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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8화 (8/79)

8화.

“저희는 진심으로 다니엘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적절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왕비님…….”

레이나가 싱긋 웃었다.

“새삼스럽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셔야 해요.”

마치 오래된 친구에게 건네는 것처럼 가벼우면서도 이상한 울림이 있는 인사였다.

“레이나.”

이베카는 눈을 잠시 내리깔고 있다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 알고 있죠?”

“……예?”

“수사국에서의 나를 알고 있죠?”

“……왕비님, 잊으셔야 하는 시절이라고 이미 말씀드렸…….”

“백작가에서는 왼손잡이인 걸 들키기 싫어서 무조건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게 편했거든요.”

레이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베카가 펜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눈을 깜빡거렸다.

“수사국에서는 편하게 왼손으로 썼나 봐요, 그렇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발…… 수사국 시절의 나를 좀 알려 주면 안 될까요?”

이베카는 나름 간절했다. 지난 18년의 인생이 극도로 불행했기 때문이다. 레이나는 한숨을 쉬며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법무국 직원 다 되셨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를 찔릴 줄 몰랐군요. 왕비님, 그러나 그 시절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베카는 속삭이듯 아랫입술을 물었다. 레이나는 이베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 시절에 그토록 집착하시는지요?”

“저는 본디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민폐였어요. 하지만…….”

“…….”

“거기서는…… 거기서는 적어도…….”

목소리에 간절함이 잔뜩 담겼지만, 이베카는 울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저녁 메뉴가 어땠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고, 마주치면 밝게 인사하는 정도의 사람들만 좀 있었어도……. 그냥, 나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 몇 명만 있었어도.

그 정도면 이베카는 만족했다.

“평범한…… 구성원이었을 거 같아서, 전 그거면 행복할 것 같은데요.”

레이나는 잠시 정적을 지켰다. 눈앞의 왕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으나 표정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둥지에서 막 떨어져 나온 아기새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왕가의 구성원이십니다.”

이베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왕가의 구성원? 다니엘은 그녀에게 법무국의 일과 후계를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진행된 결혼에 의도가 없을 리 없었고, 그녀는 아직 자신이 평범한 왕가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베카의 삶에서 평범한 구성원이 되려면 언제나 조건이 필요했다. 부모 자식 간에는 혈연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했고, 수사국에 들어가려면 대학을 거쳐 높은 성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아직 그녀는 다니엘의 조건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녀가 조건을 갖추고 비로소 가질 수 있었던 소속감은 수사국뿐이었다.

다소 시무룩한 이베카의 얼굴을 바라보며 레이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수사국에서의 왕비님은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이성적인 직원이었습니다. 유능하고 믿음직스러워서 동료들의 사랑도 많이 받았지요. 기억을 지우기로 선택한 사람은 왕비님 자신입니다. 그러니 그때의 선택을 믿으세요.”

이베카는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차라리 그저 그렇게 잘 지냈다고, 평범한 직원이라고 했다면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레이나의 말처럼, 그녀가 정말로 수사국에서 잘해 냈다면 스스로 기억을 지웠을 리가 없다.

역시 어지간히 큰 실수를 저질렀거나 열여덟으로 돌아오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을 만큼 괴로웠던 것이 틀림없었다.

“왕비님, 그리고 반말을 쓰시길 바랍니다.”

“……전하도 존대를 쓰시는걸요.”

“그건…….”

그건 특이사항이라고 말하려던 레이나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베카의 표정이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너무 어두웠던 것이다. 문득 레이나는 이베카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것 외에는 제대로 웃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눅 든 채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불안한 이베카의 보랏빛 눈은 세세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촘촘한 추론을 만들어 낸다. 자신이 무심결에 그녀의 왼손에 펜을 건넨 걸 바로 알아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바로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적절한 때에 부탁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침묵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그 동안 사람에 대한 불신 역시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즉, 이베카는 자신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무언가를 참는 것에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조용해 보이지만 아무도 안 믿고, 그 무엇도 놓치지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레이나는 살짝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열여덟 해 동안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 * *

노을이 붉은 빛을 궁 안에 드리울 무렵 다니엘이 이베카를 찾아왔다. 테이블 가득 왕실 족보를 펼쳐놓고 외우던 그녀는 재빨리 일어서 완벽한 자세로 예를 표하고 찻잔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차는 괜찮아요.”

부드럽게 달라붙는 체온에 이베카는 흠칫 놀랐다. 하루 종일 생각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와 어젯밤 했던 일이 거짓말처럼 떠올랐던 탓이다. 온몸이 화끈거릴 정도로 좋았던 기억이 부끄러움과 함께 몰려왔다.

