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네?”
이베카는 너무나 차분한 국왕의 말에 제대로 된 반문도 하지 못했다. 무슨 국혼을 열흘 만에? 게다가 그는 그녀의 의사를 묻지조차 않았다. 그저 약혼자를 사랑하느냐, 같은 어이없는 질문을 던져 놓고 능구렁이같이 혼사로 주제를 넘겼다.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하고 싶은 말을 짐작했는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까 귀족 영애로 태어났으니 집안에서 정해 주는 대로 혼사를 치르겠다고 했지요?”
“…….”
당연히 에셀번 백작은 곧바로 국혼을 준비하며 그의 치부였던 셋째 딸이 이루어 낸 쾌거에 밤새도록 흐뭇해 할 것이다. 드디어 쓸모 있다는 평가를 할까, 아니면 쫓아내지 않은 보람이 있다고 할까.
“당연히 싫으면 거절해도 됩니다. 왕비 자리가 싫을 수도 있지요.”
“그, 그건 아니에요. 감히 제가…….”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야 산하기관을 계속 다닐 수 있게 해 준다는 국왕이, 벌써부터 그녀를 출세의 도구로 삼고 있는 이아크 텔시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나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뒤 다니엘이 돌아섰다. 그녀를 법무국 앞까지 데려다 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보였다. 그제야 안리크가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정원에 혼자 남아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결론이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국왕이 귀족 영애를 하나 집어서 결혼하겠다는데 거기에 그 어떤 생각의 여지조차 들어갈 틈이 있겠는가.
그녀를 정원에 남겨두고 돌아간 것은 나름대로 다니엘의 배려였다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 뒤에야 깨달았다. 그녀가 다니엘과 함께 법무국에 바로 돌아갔다면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베카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면서, 이 청혼 같지도 않은 청혼과 갑자기 정해져 버린 ‘왕비’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
반쪽짜리 삶. 기억이 지워진 후 이베카는 다시 매사에 주눅 들어 몸을 납작 숙이고 남들의 눈치를 보는 열여덟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수사국에서 4년 동안 있었다고 들었다. 아마 그 시기가 그녀를 설명하는 아주 결정적인 시간일 텐데 전혀 기억이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꿈꿨으나 실패한 뒤, 기억을 지우고 그녀의 보잘 것 없는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법무국으로 옮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왕비? 그녀는 긴 검은색 머리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 * *
“결국 에셀번 영애와 결혼하실 겁니까?”
다니엘은 수사국에 절친한 대학 동기가 있었다. 수사국의 전무후무한 인재라고 평가받고 있는 카이든 루스였다. 새까만 검은 눈동자로 다니엘을 바라보며 카이든이 떨떠름하게 물었고, 다니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할 이유가 없어.”
“…….”
“지금은 시대의 격변기야. 왕정을 대신해 공화주의가 대륙을 휩쓸고, 마법을 대신해 공학이 밀려들어오고 있지. 어쨌든 신념을 가진 자를 곁에 두기엔 피곤해.”
그는 카이든이 내민 보고서를 눈으로 훑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몇 개 더 추가된 것이 있었다.
“내가 중립 귀족 아니면 산하기관 여자랑 결혼한다는 예상은 모두가 하고 있지 않았나?”
다니엘이 들고 있는 보고서는 ‘이베카 데 에셀번’에 대한 신상 조사서였다. 대학 시절 찍은 흑백 졸업사진이 클립으로 꽂혀 있었다.
“이베카는 둘 다 해당이야. 중립 귀족가의 영애인데다가 산하기관 재직 중이지. 심지어 법무국이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어.”
“법을 건드리고 싶어 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쉽지 않으실 겁니다. 아무리 에셀번 영애가 법무국 직원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흠.”
그는 카이든의 말을 부드럽게 끊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를 돌았다.
“안리크.”
“……네.”
안리크는 그의 호위무사장이었다. 원래 1왕자이면서 태자였던 그의 형, 윌리엄을 지키던 사람이었으나 윌리엄이 죽고 자신에게 왔다.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다니며 언제나 무표정으로 뒤를 지키고 있는 갈색 머리 청년에게 다니엘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베카의 첫사랑이라고 되어 있는데.”
“…….”
다니엘의 미소를 띤 얼굴에 카이든마저 시선을 돌렸다. 몹시 어색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카이든 역시 조사서에 안리크의 내용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으니까. 하지만 왕비가 될 사람의 뒷조사니 어쩔 수 없이 포함시켜야 했다. 게다가 왕비 간택이 걸린 이상 수사국에서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제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죠?”
“에셀번 백작님은 고아인 저를 거두어 길러 주셨습니다. 은혜를 입은 귀족가 영애의 충동적인 마음에 응답할 만큼 도리를 모르지 않습니다.”
