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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이유-3화 (3/79)

3화.

이베카는 수사국에 입사해 수사국의 강령을 외우고 첫 교육을 받던 순간 이후 4년간의 기억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왕위와는 멀다고 생각했던 3왕자 다니엘이 왕위에 올랐고, 제국의 내란은 몹시 심각해졌다. 게다가 마력은 심각하게 줄어서 전기를 연구하기 위해 기술국이라는 새로운 산하기관도 생겼다.

문제는 그녀가 대체 왜 수사국에서 법무국으로 옮겼는지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은 멀쩡히 수사국을 잘 다니고 있다가 왜 기억을 지우는 선택까지 하면서 법무국으로 옮겼을까.

법무국은 TO도 거의 나지 않는 소수로 이루어진 특수한 산하기관이다. 보통 기억이 지워지는 수사국 직원들이 선택하는 산하기관은 정보국이다. 그런데 왜 그녀는 법무국 전입을 선택했을까. 그 동기마저도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토록 바라던 수사국에 들어가고 나서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은 그녀를 상당히 슬프게 했다. 어찌되었든 탈출하고 싶었던 백작가 영애의 삶보다는 나았을 텐데, 그 삶이 통째로 인생에서 사라지고 또 다시 열여덟으로 돌아왔다.

반쪽짜리 인생을 가지고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지금, 왕비가 된다고? 그것도 오늘 처음 본 국왕과?

하지만 그녀는 거부할 정도의 위치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딱히 저항할 이유조차 없었다. 법무국에서 계속 일하게 해 준다는 조건은 마음에 들었고, 어차피 그녀는 다니엘이 아니라면 딱히 마음에 들지도 않는 텔시 집안의 남자와 결혼해야 했다.

이아크 텔시라는 그녀의 약혼자는 백작가의 약혼 제안에 그대로 외교국을 그만두었다고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수단화시키는 그 남자의 목적이 눈에 보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차피 사랑해서 결혼하는 경우를 포기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다니엘의 말마따나, 어차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니엘이나 이아크나.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에셀번 집안이 자신을 받아들여 줄 수도 있다. 이베카는 잔인하게 일렁이는 희망을 어쩌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에셀번으로 커서 다행이라고, 버리지 않은 값은 한다고 아버지가 생각할 수도 있었다. 왕비의 위치를 갖고 있다면 가족들이 그녀를 인정해 줄 지도 모른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안리크였다.

‘난 안리크 네가 좋아.’

왕비가 된다면 다니엘의 호위무사인 그를 궁에서 매일 보게 될지도 몰랐다.

‘너도…… 너도 날 좋아하잖아. 아니야?’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안리크를 마음에 두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였던 유일한 친구이자 첫사랑인 안리크. 그건 그를 포기하고, 정해진 혼사에 반항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른 문제였다.

‘너는 에셀번 백작가의 귀족 영애고, 집안에서 맺어 준 혼처와 당연히 결혼해야 해.’

잃어버린 4년 동안,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제발 나를 은혜도 모르는 놈으로 만들지 마.’

수사국에 들어가기 바로 전에 어렵게 했던 고백의 답은 차가웠다. 그녀의 현재 나이는 스물 둘. 그러나 열여덟까지의 기억이 여전히 이토록 선명한데, 마음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여덟에 최연소로 왕립마법대학을 졸업하고 성년과 동시에 수사국에 들어갔다. 귀족가 여식 중에서 그런 성장 과정을 겪은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차피 생각한다고 해서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날 밤, 에셀번 백작가에 손님이 왔다. 믿을 수 없게도 안리크였다. 백작가 내외와 간단한 인사를 한 그가 이베카에게 정원 산책을 청했다. 밤공기는 쌀쌀했지만 어디 들어가자는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들은 작은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너, 이렇게 마음대로 와도 돼?”

“휴가를 썼어.”

“열흘에 하루라고 하지 않았어? 그걸 이 밤에 쓰다니 아깝다. 아침부터 썼어야지.”

이베카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리크는 이 집에서 그나마 그녀가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 아마 가족이 아니라, 백작부인이 거둔 고아라서 그랬겠지.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으려고 할 때, 안리크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래 있지 못해. 수사국에서 붙었을 거야.”

“응?”

“넌 이제 왕비가 될 몸이고, 네가 날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수사국에서 알고 있어. 물론 전하께서도.”

그녀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녀가 더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안리크는 낮게 말했다.

“널 오랫동안 봐 왔던 친구로서 조언할게. 왕비 자리는 거절하는 게 좋겠어.”

“……응?”

“네게 좋은 자리 같지 않아.”

“넌 전하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 호위무사야. 그런 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해?”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 진심이야.”

안리크의 표정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굳어 있었다. 이베카는 가만히 발걸음을 멈추고 후원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안리크에게 단검 던지기나 활쏘기 같은 것을 배웠다.

