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깨달음
1
하지만 그 승리의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거대한 살기에 모두들 놀라 입을 다물고 만 것이다.
그러자 회의실 구석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박수소리.
짝짝짝짝.
“후후후후. 정말이지 눈물겹구만.”
순간 모두들 그대로 굳어버렸다.
회의실에 자신들도 모르게 들어올 수 있는 누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있다면 하나 뿐.
타락한 날개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설마!”
모두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
그곳에 한 사내가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 절망했다.
결코 바라지 않았던 그 존재가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온의 입에서 신음처럼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타락한 날개….”
타락한 날개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왜? 계속 진행하지. 재밌던데?”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그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몸이 부들부들 떨려서 몸을 가누기는커녕 숨도 쉬기 힘든데 말이다.
“왜들 그래? 그래서 승리를 쟁취 할 수 있겠어?”
타락한 날개의 비웃음소리만이 이 넓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그때 신형 하나가 엄청난 속도로 타락한 날개를 향해 날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호오.”
파칭!
“치잇!”
타락한 날개를 공격한 이는 다름 아닌 탈리온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 공격도 타락한 날개의 근처조차 가지 못하고 막혔다.
바로 다른 존재로 인해 말이다.
탈리온 공작의 입에서 거칠게 자신을 막아선 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앤디….”
하지만 앤디는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탈리온 공작을 보며 고개를 꺄웃거렸다.
눈빛도 표정도 없었지만 탈리온 공작의 눈에는 그것이 자신을 아느냐는 듯한 행동으로 보였다.
탈리온 공작은 그 모습을 보며 검을 밀어서 앤디를 튕겨냈다.
“앤디가 아니었지. 내가 착각했군.”
그 말에 타락한 날개가 답변을 주었다.
“119,405호라고 하지.”
“참 엿 같은 이름이군. 그 엿 같은 이름을 가진 새끼를 누르지 못하면 네 녀석하곤 놀지 못하겠지?”
“생각보다 똑똑해서 좋군. 힘들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탈리온 공작이 바닥을 박차며 앞으로 쏘아졌다.
119,405호는 탈리온 공작이 자신을 향해 날아 오는 것을 보며 자신도 마주 나아갔다.
순간 119,405호의 몸이 이질적인 느낌으로 쭈욱 다가왔다.
마치 고무줄이 한순간에 튕겨져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탈리온 공작은 위험하다 싶어 몸을 옆으로 피했다.
후웅!
탈리온 공작의 얼굴을 스치듯 날카로운 발차기가 차고 지나갔다.
츠팟!
얼굴 피부가 공기압에 의해 갈라져 작은 핏물이 튀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보고서 피했다면 맞았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스피드였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가 무섭게 오른쪽에 살기가 느껴졌다.
재빨리 팔을 들어 막았다.
빠악!
탈리온 공작의 몸이 뒤로 쭉 날아가더니 회의실 천장을 뚫고 날아 올라갔다.
119,405호는 그 뒤를 따라 밖으로 튀어 날아갔다.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한마디 내뱉었다.
“안 보이는 군.”
펑!
작은 소음과 동시에 회의실 천장이 사라졌다.
아니, 가루가 돼서 사람들 머리위로 쏟아졌다.
여하튼 하늘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싸우고 있는 탈리온 공작과 119,405호의 모습이 작은 점으로 보였다.
119,405호가 탈리온 공작을 팔꿈치로 후려쳤다.
퍼퍽!
“크흣!”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119,405호의 능력은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전면에서 날아오는 살기에 탈리온 공작이 본능적으로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보지도 않고 감에 의해 대충 휘두른 검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슈숙! 퍼억!
“크헉!
탈리온 공작이 그대로 땅과 충돌할 것처럼 내리 꽂히듯 날아갔다.
충돌로 올 충격을 방비하기 위해 몸을 움크리며 마나를 운용했다.
그때 자신의 등 뒤에서 단단한 바닥의 느낌이 아닌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터업.
탈리온 공작이 누군지 의문을 갖기 전에 그가 말문을 열었다.
“못난 녀석.”
베르커스였다.
“스승님….”
“귀찮다. 실력도 안 되는 주제에 나서긴. 번거롭게 굴지 말고 저리 비켜라!”
하지만 탈리온 공작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받아 줬음을 말이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119,405호가 안테르트와 싸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말이다.
탈리온 공작이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앉은 것을 본 베르커스가 안테르트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때 맞은 편에 날아오고 있는 얀이 시야에 들어왔다.
베르커스가 말했다.
“왜 왔냐. 번거롭게 하려고 왔으면 꺼져라.”
그 말에 얀이 능글 맞게 대답했다.
“연로하다 못해 뼈가 다 삭은 늙은이 둘로는 힘드실 것 같아서 말이지.”
“삭은 뼈로 두들겨 맞아보면 안와도 된다는 것을 알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은 자연스럽게 안테르트와 합류하여 119,405호를 합공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힘을 합해야 할 때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한 자존심이나 자격지심 때문에 가능성을 저버리는 일은 버려야만 했다.
현경을 넘어선 한 명과 생사경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두 명의 노인의 합공은 마치 손을 맞춰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119,405호는 그 셋의 공격에 당혹스러워하며 허둥거렸다.
대응은커녕 모든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하지만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그리고 얀은 절대 손속을 놓치 않았다.
사정도 두지 않았다.
안테르트나 베르커스는 원래 앤디가 적에 가까웠고, 얀은 앤디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중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대가 앤디가 아닌 마족 119,405호임을 잊지 않았다.
퍼퍽!
얀이 내지른 일격이 정확하게 들어갔다.
“…!”
우둑!