“그녀가 싫어서는 아닌가 보군요.”
다니엘은 아랫사람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않았다. 그가 반말을 쓰는 대상은 정말로 마음을 터놓은 친구나 형제에 한해서였다. 원래부터 그렇지는 않았는데, 왕위쟁탈전을 거치며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성향이 발현되어 습관으로 굳어진 듯했다.
그리고 그 부드러운 존댓말은 누군가에게 더 숨 막히는 압박이 되곤 했다. 당황함을 애써 감추는 안리크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니엘이 싱긋 웃었다.
“옛날 일이라면, 그것도 교제하지 않은 일방적인 감정이라면 뭐 별거 있겠습니까.”
“…….”
“마음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기 마련이지.”
다니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고, 카이든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안리크가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제가 궁으로 들어오고 나서 자주 보지 못했습니다. 영애가 수사국에 들어가고 나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요. 아마 저에 대한 감정이 사라졌을 겁니다.”
“감정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냥…… 압니다. 4년간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목소리에 잠시 착잡함이 스쳐갔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니엘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보고서로 눈을 돌렸다.
“문제 삼지 않을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카이든도 안리크도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안은 독특하군요. 백작가에서의 학대? 사실입니까?”
“신체적인 학대라기보다는…….”
안리크는 주저하며 대답했다.
“정신적인 학대가 맞을 겁니다. 영애는 에셀번 백작의 친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뒷말이 백작가에 만연했으니까요. 모두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다니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언제나 주눅 든 상태로 자랄 수밖에 없는 성장 환경이었습니다. 에셀번 백작가의 모든 사람들이 금발이었는데, 혼자만 흑발이었으니까요.”
안리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이베카의 특이한 행보도 이해가 갔다. 수사국은 숙소가 별도 제공된다. 그런 상황에서 컸다면, 어떻게든 빠르게 집을 나오고 싶어 했을 것이다.
“열일곱에 최연소로 왕립 마법 대학 입학, 열여덟에 졸업, 수사국 입사, 3주 전 법무국 전입.”
다니엘이 살짝 턱을 쓸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이든.”
“네.”
“수사국에서의 그녀가 맡았던 일들은 내게 말하지 않을 거지?”
“네.”
“그녀도 기억을 전혀 못하나?”
“네. 수사국을 떠나면 평생 감시를 받거나 기억을 지우거나 둘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녀는 기억을 지우는 것을 택했습니다. 이브나 왕비가 수사국에 남긴 고대 마법이고 예전 같으면 평생을 가겠지만, 마력이 사라지고 있는 지금은 30년 안에 풀릴 것 같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카이든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묵을 지켰다가 천천히 결론을 덧붙였다.
“어쨌든, 실제로는 열여덟부터 4년의 기억이 날아갔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수사국은 왕명을 따르지만, 분명히 왕이 개입할 수 없는 독립적인 여지가 있었다. 예를 들어 수사국에 전해지는 비기들은 다니엘이라고 해서 알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수사국은 왕국에 필요하다는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면 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움직이기도 했다. 아무리 카이든이 다니엘에게 충성하고, 그의 막역한 동창이라고 해도 이베카의 수사국 시절에 대해서는 절대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 뭐, 괜찮아.”
상냥하지만 무심하게 괜찮다고 말한 그는 카이든에게 재차 물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했던, 그 여자의 행방은?”
“찾고 있습니다.”
“네가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것이 이상한데.”
“……주제넘게 충언을 올리겠습니다.”
카이든은 무표정으로 말했다.
“계획대로라면 곧 왕비님을 맞으시게 됩니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고 이렇다 할 불화도 없는데, 일단 그 여자는 잊으시는 편이 좋지 않으실까요.”
“아.”
다니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왕비 외에 비는 들이지 않을 거야. 선대에 그 난리를 피웠는데 내 대에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렇다면 그 여자를 왜 찾으시는 겁니까.”
“네가 못 찾는 게 이상해서.”
카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이 보고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베카 데 에셀번, 잔뜩 긴장한 표정에 경계하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던 법무국의 직원을 회상하며 그는 침묵을 지켰다.
‘저는 수사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전혀 지금 같지 않았어요. 늘 의기소침해 있었고, 지독한 애정 결핍에, 아무도 못 믿고 매사에 의심만 많았거든요. 하지만 열여덟 해를 눈치 보며 살았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환경이 바뀌니 차차 극복했던 거죠.’
다니엘은 이베카의 불안하게 떨리던 보랏빛 눈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주눅 들어 있는 표정, 기어 들어가던 목소리, 움츠러든 어깨, 경계심이 가득한 눈동자, 달싹거리던 입술…….
‘전하께서 전혀 좋아할 만한 애가 아닐 거예요.’
당당하고 거침없었던 맑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