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베카는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오늘은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윌은 더 이상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이베카는 자신이 너무 많은 말을 했나 후회되었다. 그는 일어서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예를 표하고 인사치레로 말했다.
“오전의 회의에서 전하의 곁을 지키는 안리크를 보았습니다. 그래도 궁에 옛 친구가 있으니 다행입니다.”
에윌은 이베카가 안리크를 좋아했던 것을 전혀 몰랐다. 그저 백작저에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 성년이 되자마자 뛰어난 무술을 인정받아 왕궁에 들어간 호위무사 정도로 생각했다. 이베카는 그의 말에 차분하게 답했다.
“음, 볼 일이 없었어요.”
“전하께서 늘 데리고 다니지 않으십니까? 어지간하면 늘 대동하시는데. 문 밖을 지키고 있었나 보군요.”
“네? 제 궁에 오시면 당연히 안리크는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저는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럴 리가요. 호위무사는 언제나 지척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히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첫사랑이라고 할지라도 결혼을 한 이상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는 것은 죄악이다. 게다가 안리크는 그녀를 이미 거절한 전력이 있는 상대였다. 일관적인 따뜻함을 퍼붓고 있는 남편에게 마음은 이성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금방 옮겨갔다.
그러나 다니엘은 다른 여자가 준 펜을 멀쩡히 품 안에 품고 다니는걸. 심지어 자신에게 청혼할 때에도 그 여자를 찾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억지로 생각을 멈췄다.
“잘 지내십시오.”
이베카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왠지 아버지가 그녀를 다시 찾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보다 에셀번에 쓸모없게 되었구나, 라며 가는 길에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
에윌이 빠르게 떠난 후, 이베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젠, 가족이잖아요…….”
그녀는 오늘 어쨌든 하나의 중대한 선택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 결혼의 이유를 몰라 가족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이라고 다니엘이 말한 순간을 몇 번이나 더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짙은 푸른색 펜에 새겨져 있던 ‘E. J.’라는 이름이 무겁게 자신을 내리누르는 듯했다.
노을이 질 때 즈음에 또다시 다니엘이 찾아왔다. 왕실 족보는 더 이상 외울 필요가 없다는 다니엘의 말을 충분히 받아들여, 이베카는 그대로 왕실 족보를 치우고 법전을 읽고 있었다. 다니엘은 홀로 들어와 그녀의 앞에 앉아 싱긋 웃었다.
“왕궁 구조와 일하는 사람들의 위계, 기본 예법 등은 다 외우셨나 봅니다.”
“네. 가정교육 받았던 내용과 꽤 많이 겹치기도 하고, 대학 때 공부하던 양에 비하면 많지도 않던데요.”
이베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한 번도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그녀의 궁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의식했다. 그렇다면 안리크는 저 문 밖에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에윌이 지적해 준 이후에야 알았다.
아내의 첫사랑을 문 밖에 두고 그녀를 안는 기분은 어땠을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어차피 아이를 낳기 위한 행위니까?
그제야 이베카는 그녀의 남편이 생각보다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앞에서 다른 여자가 준 펜을 버젓이 쓸 정도의 남자였다. 비밀과 침묵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그럼, 이 법전은…….”
“법무국으로 옮긴 지 이제 한 달이거든요. 아직은 일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시도 때도 없이 살펴봐야 해요.”
“그렇군요.”
다니엘이 푸른 눈을 휘어 보이며 웃었다.
“잘 할 겁니다.”
“……아, 네, 뭐.”
다정하고, 상냥하며 눈을 보고 웃어 주는 친절한 왕. 어조가 상냥하고 정중한 남자. 잠자리에서 달콤한 말을 속삭여주고 몇 번 본 적도 없는 자신을 북돋워 주는 사람. 그러나 이베카는 종종 이상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가 보여 주는 호의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대당한 기억과 실패 경험만 있는 열여덟은 얼마나 이용하기 좋은 대상일까. 호랑이와 여우같은 귀족들도 능숙하게 다루는 그에게 이베카의 머릿속은 환히 보일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이 낯선 다정함이 좋아서, 그녀는 오늘 에윌의 제안을 거절했다.
“법전 보는 것이 급하지 않으면, 또 다른 비밀 통로를 가르쳐 줄까요?”
“네.”
이베카는 냉큼 법전을 덮었다. 당연히 지루한 법전을 보는 것보다는 어디론가 나가는 것이 좋았다.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한 번에 가는 길은 없어서 많이 돌아가야 해요. 편한 신발을 신어요.”
“어디를 가는데요?”
“좋은 곳.”