분명 119,405호의 뼈에 반응이 왔다.
금이 간 것이다.
셋은 이 기세를 더욱 몰았다.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는 허공검을 사용했다.
얀 역시 자신이 사용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을 사용하며 119,405호의 마지막을 유도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실책이었다.
기술이 큰 만큼 틈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술은 최후를 장식할 때 써야 할 만한 것이었는데, 아직 119,405호는 그런 큰 기술을 당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119,405호를 수세에 몰게 했던 오묘한 기술들에 비교한다면 공격이 단조로운 편이었다.
순식간에 그 흐름을 눈에 익힌 것이다.
그때부터 싸움의 양상이 뒤바뀌게 되었다.
119,405호가 서서히 반격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그리고 얀은 이상신호를 느낄 수 있었다.
반격이라니.
지금 상황에서 반격을 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공격패턴을 파악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셋의 합공 패턴을 파악했다는 말은 허투루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자신들의 실책이 뭔지를 깨닫게 되었다.
“너무 시간을 끌어서 그런가?”
“이거 정말 말도 안 되는 녀석이었군.”
“젠장. 실수했어.”
각자 한마디씩 내던지며 다시 차분히 공략을 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119,405호는 자신들의 공격에 완벽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셋은 경악했다.
아직은 셋이 조금 유리하다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제 자신들이 119,405호에게 뒷덜미를 잡힐지 알 수 없었다.
왠지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처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러자 손속이 조금 어지러워졌다.
바로 그때 119,405호가 오러플레어를 일으켜 폭파시켰다.
쾅!
그 기습적인 반격에 정말 찰나의 가까운 순간동안 세 명의 흐름이 끊어졌다.
하지만 119,405호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119,405호가 씨익 웃으며 이들 중 가장 약하며 자신의 공격 성공률이 높을 것이라고 판단한 얀을 공략했다.
119,405호의 주먹이 얀의 허리를 강하게 내지른 것이다.
“커헉!”
다급하게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얀을 도우려 했지만, 119,405호는 자신이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공격을 피해 얀을 다시 한 번 공략했다.
뻐억!
“크흣!”
다행스럽게도 얀은 119,405호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데미지가 너무나 컸다.
119,405호의 공격을 막은 팔과 어깨가 쩌릿쩌릿 저려온다.
그 사이에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다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되었다.
얀이 재빨리 그 틈에 끼어들어 확실한 자리를 선점했다.
퍼벅! 퍼버버벅!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고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중심적으로 얀이 보조를 하여 유리한 싸움이 진행되었다.
아니 겉으로 보기에만 그러했다.
모두 알고 있었다.
얀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119,405호에게 받았던 그 타격이 치명상은 아니었었지만 작지 않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면 금방 해결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상황에서 무리하여 움직이다보니 문제가 된 것이었다.
서서히 중심 축이 기울기 시작했다.
더 이상 베르커스와 안테르트 그리고 얀이 우월하지 않게 된 것이다.
119,405호는 균등을 넘어 조금씩 흐름을 자신 쪽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더 이상 얀은 119,405호를 괴롭힐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없게 되었다.
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119,405호의 강력한 일격을 봤다.
몸은 피할 수 없었고, 동시에 전신이 부서질 것 같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퍼버벅!
쿵! 쿵! 쿵!
쿠르르르르르릉!
얀의 신형이 뒤로 날아가며 마을 한 복판에 떨어졌다.
마을 한 구석은 삽시간에 붕괴 되었고, 거대한 크레이터를 형성하고 말았다.
얀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결국 다시 주저 앉고 말았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의 눈 깊은 곳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때 119,405호가 어깨를 풀며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에게 천천히 다가서며 도발적인 시선을 던졌다.
마치 어서 마저 놀자고 재촉하는 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 받으며 쓰게 웃었다.
“정말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겠군.”
“오래 살긴 살았지. 후후후.”
“큭큭큭큭.”
2
전투를 지켜보던 모든 이들의 표정에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얀이119,405호의 공격을 받고 하늘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케산과 바이널, 패르스는 얀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얀을 부축한 후 답답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설마 베르커스와 안테르트 그리고 얀의 합공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 없다니.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위에서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은 거의 움직임을 볼 수 없었지만, 흐름은 확실하게 보였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119,405호에게 서서히 밀리고 있는 흐름이 말이다.
가습이 답답했다.
정말 더 이상의 희망은 없는 것일까?
지켜보고 있던 드래곤들이 움직였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돕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을 주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다.
도와주러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드래곤들의 앞을 브라키우드 아니 21호가 막아섰기 때문이다.
저번과 같이 21호와 드래곤들이 대립 하는 상황이 연출 되었다.
그때와 분위기는 사뭇 달랐지만 말이다.
21호가 말했다.
“더 이상 가지 마라. 그들을 도와주면 나는 너희를 막을 수 밖에 없다.”
“웃기지마!”
“전생의 정을 생각해서 한 번 더 충고를 하지. 뒤에 가만히 있어라.”
“전생? 훗. 너희 마족의 거짓말에 우리가 속아 넘어 갈 것처럼 보이냐? 그리고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순서대로 죽으란 말이냐? 우리는 그렇게 못한다!”
파이온이 21호의 대답을 더 이상 듣지 않고 선공했다.
21호는 파이온이 쏘아 올린 마법을 한손으로 막아서 터트리며 반대 손으로 플레어 버스트를 쏟아냈다.
블링크로 21호의 공격을 피한 파이온은 이번엔 홀드를 걸었다.
21호의 몸을 묶어 두려는 것이다.
21호는 의외로 간단하게 홀드에 걸렸다.
