서 눈치껏 사라졌던 기억.
특별한 사람이라니. 이유를 모르는 다정함이라고 해도 간직하고 싶었다.
이 모든 상냥한 말들이 그녀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계략이라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이제 나랑, 그대는 가족이라고 했잖아요.”
“…….”
“이 세상에서 우리 단 둘만 할 수 있는 행위를 했잖아요.”
그래서 이베카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명료하게 대답했다. 그의 포장된 말을 정말로 믿기는 어려웠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런 말이라도 해 주는 사람도 지금껏 그녀에게는 없었다.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녀의 주저 없는 대답에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내가 아무리 보호해 준다고 해도, 많은 비난을 살 거예요. 산하기관을 개편한 이브나도 그 당시엔 굉장한 반발에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래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베카는 가진 것을 내려놓는 사람의 판단은 대체로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처음부터 그의 말을 듣자마자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저는 저를 믿어요.”
모처럼 듣는 이베카의 발랄한 말에, 다니엘은 가만히 이베카를 바라보았다.
“수사국에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기관에 전입할 때, 본인의 희망으로 발령내 준다 들었어요. 전혀 관심도 없던 법무국에 있는 걸 보면, 저 역시 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나 보죠.”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 기억도 없는 4년 동안의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 거꾸로 말하면 지난 열여덟 해가 그녀에게는 지옥과도 같았다는 뜻이다. 왕비가 되었다며 으스대고 자랑해도 모자랄 판에 그녀는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당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언제나 당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었다.
“알 수 없지만, 전하와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같은 길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게다가 전 정말로, 어딘가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일을 맡기셔서 도리어 안심이 돼요.”
짧은 어스름도 모두 지고, 어둠이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베카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싱긋 웃었다. 아무리 복잡한 왕이어도, 남편보다는 동료에 가깝다고 해도, 이베카는 아무래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에게 어려운 일을 맡겼지만, 그만큼 그녀를 믿고 인정해 준다는 뜻 같아 잘하고 싶었다.
사흘 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어린 시절의 비밀 통로까지 그녀를 안내하는 남자라면 충분히 상냥했다. 가족이 되어 준다고 했고,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당당하라고 말해 주었다. 남들이 모두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해도 그녀는 왕의 배려가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