그녀는 손에 잡히는 그의 체온이 좋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연결되어 있는 느낌. 생각해 보니 그 누구와도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안도가 되고, 모든 불안감이 뒤로 밀려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으로 느껴 본 맹목적인 다정함이라서 그런가, 안리크에게 느꼈던 절박함과는 다른 방향의 안정감이었다.
그를 따라 어제와 같이 벽에 있는 그림을 밀어 캄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중간부터 경로가 달랐다. 왼쪽,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방향을 외우던 그녀는 한 번 놓치고 나서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너무 빨라서 중간에 잊었어요.”
“제 침실로 오는 길은 외우고 있지요?”
“그건 외웠지만 오늘 길은 이미 놓쳐서…….”
“그럼 괜찮아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산뜻했다. 아니, 잊어도 괜찮은 거라면 애초에 왜 가르쳐주겠다고 한 건가. 왕에게 어디까지 불만을 표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던 그녀는 갑자기 튀어나온 연회장에 잠시 놀랐다.
아무런 연회도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연회장은 어두운 데다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의 손을 이끌어 2층 계단을 올랐다. 문득 그녀는 그들에게 붙은 호위무사들이 전혀 없다는 것을 상기해 냈다. 모두 다 이베카의 궁 밖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또 다시 익숙하게 그가 눈앞의 정물화를 하나 밀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이베카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곳에서 결혼식 이후 그와 춤을 추었다. 그러나 이런 비밀길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고, 그녀가 그를 따라 숨이 헉헉댈 정도로 높은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
왕궁의 지붕 위였다. 다니엘은 능숙하게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번영한 수도 아메니티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법무국 건물과 수사국 건물, 저 멀리에 있는 에셀번 백작가의 저택까지 손톱만 하게 시야 안에 들어왔다.
“어릴 때 아셰와 돌아다니다가 찾은 비밀 통로인데, 어린 시절 이후론 처음 오네요.”
시원한 바람이 그의 금발을 쓸었다. 거리에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작게 보여 재미있었다. 이베카는 홀린 듯이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대뜸 물었다.
“왜 저를 데리고 이곳에…….”
“왕비가 답답할까 봐.”
“……네?”
“자유롭게 살았을 텐데, 삼 일째 궁에 갇혀서 갑갑할 것 같았어요. 특별 휴가인데 좋은 곳도 못 데려갔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바쁘고 중요한 시기라 자리를 비우기가 힘들어서. 이해해 줘요.”
“아, 네.”
이베카는 지붕에 올라와서도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다니엘의 옆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의 속눈썹이 그림처럼 길었다.
“앞으로도 자유가 없을 겁니다. 예전처럼 법무국에 출근하더라도, 늘 호위무사들이 곁을 지키고 있을 테고.”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자마자, 그녀에게 기본적으로 셋의 호위무사가 붙었다. 켄타, 메리엔, 에스더라는 이름의 호위무사들은 지금도 그녀의 궁 앞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호위무사를 배정할 때, 다니엘은 그녀에게 더 많은 수를 붙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녀가 거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호위무사 없이도 스스로를 지킬 자신이 있었다.
“내 욕심으로 그대를 곁에 둬서 미안해요.”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가 살짝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왕비로 둔 것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다는 진심만큼은 마음에 다가왔다. 노을은 이미 다 졌고, 그녀의 눈빛만큼이나 깊은 보라색으로 어스름이 아메니티 전경을 완전히 물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든 감정은 복잡한 상황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왕비로 두면 두었지 미안할 것은 무엇이며, 동료로 두면 두었지 이렇게 배려할 것은 또 무엇인가. 차라리 왕비로 이베카를 선택한 이유를 건조하게 말해 주고, 그를 시행하라고 명령해 주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이렇게 믿을 수도 없는 호의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은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만 했다.
그러나 차마 국왕에게 따져 묻지는 못한 채로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전하, 제가 해 드려야 하는 일이 뭐예요?”
“…….”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왕비로서 법무국에서 해야 할 일이요. 그것 때문에 저와 결혼하신 거잖아요. 빨리 말씀해 주시는 게 마음이 편해요.”
다니엘은 살짝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으로 많이 바빠질 테니, 조금 쉬기를 바랐는데.”
“쓸모를…… 쓸모를 증명하고 싶어서.”
“……이베카. 쓸모라니?”
이베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에셀번 백작의 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는 탄생부터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고 평생을 ‘에셀번’이라는 이름에게 죄진 느낌이었다.
다니엘이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든, 흑발이 금발로 변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다. 그녀는 이번엔 새로운 가족에게 떳떳하고 싶었다. 얼른 결혼의 이유를 만족시켜 주어, 에셀번 백작에게 ‘이제 다니엘 전하와 저는 가족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를 선택해 주신 전하께 당당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