드래곤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21호를 향해 마법을 쏟아 부었다.
순간 21호는 자신을 묶고 있던 홀드의 마법을 부시고 몸을 옆으로 이동했다.
얼음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스르륵 이동한 21호의 입에서 브레스가 터져 나왔다.
콰앙!
한 순간에 드래곤 한 마리가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팔 하나를 잃고 전투 불능의 상태가 되어 정신을 잃은 체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파이온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제길.”
바로 그때 21호가 말문을 열었다.
“파이온. 자네의 공격은 너무 뻔해.”
“시끄럽다. 감히 마족 따위가 내 이름을 입에 담다니! 죽어라!”
분노의 일갈과 함께 입에서 브레스를 품어냈다.
21호가 동시에 파이온의 옆으로 블링크를 사용하여 순간이동하며 공격을 시도했다.
파이온은 자신의 본능에 의해 이미 자리를 벗어난 상태였다.
단순히 벗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파이온은 21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같은 수법을 두 번하고 두 번이나 당할 정도로 아둔해 보였나?”
“흠?”
파박!
21호는 몸을 돌려 방어를 하거나 혹은 반격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블링크를 사용하여 다시 몸을 빼려던 순간 파이온에게 붙잡혔다.
파이온은 21호의 몸을 완벽하게 붙잡고 외쳤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며 힘으로 상대해주지.”
“힘으로는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이길 필요가 있나? 잠시만이라도 붙잡히면 충분한데 말이야.”
“뭐?”
“목숨을 걸고 붙잡으면 조금은 시간을 벌 수 있지 않겠어? 큭큭큭.”
“너도 죽을 셈이냐!”
“죽을 셈이냐고? 죽는 게 어때서? 더 이상 마족 따위가 로드의 몸을 가지고 농락할 수 없도록, 로드를 대지의 품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면야 이 목숨 따위가 아깝겠는가!”
파이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일곱 개의 섬광이 터져 나왔다.
반응속도와 흐름을 보니 이미 지금 상황에 대처에 준비를 해왔던 모양이었다.
21호는 당황했다.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파이온이 너무나도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21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더 이상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층층히 한계이상으로 실드를 펼친 후 그대로 일곱 개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실드 따위로 얼마나 방어가 되겠냐마는 21호 정도가 펼친 실드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의 최고 마법인 브레스를 그것도 일곱 개나 막는 것은 무리였다.
콰광!
쾅쾅쾅!
실드는 놀랍게도 세 개의 브레스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네 개는 어쩔 수 없었다.
쾅! 쾅! 쾅! 쾅!
“크학!”
21호는 전신으로 네 개의 브레스를 고스라니 받았고 실 끊어진 연처럼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파이온 역시 21호 등에 그대로 달라 붙어 있었다.
브레스의 충격이 21호의 몸을 통과하며 조금 완화 되었다곤 하나 고스라니 전해졌기 때문이다.
파이온의 내부는 진탕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이미 정신도 잃고 있었다.
이대로 추락한다면 파이온의 죽음은 확정 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때 21호의 눈이 가볍게 떠졌다.
그리고는 무슨 이유에선지 몸을 틀었다.
그러자 21호의 몸이 뒤집어 지며 등에 있던 파이온이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때 21호의 입술이 달짝거렸다.
마치 뭐라고 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콰과광!
높이 치솟아 있던 산 하나가 그대로 붕괴되며 21호와 파이온이 바닥에 틀어 박히게 되었다.
일곱 마리의 드래곤들은 다급하게 21호와 파이온이 떨어진 곳으로 날아갔다.
둘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21호가 살아 있다면 죽여야 했고, 파이온이 살아 있다면 어서 회복을 시켜야 했으니 말이다.
일곱 마리의 드래곤들은 근처에 도달해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 할 수 없는 장면이 연출 되고 있었다.
파이온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쓰러져 있는 21호를 앞에 두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 로드! 정신 차리 십쇼! 로드!”
로드라니 정신을 차리라니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멀뚱히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나 계속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지금도 밖의 상황은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온님. 정신 차리십쇼. 파이온님?”
“크흐흐흐흑!”
파이온이 땅을 치며 울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을 한마디 내뱉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 말에 한 드래곤이 되물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파이온이 슬프기 그지 없는 눈동자로 21호를 하염없이 내려 보며 대답했다.
“21호가…, 아니 로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한 말이다.”
“예?”
“내가 죽어가고 있을 때 이분이 나를 살리셨다. 이분은 21호 따위가 아니었단 말이다! 진정 로드셨단 말이다!”
순간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버렸다.
이제야 사태가 파악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드래곤들이 숙연하게 로드 브라키우드를 내려 보고 있을 때 파이온은 그에게서 시선을 때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다시 한 번 그 말을 되뇌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늘 위에서 119,405호와 싸우고 있는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둘은 119,405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한 드래곤이 다가와 파이온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저들을 도와주는 게 어떨까요?”
“…!”
순간 파이온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리고 서둘러 안드레이를 찾았다.
“로드가 한 말은 분명 안드레이가 했던 말과 같아. 대체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거지? 그래. 내 짐작은 틀리지 않았어. 역시 안드레이는 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야.”
파앗!
혼잣말을 남긴 파이온의 신형이 드래곤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파이온은 안드레이를 찾아 나선 것이다.
이 말의 진의를 묻기 위해 말이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정말이지 죽을 것만 같았다.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119,405호라는 녀석 때문이다.
119,405호
한마디로 119,405번째 실험체라는 뜻을 가진 단순한 이름을 지닌 녀석이다.
하지만 녀석의 능력은 이름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괴물 같은 녀석이었다.