“열심이네.”

그가 테이블에 펼쳐진 빽빽한 족보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베카는 이제 세 번째 보는 그녀의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젊은 국왕.

그녀는 여전히 이 결혼의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다 외울 필요 없어요. 쓸데없는 것들이지. 이천 개도 넘는 이름을 다 외워서 뭐 할 건데요?”

“……네?”

“과거를 인지하되 매이면 안 되니까.”

다니엘은 생각에 잠긴 푸른 눈으로 빼곡한 글씨들을 훑었다.

“본디 왕족은 불안하면 미래보다 과거를 보는 법입니다.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어렵지만, 과거의 영광을 내미는 건 쉬우니. 하지만 쉬운 길은 언제나 도태를 낳는 법이지.”

문득 이베카는 아까 레이나의 말을 떠올렸다. 이 시대에 적절하신 분이라고. 그런 사람이 최근 4년의 기억조차 없는 그녀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니엘이 화려한 재킷 안쪽에서 펜을 하나 꺼냈다. 고급스러운 남색 펜이었다. 평범한 펜이었으나 그녀의 눈빛이 멈춘 것은 문 상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메니티에서 가장 큰 상단이며 그녀 역시 대학 시절에 문 상단의 문구류를 많이 썼었다.

“이것만 외우시면 됩니다. 왕비는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까.”

다니엘은 거침없이 펜으로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쳤다. 이베카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100년 전 산하기관의 체계를 세웠다고 알려진 이브나 왕비와 그녀를 발굴한 카를 왕.”

이브나 왕비를 모르는 사람은 아메탄 왕국에 아무도 없었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위대한 마법사였던 이브나는 아메탄 왕궁과 산하기관에 엄청난 마법의 축복을 내렸다.

그녀가 산하기관의 독자성을 보장해 주고 평민의 등용문을 넓혀 전문적인 일 처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아메탄을 100년간 부유하게 해 준 가장 큰 요인이라고 손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력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법 위주의 신분제, 제국을 따르는 왕정주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 바치자고 주장했던 나의 첫째 형, 윌리엄.”

“…….”

“마법 대신 기술의 개혁을 주장하고, 반란군의 편을 들어 제국을 버리자고 주장했던 둘째 형, 루벤.”

마지막 다섯 번째의 동그라미는 ‘다니엘 라타니스 아메탄’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공물은 보내지만 마법을 신뢰하지 못하여 기술국을 세운 나.”

“음…….”

이베카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아셰 왕녀님은요?”

“그 애의 속은 아무도 몰라. 그러니 의미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베카는 순간 틀어진 펜의 각도에서 ‘E. J. 로부터’라는 음각을 보았다.

E. J.? 순간적으로 이어지는 추론을 막을 수 없었다. 늘 품고 다니는 펜은 둘 중 하나다. 잃어버려도 괜찮은 것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소중한 것이거나.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이 분명한 저 펜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그 펜이 문 상단의 기성품이라는 점이었다. 귀한 사람이 그것도 왕족에게 선물했다면, 아무리 고급품이라도 아메니티 거리에서 흔히 살 수 있는 기성품보다는 맞춤식 펜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펜을 다시 품속에 넣고 싱긋 웃었다. 이베카는 그의 미소가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도, 하늘처럼 푸른 눈동자도, 노을에 비쳐 반짝거리는 금발도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니 족보는 그만 외우고…….”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다른 걸 외우러 가요.”

“다른 거요?”

다니엘은 그녀의 손을 이끌고 화려한 침대에 올라갔다. 이베카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였지만, 다니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옆 벽면에 걸린 그림을 옆으로 밀었을 때에는 너무 놀라 숨조차도 멈추었다.

“이건?”

“왕궁에는 비밀 통로가 아주 많습니다. 유사시에 몸을 대피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정확한 길은 왕족들밖에 모르고, 잘 외우지 않으면 평생 헤매다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잘못된 길에는 함정도 많으니.”

“아.”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캄캄한 길을 걸었다. 빛이 하나도 없어서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다. 그러나 손으로 연결된 체온은 따뜻했고 믿음직스러웠다.

‘전하의 현명함과 신중함을 믿습니다. 적절한 맺고 끊음과 희생을 인지한 결단력을 신뢰합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이베카는 그에 대해 몰려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조합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호위무사인 안리크는 그가 그녀를 이용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될 자라며 못을 박았다. 그리고 수사국의 레이나는 그를 현명한 주군이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아내인 자신은 어떻게 그를 판단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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