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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7화 (7/79)

7화.

다니엘의 말처럼 그녀는 법무국에 출근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바빴다. 일단 그녀에게 붙은 호위무사와 시녀들의 이름을 외워야 했고, 시녀가 가르쳐 주는 궁의 구조와 왕족의 계보를 머릿속에 쑤셔 넣어야 했다. 그녀가 아무리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해도 양이 워낙에 많아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왕가의 족보를 외우고 있는데, 심지어 오후에는 수사국 직원이라는 여자까지 하나 왔다.

“4년간의 기억이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검은 수사국 제복을 입은 여자의 이름은 레이나 에르베트였다. 키가 크고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레이나는 시원시원한 말투로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왔습니다. 왕비님은 민간인보다는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셔야 하니까요.”

이베카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자신 역시 기억에는 없어도 수사국 출신이다. 한때 같은 제복을 입고 함께 근무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에셀번 백작가에서 뛰쳐나온 그녀는 그 곳에서 자유롭게 행복했을까? 결국엔 그렇지 못했으니 돌아왔겠지만, 적어도 그 시간 안에는.

하나. 아메탄 왕국의 번영과 안녕을 최우선의 가치로 둔다.

하나. 아메탄 왕에게 충성하고 최선을 다해 보호한다.

하나. 개인의 안위에 눈이 멀지 않으며 조직의 판단을 믿는다.

하나. 동료를 소중히 여기며 죽음 앞에서도 서로 지키고 신뢰한다.

하나. 지켜야 할 비밀에 대하여 늘 자기 자신을 유의한다.

수사국에서의 기억은 모두 지워졌으나 동기들과 함께 수사국의 강령을 외우던 순간만은 남아 있다. 강령은 135개나 되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우선되는 다섯 가지는 특히나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이베카는 다소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레이나, 수사국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저를 아세요?”

“반말을 쓰세요, 왕비님. 저는 아랫사람이니.”

“어…… 그, 그건…… 천천히…… 천천히 할게요. 그런데, 수사국 시절의 저는…….”

“……잊으셔야 하는 시절입니다.”

레이나는 그녀의 절박한 말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감시보다 망각을 선택하신 건 왕비님이십니다. 이유가 있으실 겁니다.”

결국 알려 주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베카는 가만히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레이나는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더 이상 사적인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듯이 굉장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마침 왕가의 족보가 여기 펼쳐져 있네요. 짚으면서 설명하기 좋겠어요. 필기하시려면 필기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레이나는 펼쳐져 있는 왕가의 족보를 보며 반색을 하더니, 제복 안에서 펜을 하나 꺼내 이베카의 왼손에 쥐어 주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사실 아직 절반도 못 외웠어요.”

“설명을 다 할 생각은 없어요. 아, 혹시나 저를 못 믿으실까 싶어 하는 말인데 저는 족보 정도는 다 외우고 있답니다. 수사국 입사 성적 엄청 높은 거 아시죠? 훨씬 더 복잡한 것도 다 외워요.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에요.”

눈을 찡긋해 보이는 레이나를 보고 이베카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4년 전에 맞춰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선대인 제펠탄 전하께서 1왕자인 윌리엄 태자님, 루벤 2왕자님, 다니엘 3왕자님, 아셰 4왕녀님을 두신 것은 알고 계시지요?”

“아예 모르지는 않아요.”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진지는 법무국 직원들이 하도 ‘최종 재판’ 이야기를 몇 번씩이고 해서 다 알고 있었다. 보수파였던 윌리엄과 개혁파인 루벤이 서로 대립했다. 그 상황에서 아셰 왕녀가 윌리엄 태자를 독살하고 루벤의 친모인 테스티 왕비의 악행이 밝혀져 3왕자였던 다니엘이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폭풍 같은 왕위 쟁탈전이었다. 대체 피를 얼마나 본 것일까. 그 와중에 존재감이 없었던 3왕자는 아무도 죽이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아메니티에 마력이 사라졌던 7일은 아세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마력이 사라졌고, 서서히 돌아왔다고.”

“일반인은 그렇게 알지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왕비님이 더 정확한 진실을 알기 원하셔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대륙의 마력이 사라지는 것은 어차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4년의 시간을 뛰어 넘었을 때 가장 먼저 피부로 느낀 차이가 마력의 저하였다. 깜짝 놀랄 만큼 마법이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토록 속도가 가파를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마법을 잘했던 그녀는 약간 박탈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제국의 내란은 알고 계시지요?”

“이단 2황자가 임시 총독으로 반란군을 이끌고 있다면서요. 핏줄에 이어지는 마력의 힘을 끊고 공화정을 수립하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공화주의 사상의 바탕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잘 몰라요.”

“스타람 섬의 ‘리한 카드민’이라는 예술가가 쓴 ‘나의 공화주의’라는 책이 모든 공화주의 사상의 바탕입니다. 현재 아메탄에서는 금서죠.”