녀석의 성장은 한계를 모르고 하늘로 치솟는 대나무와도 같았다.
이제는 자신들과 싸우며 하품을 한다.
그리고 한 팔로 한명씩 상대하는 압도적인 힘을 보이기까지 했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자신들을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만들 줄이야.
분노가 폭발하여 달려들어도 녀석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미 자신들은 녀석의 상대가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숨을 헐떡였다.
자신들이 숨을 이렇게 몰아쉬게 된 것이 얼마만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은 전혀 좋지 않았다.
“정알 엿 같군.”
“그러게.”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푸념을 하며 이를 갈았다.
119,405호는 뒤에서 그런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꺄웃거리는 중이었다.
왜 안 덤비냐고 묻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면상이 원래 저렇게까지 꼴보기 싫지는 않았는데.”
“퉷!”
바닥을 향해 침을 한번 내뱉은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녀석이 원하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모욕을 받으며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이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말이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119,405호를 향해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자신들의 독창적인 검결의 흐름을 실어 119,405호 공략해 나아갔다.
119,405호는 꼴보기 싫을 정도로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갔다.
그러고는 한순간에 치고 들어와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문제는 그 치고 들어온 기술이었다.
베르커스가 소리쳤다.
“이 자식이! 그세 내 기술을 배꼈군! 그래 남의 기술 쪽쪽 빨아먹으니까 맛있더냐!”
안테르트도 소리만 치지 않았지 베르커스와 같은 심정이었다.
119,405호는 어서 더 다른 기술로 덤비라고 재촉했다.
그렇지만 이미 다른 기술이랄 것도 없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모든 기술을 다 까발려 버렸기 때문이다.
“뭘 더 빼먹을 게 없는지 바라보는 저 눈깔 좀 뽑아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네.”
“너도 그렇냐? 나도 그렇다.”
“한번 시도해 볼까?”
“이미 계속 시도는 하고 있지.”
“큭큭. 그랬냐? 나만 그런 줄 알았지.”
한계까지 오자 이제는 웃음만 나오는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였다.
둘은 짧은 만담을 끝으로 표정을 굳혔다.
정말 죽을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구차하게 살 바에는 그냥.”
“죽자.”
둘은 같은 마음이었다.
순간 역혈신공으로 진원진기를 건드려 전신의 모든 기운을 폭발시켰다.
콰아아아아아아!
그로 얻는 것은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두 배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둘은 지금의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운이 나쁘면 식물인간이 되고 운이 좋으면 죽을 테니 말이다.
둘이 역혈신공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말 그래도 죽겠다는 뜻인 것이다.
“크크크크, 힘이 넘치는 군.”
“죽일 수 있을까?”
“뭐, 한번 해봐야지.”
둘의 신형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119,405호를 향해 날아갔다.
푸슝!
119,405호는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기뻐했다.
동시에 둘의 공격에 가슴을 적중당했다.
119,405호는 둘이 날아오던 속도보다 빠르게 뒤로 튕겨져 나라갔다.
그리고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그 풍압이 얼마나 쌨던지 하늘의 구름이 휘말리며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그 구멍 사이로 거대한 기류가 흘러나오며 구름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흩어지며 비를 뿌려댔다.
그때 119,405호가 빗속에서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그리곤 튕겨져 날아갔던 속도보다 빠르게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향해 날아갔다.
베르커스가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속도도 배낄 수 있는 건가?”
“미치겠군.”
정 말이지 토 쏠릴 정도로 짜증나는 녀석이었다.
다시 접전을 벌이는 세 명의 사내들.
그들이 일으키는 전투의 파장으로 인해 제 3지구는 엉망이 되고 있었다.
충돌로 인한 충격파가 고스라니 땅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드래곤들이 서둘러 그 충격파를 완화하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마을은 벌써 초토화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슈우웅!
콰광! 콰쾅!
거대한 굉음과 사방에서 터지는 불빛들.
번쩍! 번쩍!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그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전신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119,405호는 그 전신을 넘어선 존재라는 점이었다.
사방에서 우레가 폭죽처럼 터지고 섬광이 번뜩인다.
한 번의 강렬한 빛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 빛들은 수십에서 수백 번의 타격이 펼쳐지며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우르릉 쾅쾅!
천지가 뒤집어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이것이 인간의 능력이란 말인가!
안테르트가 검을 내리 그으며 외쳤다.
“마령탐해!”
안테르트가 내지름 검에서 검은 기운이 폭사했다.
그 기운은 검은 번개와도 같은 어둠의 섬광을 뿜어내며 119,405호를 향해 날아갔다.
119,405호는 놀랍게도 그 거대한 기운을 한 주먹에 걷어내듯 쳐냈다.
콰광!
튕겨진 그 기운은 거대한 굉음을 내며 하늘로 솟구치듯 날아 올라갔다.
그 모습은 마치 검은 용이 승천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베르커스가 그 틈을 노렸다.
“광혈천하!”
하늘이라도 가를 듯한 거대한 기운이 베르커스의 검 끝에서 폭사했다.
쿠콰콰콰콰콰콰!
이번 공격은 지금까지의 공격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아무리 119,405호라 해도 막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기운이었다.
고오오오오오!
어찌나 대단한지 119,405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 기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는지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몸을 빼는 속도보다 안테르트가 뿜어낸 그 기운이 날아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119,405호가 안되겠다 싶은지 어디로든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빠져나올만한 방위는 안테르트가 점한 체 공격을 해왔다.
결국 발이 묶인 119,405호는 그 기운과 맞서기로 했는지 자신의 검을 있는 힘껏 내리그었다.
쿠과과과광!