안리크가 그녀의 옆에 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짧은 갈색 머리에 커다란 풍채를 가진 그의 입이 굳게 일자로 다물려 있었다. 이베카는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집안에서 맺어 준 혼처와 결혼해야 한다는 건 네 의견이었어. 물론 이젠 나도 동의하고. 아버지는 날 당연히 왕비 자리에 넣고 싶어 하실 텐데. 게다가 전하는 좋은 분이셔. 상냥하고, 다정하고, 자비로우신…….”

“……옛날 얘기야.”

“응?”

“가까이서 본 내가 가장 잘 알아. 아메니티에서 마력이 사라졌던 그 일주일 이후 전하는 많이 변하셨어. 동생인 아셰 왕녀님을 보내고 난 뒤 더 차가워지셨고. 물론 겉에서 보기에는 똑같을지 몰라도…….”

이베카가 더 이상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아메니티에서 마력이 사라졌던 그 일주일’에 대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절대 마냥 착하신 분은 아니셔. 오히려 나는 이전에 모시던 윌리엄 전하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다정함, 상냥함, 선량함, 이런 평가를 가진 자가 원래 더 속을 알 수 없어 두려운 법이야. 그런 건 아무나 쓸 수 있는 가면이 아니거든. 위악보다 힘든 것이 위선이야.”

“……왕족모독죄야, 안리크.”

“다니엘 전하는 한 번도 유약했던 적이 없으셨어. 다만 왕자 시절에 그다지 왕위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다들 그 두 사실을 헷갈려 하더군.”

“그래도…… 왕궁이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적어도 혼자 검은 머리는 아닐 것 아냐.”

이베카는 냉정하게 말했다. 자신을 언제나 냉담하게 지나치는 아버지,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고개를 돌려 버리는 어머니,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건네지 않는 자매들, 대놓고 차별하는 하인들…… 그녀는 이곳에서 존재만으로도 언제나 모두에게 죄송해야만 했다.

백작저에 누군가 손님이라도 있으면 그녀는 속이 좋지 않다고 하며 방에 틀어박혔다. 배가 고파도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대놓고 눈치를 준 사람은 없었으나 알아서 눈치를 봐야 했다.

“이브.”

그가 어릴 적부터 그녀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냉소적인 농담으로 말을 돌리던 이베카는 자신의 숨마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하는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다 아시면서도 널 왕비로 부르셨어. 정상적인 상황이 아냐. 널 이용하시는 것…….”

“그건 당연하지.”

이베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럼 전하가 자선 사업이라도 하려고 나를 데려가실까.”

안리크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베카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경계했고, 거기에는 남편이라는 위치의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된 데에는 신분 차이를 핑계로 그녀의 마음을 거절한 자신의 탓도 있는 것 같아 안리크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용하셔도 괜찮아. 아니, 난 사실 오히려 나를 이용할 여지라도 있다고 생각하면 더 마음이 놓여.”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가족들이 자신을 이용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에게 그 어떤 효용도 없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아마 왕비 자리에 앉는 것이 그녀가 에셀번 집안에 처음으로 증명하는 ‘쓸모’일 것이다.

“……너 말고도…….”

안리크는 아주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그녀의 귀에 대고 굉장히 작게 속삭였다.

“과거에 아끼던 여자가 계셔.”

이베카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본 안리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상당히 깊은 관계였고, 심지어는 예전에 사라진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녀를 찾고 계시지. 넌 그저 이용당하기 위해 허울뿐인 왕비가 되는 거야. 심지어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전하의 호위무사를 좋아했다는 사실 때문에 넌 전하께 하나 약점을 잡힌 채로 가는 거고. 어쩌면 그것까지도 계산하셨을 것 같아 나는 두려워.”

“…….”

“네게 전혀 좋은 자리가 아니야. 이브, 부디 거절해.”

그녀는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가만히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당연히 그녀에게 갑자기 좋은 혼사 자리가 기적처럼 나타날 리가 없었다. 약점? 약점…… 그녀는 평생 그 약점에 쫓겨 살았다.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건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아크 텔시보다는 국왕 전하께 가는 것을 아버지가 더 좋아하실 거야.”

“……뭐?”

“거절하면…… 아버지가 실망하실 거라고.”

그녀의 보랏빛 눈은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안리크는 그 말에서 그녀의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보았다. 아버지…… 에셀번 백작은 자신을 조금도 닮지 않은 그녀를 단 한 번도 딸로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나오는 것이 싫고, 공작가인 백작 부인의 친정을 의식했기 때문에 그저 ‘놔두기만’ 한 것이다.

옆에서 자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날 때부터 스스로를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그럼에도 차마 말 한마디 걸지 못하는 가족들을 간절하게 여겼다.

“이브, 제발. 네 인생이야. 백작님이 뭐가 중요해?”

“내 인생 살겠다고 집을 나간 결과가 뭔데.”

이베카가 차갑게 대꾸했다.

“결국 실패를 인정하고 되돌아온 것밖에 더 돼? 수사국에서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실패했으면 기억까지 지우고 내 발로 이 끔찍한 집에 다시 들어와?”

“이브.”

“이게 내 인생이야.”

그녀의 말에 좌절감이 섞인 것을 보며 안리크는 애꿎은 검만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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