아메탄은 왕정 국가였다. 당연히 공화주의 같은 위험한 사상을 허용할 리 없었다. 이베카는 이제 모르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오른손으로 펜을 바꿔들고 족보의 구석에 ‘리한 카드민’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리한 카드민이 아메탄 왕국에 망명할 때 국경이 혼란스러워졌고, 그 틈에 이단 2황자가 넘어와 아메탄 왕궁에 일주일간 비밀리에 보호 요청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니엘 전하께서는 리한 카드민과 이단 2황자를 모두 다 자비롭게 받아주셨지요.”

“아.”

“그런데 이단 2황자는 한 달간 아메니티의 왕궁에 머물며, 그 빌어먹을 황족의 핏줄을 이용해 아메니티의 마력을 일주일 동안 끊어 버리고…… 감금되어 있던 아셰 왕녀님을 임신시켰습니다. 아셰 왕녀님이 멀리 떠나신 것은 그 때문이고. 모두 다 일반인은 전혀 모르는 사안입니다. 왕비님 역시 에셀번의 핏줄에게까지도 숨겨야 할 비밀입니다.”

이베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레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리한 카드민은요?”

“제국의 황제가 불러 제국에 파견을 나갔고, 그때 반란군에 합류했습니다.”

“어…….”

너무하다는 생각에 이베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외국인 남자 둘이 망명과 보호를 요청해서 다니엘이 자비롭게 받아주었는데 둘 다 뒤통수를 쳐 버렸다고? 그녀의 분노를 느꼈는지 레이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사국에서는 이 모든 일이 이상하다고 판단하여, 독자적인 결정 아래 리한 카드민이 제국에 파견될 때 직원을 함께 보내 암살을 도모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왜요? 실력이 좀 부족한 애를 보냈나요?”

그녀의 진지한 질문에 레이나는 푸흡, 하고 한번 웃어 보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이베카의 눈을 보며 레이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애가 저와 굉장히 친한 동료였기 때문에 문득 딴생각이 나서…… 루카스 수사국장님께서 직접 단독 파견을 명하실 만큼 실력이 출중했습니다.”

레이나의 말에 문득 그리움이 깃들었기 때문에 이베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국에 파견되어 암살에 실패한 그 직원은 어떻게 되었을까?

“저희가 간과한 것은 전쟁 중인 제국 땅에 마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 리한 카드민이 생각보다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점이었죠.”

이베카는 보랏빛 눈으로 레이나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그 직원은 어떻게 됐어요? 제국은 전쟁 중이고, 리한 카드민은 살아 있는 거잖아요. 암살에 실패했으니 돌아오지 못했나요?”

“글쎄요.”

레이나는 모호하게 대답하고,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지금은 4년 전에 비해 상황이 몹시 복잡합니다. 마력이 사라져 스타람의 밀수품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다니엘 전하께서는 밀수업자들을 모두 인정하시고 기술국을 세웠습니다. 슬슬 쓸 만한 것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요.”

“밀수업자들을 인정했다고요? 국가에서?”

“긴급한 사안이었으니까요.”

“그럼 정당하게 장사를 해 온 상단들은…….”

“네?”

레이나의 반문에 이베카는 다소 주눅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법을 지킨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보다 대우받는 게…… 불합리한 것 같아서…….”

이제 왕가의 사람인데 너무 비난하는 것처럼 말했나. 왕비는 이런 발언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생각이 많아진 이베카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지만, 어쨌든 문장을 마무리할 수는 있었다. 아무리 왕명이 언제나 법에 우선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규칙이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레이나가 싱긋 웃었다.

“왕비님.”

“네?”

“법무국 직원 다 되셨네요. 옮긴 지 한 달이라고 들었는데.”

“…….”

“전하를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 저를 보내신 이유일 겁니다.”

훤칠한 키의 레이나는 그다지 딱딱한 성격도 아니었고 웃음도 많은 편이었으며 예의가 아주 바른 편도 아니었다. 이베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수사국의 딱딱한 이미지와 묘하게 어긋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이상하게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 가끔 주제를 짚는 어조는 단호했다.

“갑작스럽게 왕이 되셨고, 지지기반은 없었습니다. 재위 초기에 갑자기 너무 많은 선택이 몰아쳤으며 그 선택에는 만만치 않은 이득과 손해가 동시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전하를 믿지 못하여 독자적인 판단으로 리한 카드민의 암살을 결정한 저희 수사국조차도 지금은…….”

레이나는 이베카의 보랏빛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국가의 방향성에 관한 한, 전하의 현명함과 신중함을 믿습니다. 적절한 맺고 끊음과, 희생을 인지한 결단력을 신뢰합니다. 그 모든 일을 적절히 포장하는 선량함과 다정함까지.”

이베카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지금의 아메탄을 전혀 모르고 있는가 생각했다. 아메탄은 그녀가 태어나서부터 열여덟까지는 별로 변하지 않았으나, 최근 4년간 하루가 다른 변화의 물결을 그대로 체감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물결 속에서 방향키를 홀로 잡은 다니엘은 얼마나 외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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