천지가 뒤집어 지는 듯한 굉음이 일어나며 거대한 섬광이 번쩍하며 빛을 발했다.
화아아아앗!
마치 눈앞에 태양이라도 뜬 것처럼 엄청난 빛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잠잠해졌다.
“….”
그 속에서 넝마가 된 119,405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혈천하의 앞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저, 저럴 수가!”
그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절망이었다.
더 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있는 힘도 없었지만 말이다.
“헉. 헉헉….”
119,405호가 화가 난 표정으로 베르커스 앞으로 다가왔다.
베르커스가 힘없이 웃는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의 당당한 모습과 달랐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질려있는 것만이 아니라 피부도 쪼글쪼글 쭈그러져 있었다.
숨은 가팠으며, 생명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할 말을 했다.
“지독한 녀석. 나랑 같이 지옥에 가는 게 그렇게 싫더냐?”
“….”
“죽여라.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그 말에 119,405호도 미련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베르커스의 목이 댕강 떨어졌다.
“크르르르륵.”
잘려나간 목에서 피 끓는 듯 한 소리를 흘리며 쓰러졌다.
베르커스가 그렇게 죽었다.
안테르트는 그렇게 죽어간 베르커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순간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쏟아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눈물이 났다.
그리고 입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엉엉….”
“….”
“흐엉엉엉엉엉! 흐엉엉엉엉엉엉엉!”
안테르트가 검을 내려놓더니 갑자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왜 갑자기 모든 것이 덧없이 느껴지는 것일까?
지금 이 울음은 그것에 대한 항변인 것일까?
그것이 아니면 자신의 반쪽과도 같았던 친우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 때문일까?
안테르트가 고개를 들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주름 가득한 눈으로 119,405호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신도 죽여달라는 듯이 말이다.
119,405호의 검이 이번에도 미련 없이 사선을 그었다.
서걱.
툭.
안테르트의 목이 떨어져 바닥을 대굴대굴 굴렀다.
그리곤 잠시 후 멈췄다.
자신의 시체와 베르커스의 시체가 동시에 보이는 위치에서 말이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엄청난 기운을 폭사하며 달려왔다.
탈리온 공작이었다.
스승들의 죽음을 보고 슬픔을 견디지 못해 달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기운은 119,405호에겐 더 이상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탈리온 공작은 앞뒤 보지 않고 119,405호를 공격했다.
119,405호는 그 흉흉한 공격을 단순히 손등으로 밀어내듯 쳐서 파쇄했다.
그리곤 탈리온 공작의 목을 한손으로 부여잡고 휙 집어 던졌다.
텅! 텅! 터덩텅!
탈리온 공작은 아이에 의해 집어 던져진 인형쳐럼 맥없이 날아갔다.
119,405호는 그런 탈리온 공작이 바닥에 쓰러지자 마무리를 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자 신음하고 있는 탈리온 공작의 앞에 그를 부축하려하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케산과 바이널, 패르스 그리고 셀린이었다.
케산과 바이널, 패르스들은 119,405호가 다가오자 더 이상 다가 오지 못하도록 앞을 막아섰다.
119,405호가 더 다가서자 케산이 먼저 나서서 검을 휘둘렀다.
퍼억!
“커헉!”
케산이 순식간에 튕겨져 날아갔다.
이번엔 바이널과 패르스가 동시에 덤볐다.
하지만 둘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케산보다 더 초라했다.
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달려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반대쪽으로 튕겨져 날아갔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셀린이엇다.
“저리가! 저리가 괴물아!”
탈리온 공작을 안고 있던 셀린이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로 119,405호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119,405호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갔다.
“저리 가라구!”
셀린의 외침 따위는 119,405호의 발걸음을 막는데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119,405호는 셀린을 뿌리치며 탈리온 공작의 목을 움켜잡고 다시 들어 올렸다.
“으으으….”
정신을 잃고 있는 탈리온 공작이 본능적으로 신음을 흘려댔다.
그때 119,405호에 의해 구석에 나뒹굴어진 셀린이 다시 달려와서 119,405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만해! 그만하라구! 흑흑흑.”
119,405호가 물끄러미 셀린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번거롭다는 듯이 다시 한 번 쳐내려고 하던 바로 그때 셀린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제발 좀 그만해에에…. 제발….”
화앗!
갑자기 119,405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동시에 그의 몸이 밀랍인형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꼼짝도 하지 않고 셀린의 맑은 눈에서 시선을 때지 못했다.
셀린이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119,405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셀린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19,405호의 입이 열리며 자신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세, 셀린?”
셀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119,405호를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애, 앤디?”
“….”
최종장. 검황의 이름으로…
1
“앤디? 앤디야?”
셀린의 물음에 119,405호 아니 앤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르륵.
셀린이 계속 묻는다.
“앤디야? 정말 앤디 맞아?”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셀린이 웃는다.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그래도 미소를 머금었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앤디 자신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슬펐다.
어떻게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신에 의해 사람들이 집을 잃었을 때 슬펐고, 그 피해로 인해 죽었을 때 슬펐으며, 드래곤들을 지키기 위해 브라키우드가 죽었을 때 슬펐고,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죽었을 때 슬펐다.
사실 앤디는 119,405호안에 갇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고 스스로 행동 할 수 없었을 뿐이지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외쳐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슬퍼도 눈물이 나지 않았었다.
그게 너무 서러웠다.
울고 싶은데 울 수 없어서 그게 너무 슬펐다.
그런데 셀린에 의해 심연의 층에 갇혀 있었던 자신이 깨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 슬픔이 쌓이고 쌓여 지금 터진 것이다.
자신이 죽인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내려 보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있는 탈리온 공작도 내려 보았다.
“하아….”
앤디는 자신의 품안에서 울음을 흘리고 있는 셀린을 떨어트렸다.
셀린이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라는 표시였다.
셀린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앤디는 자신의 근처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안드레이였다.
그 뒤에는 파이온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반면에 안드레이는 파이온과 상반되어 보일 정도로 태연한 모습을 한 체 앤디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거였군요.”
앤디의 대답에 안드레이가 미소 지었다.
“돌아 왔구나.”
“죄송해요. 너무 늦었지요.”
그 말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네가 지금 돌아온 것 역시 순리일 뿐이니까.”
“스승님은 언제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죠?”
“글쎄다.”
안드레이는 정확한 대답대신 예의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앤디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절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부모님과 레오나 공주는요?”
“안전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녀오겠습니다.”
“뒤는 걱정하지 말아라.”
앤디는 안드레이의 말에 대답대신 바닥을 박찼다.
부웅.
마치 공기가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한참 떠오르자 자신으로 파생된 슬픈 현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슬퍼 할 때가 아니었다.
눈물은 조금 전에 흘린 것으로 끝내야 했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앤디의 시야에 타락한 날개의 모습이 들어왔다.
앤디는 타락한 날개 앞에 섰다.
타락한 날개는 앤디를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119,405호.”
그 말에 앤디가 대답했다.
“이젠 뭘 하지?”
타락한 날개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말을 시작했군.”
“뭐, 한 번 열기가 힘들지 한 번 열고 보니 쉽더군.”
“그래?”
타락한 날개의 표정이 조금 좋지 않았다.
앤디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대답하는 습관을 잘못 들였군.”
“그건 잘 모르겠고. 이젠 뭘 할 거지?”
“그게 왜 궁금하지?”
“그 일을 막을 생각이니까.”
타락한 날개가 갑자기 큭큭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타락한 날개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앤디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119,405호가 아니군.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걸 왜 나한테 묻지?”
“그러고 보니 21호 녀석은 나로 인해 형성된 그 육체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처럼 말을 했었지. 그때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신경이 쓰이는 군. 내가 만든 녀석들이 자아를 형성하는 것까진 이해 할 수 있겠는데 모든 기억을 되찾고 반기를 들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뭐가 있긴 한 건가?”
타락한 날개는 정말 신중하게 고민했다.
마치 눈앞에 앤디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타락한 날개가 앤디에게 질문했다.
“그 말은 너도 그 존재라는 것을 봤을 가능성이 있단 말이군.”
“글쎄. 확실하진 않아.”
앤디의 대답에 타락한 날개는 만족 한 듯 미소 지었다.
“봤다는 말이군.”
“….”
“그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앤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내 창조의 영역을 건드릴 수 있는 존재라. 과연 누굴까? 누가 건드릴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건드렸을까?”
“그게 궁금한가?”
앤디의 질문에 타락한 날개가 바로 반응을 보였다.
“궁금하다. 알려줄 텐가?”
그 말에 앤디가 대답했다.
“죽어라.”
“뭐?”
“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앤디의 말에 타락한 날개가 폭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미친 녀석!”
타락한 날개가 짜증난다는 듯이 앤디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앤디에게 부여한 육체를 빼앗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앤디의 육체를 빼앗을 수 없었다.
“어라? 뭐지?”
타락한 날개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어렸다.
곧 냉정을 되찾았지만 말이다.
“회수가 불가능하면 죽이면 되지.”
타락한 날개는 그 말과 동시에 촉수 날개를 뻗었다.
휘리리리릭!
촉수가 앤디를 향해 날아갔다.
앤디는 촉수를 맞서 상대했다.
사방 노려지지 않는 곳이 없고, 공격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공격을 시작하면 끝이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앤디는 그 공격을 모두 소화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흐르는 유운신공의 묘결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크게 달랐다.
앤디는 지금 그 어떤 무공도 사용하지도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타락한 날개의 공격은 하나도 허용되지 않았다.
타락한 날개의 얼굴에 서서히 짜증이 어렸다.
마치 빈 허공에다가 혼자 삽질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거칠게 공격을 가했다.
그때 앤디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앤디가 검을 뽑아 들고 타락한 날개의 공격에 맞서 시작한 것이다.
파칭! 파칭!
타락한 날개의 촉수는 앤디의 검에 답답함을 느꼈다.
앤디의 몸 중심으로 그 어떤 촉수도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빈 허공을 휘저었던 기분이 들었던 것보다 지금 기분이 더 더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앤디의 검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그 어떤 색도 낼 수 없어 생긴 어둠이었기 때문이다.
“라그나 블레이드?”
타락한 날개가 다급히 촉수를 회수하려 했다.
하지만 앤디의 검에 촉수 두 가닥이 잘리고 말았다.
타락한 날개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변하며 분노를 토하고 말았다.
“감히! 감히 내 날개를!”
“….”
“네 녀석을 결코 용서치 않겠다!”
타락한 날개의 신형이 앤디를 향해 속도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쇄도했다.
타탓!
타락한 날개의 촉수가 빠르게 회전한다.
파라라라라락!
촉수에 의해 대기가 발기발기 찢어져 나갔다.
누가 봐도 앤디는 그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찢겨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앤디의 땅을 향하고 있는 검극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광!
땅이 움푹 파이며 앤디가 그 속으로 쏙 들어갔다.
촉수가 그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앤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촉수들은 연신 파닥거리는데 그 모습이 마치 다 잡은 먹이를 놓쳐 안타까워하는 것만 같았다.
“도망 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타락한 날개가 살기어린 눈빛을 번뜩이고는 자신의 손바닥을 땅에 가져다 댔다.
순간 땅이 푸욱 꺼지며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2
앤디는 땅속에서 진동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다.
땅의 균열이 일어날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타락한 날개의 짓이 분명했다.
‘이대로 땅속에 나를 매장시킬 생각인가?’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타락한 날개도 알았다.
‘그게 아니라면?’
짧은 고민 끝에 앤디는 밖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타락한 날개의 노림이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이 아닌 지상위의 인간들이 인질이었던 것이다.
안 나오면 모두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인 것이다.
앤디가 땅속에서 박차고 모습을 드러내자 타락한 날개가 웃었다.
“나왔군. 분명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서겠지? 역시 완전하게 인간의 이성을 되찾았단 말이군? 놀라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 물론 이것도 대답해 줄 수 없겠지? 큭큭.”
타락한 날개의 질문에 앤디가 대답했다.
“글쎄. 너한테 물어봐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말이다.”
“후후후. 역시 그렇지. 그렇게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타락한 날개가 자신의 촉수로 앤디를 겨냥했다.
앤디는 타락한 날개가 지금 뭐하는가 싶어 지켜봤다.
그런데 그 촉수 끝에 이상할 정도로 많은 기운이 집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촉수 끝에서 빛줄기들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푸슛! 푸슛!
앤디가 다급히 그 빛줄기를 검으로 막았다.
타당! 탕탕!
그것을 본 타락한 날개가 이죽거리며 말을 걸었다.
“그래. 계속 막아봐라. 얼마나 막을 수 있는지 지켜보마.”
쏘아지는 속도도 양도 훨씬 많아졌다.
문제는 그 쏘아져 나오는 것이 모두 오러 덩어리며 그 하나하나의 힘이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물론 앤디가 피하자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앤디는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타락한 날개는 치사하게도 인간들이 숨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잡아 앤디를 공격했다.
앤디가 피한다면 뒤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협박과도 같은 공격인 것이었다.
조금씩 앤디의 표정이 굳어졌다.
타락한 날개가 쏘는 오러덩어리를 모두 막자 팔에 피로도가 쌓인 것이다.
앤디는 공격을 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어떻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신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 뒤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앤디는 어떻게든 더 이상의 피해가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연속된 오러덩어리 공격에 앤디의 집중력이 흐트러져 잠시 주춤거렸다.
그 결과 앤디는 몇 개의 오러덩어리를 놓쳤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콰광 쾅쾅쾅!
오러덩어리가 땅과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거대한 먼지가 일어나며 가득히 시야를 가렸다.
바로 그 틈을 노리고 타락한 날개가 앤디를 향해 날아왔다.
“…!”
타락한 날개의 촉수들이 날카롭게 포선을 그리며 앤디의 본신과 앤디가 빠져나갈 모든 공간을 공략하며 날아왔다.
앤디는 검으로 그 촉수를 튕겨내며 어떻게든 그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활시위를 당긴 듯 팽팽하면서도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앤디와 타락한 날개는 서로 지쳐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타락한 날개는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막아서는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자랑스러운 마족으로 만들어낸 녀석이 건방지게도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있어서 안 될 있을 수 없는 일종의 반역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녀석이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긴 했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너무 많았다.
녀석이 어떻게 인간의 모든 기억을 찾게 되었는지를 넘어 어떻게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강해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중간 계에서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해도 자신과 거의 비등한 힘을 보이다니.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더 말이 안 되는 사실은 지금도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타락한 날개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이제는 녀석이 자신과 거의 비등한 힘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타락한 날개는 뭔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가 머릿속을 엉망으로 엉클어 놓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수를 쓰는 것 같았다.
타락한 날개의 머릿속에 순간 어떤 가정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현실성 없는 이야기였지만 타락한 날개는 자신의 추측을 따라 타고 올라가봤다.
그러자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지금까지 의심을 품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자신이 마계에서 중간계로 넘어온 것도 미심쩍지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중간계로 넘어오면서부터 자신은 의도치 않은 행동을 해왔다.
그 결과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들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그 결과물을 가지게 된 상황들이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자신이 아무리 모험을 좋아한다지만 인간의 힘만으로 인간과 싸운다는 것이 어딘지 어색했던 것이다.
만일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인간의 심장 따위를 먹어 마족을 만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보다 마계에서 마족을 불러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으니 말이다. 녀석들의 충성심과 힘의 크기를 파악하고 있으니 상황에 맞춰 적절한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하튼 그것으로 인해 특이한 현상을 파악하게 되었다.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현상 말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종이 자신이 준 힘 이상의 힘을 얻는 것도 모자라 자아를 찾았던 것이다.
자신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실험을 했다.
연이은 실패도 연연치 않고 말이다.
아니 실패는 오히려 오기를 불러일으켰으니 말 다했다.
그리고 드래곤도 손대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지금 자신과 맞서고 있는 저 녀석을 만들게 되었다.
‘….’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것들을 연이어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이상했다.
마치 자신이 타인의 유도에 따라 행동을 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체스 말처럼 말이다.
이렇게 왔으니 이렇게 가고 저렇게 갔으니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한 것이다.
마계에서는 그토록 냉철한 자신의 모습을 중간계에 와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마치 자신은 죽기위해 중간계에 온, 아니….
‘이 녀석인가?’
이 눈앞의 녀석을 마족으로 만들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의 절대자인 자신을 마리오네트처럼 조종을 했단 말인가!
‘누가? 왜? 어떻게?’
왠지 말이 된다.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그 한마디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21호가 말했던 그 알 듯 모를 듯하던 한마디도….
‘….’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오싹했다.
지금도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서 생각이 멈췄다.
갑자기 뇌리까지 파고드는 엄청난 통증 탓이다.
서거거걱!
“크아아아악!”
엔디의 검에 타락한 날개의 촉수들이 스파게티 면발처럼 잘려 나간 것이다.
그곳에서 검은 피가 잠시 뿜어졌지만 곧 치유가 되었다.
앤디는 갇혔던 촉수의 우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타락한 날개가 충혈된 눈으로 앤디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네 녀석은 누구냐?”
“앤디다.”
“장난하지 마라! 누가 너를 이곳에 보냈느냐는 말이다!”
앤디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점잖은 모습과 판이하게 다른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치 뭔가에게 쫓기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큭큭큭큭. 그래? 그렇다면 좋다.”
순간 타락한 날개의 손에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더니 구름 근처에서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그것이 빛의 화살이 돼서 사방으로 쏟아졌다.
파파파파파파팟!
하지만 마냥 아름다운 빛 무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뭐야! 아악!”
“크악!”
“커허헉!”
그 빛 무리들이 사람들을 쫓아 하나 둘 사냥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죽어나간 것이다.
앤디는 그 상황을 보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앤디의 그런 벙진 표정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타락한 날개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네 녀석과 달리 인간들은 죽이기 쉽지. 네 녀석과 한번 공방을 벌일 힘으로 죽인 거다. 어때 볼만 한가?”
앤디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네 이 자식!”
“왜? 이제야 말을 마음이 생겼나? 아니라고? 그럼 한 번 더 가볼까?”
다시 타락한 날개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에 죽은 수의 두 배가 죽을 거다. 약 8,000명 정도 되겠군.”
앤디는 그것을 막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피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타락한 날개를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저 기술은 타락한 날개에겐 별것 아니었다.
도망치며 얼마든지 사용 할 수 있는 기술이란 뜻이다.
솔직히 저 빛줄기는 어느 정도 검을 사용 할 수 있거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실드 하나 뚫지 못하고 검에 막혀 사라질 정도의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검도 마법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막말로 집구석에 숨어 있으면 안전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을 사람들이 알겠는가?
아무런 지식이 없는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하늘로 퍼져 올라간 빛줄기.
그것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자 이번에는 조금 전에 비해 엄청난 크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빛줄기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방에서 숨을 헛 들이키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앤디는 절망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고, 타락한 날개는 그런 앤디를 보며 즐거워했다.
“낄낄낄. 그러게 대답을 하라고 했을 때 했다면 이런 일도 없지 않겠나? 그럼 세 번째로 가볼까? 이번에는 그 두 배인 16,000명이다.”
앤디가 외쳤다.
“그래 말해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누가 네 녀석을 이곳에 보냈는지 말하란 말이다!”
그 말에 앤디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난 분명히 아까 답변을 했었다.”
“뭔 개소리냐!”
앤디도 결국 폭발했다.
“무슨 개소린지 궁금하면 네 자신한테 물어보란 말이다!”
타락한 날개는 의아한 시선으로 앤디를 주시했다.
그리고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 앤디가 거짓말을 하거나 허튼소리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나한테 물어보라고? 대체….”
잠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타락한 날개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표정을 보건데 뭔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서, 설마! 내가….”
하지만 그게 타락한 날개가 중간계에서 남긴 마지막 한마디였다.
앤디가 내지른 허공검에 타락한 날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잘려 죽은 것이다.
작은 저항은 있었다.
촉수들이 깐족거린 것이다.
하지만 앤디는 그 거추장스러운 촉수들도 같이 잘라버렸다.
앤디는 멍하니 서있는 타락한 날개를 그냥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털썩.
뒤 늦게 타락한 날개의 몸이 바닥에 드러누운 모양이었다.
앤디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끝났군. …아니, 이제 시작인건가?”
앤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윽고 앤디는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허공 다음에 무상이라.”
앤디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검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공간이 쩌억 갈라졌다.
허공검을 사용하여 강제로 공간을 잘라낸 것이 아닌 마치 커튼을 걷어 낸듯한 느낌이였다.
앤디는 짧은 망설임 끝에 그 공간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앤디의 모습이 그 공간 속으로 사라지고 벌어졌던 공간은 언제 벌어졌었냐는 듯 굳게 닫혔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앤디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이후로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epilogue
1
타락한 날개의 죽음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마왕이 죽었데!”
“마왕이 죽었다고? 정말이야?”
“하늘을 보라고!”
반신반의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항상 우중충하게 거대한 주름처럼 하늘에 자리해 있던 마계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 정말이잖아!”
“꿈은 아니겠지?”
“우리가 이긴 건가!”
“살았다! 살았어! 흑흑!”
사람들은 기뻐서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렀다.
지금까지 고되었던 시간이 가슴 속에서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을 잃어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도 그 흐름에 파묻혀 슬픔을 잠시 잊고 기쁨을 나누었다.
마음 놓고 슬퍼 할 수 있는 날이 찾아 왔기 때문이다.
2
바스락.
어두운 저녁에 몸을 묻고 검은 그림자가 어느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싶어 연신 두리번거렸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아무도 없자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시간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아무도 없을 시간에 맞춰 왔으면서 정작 아무도 없다고 섭섭해 하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들어섰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몸을 곧게 펴고 당당하게 섰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미안해. 안녕.”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미안해 안녕이야! 이 바보야!”
“어, 어?”
그는 놀라 허둥거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인이 그를 향해 소리쳤다.
“머저리! 똥개! 말미잘! 해삼아!”
“….”
“뭐야. 왜 가만히 있어. 오랜만에 몰래 숨어 들어와 놓고 아무런 말도 왜 안하는 거야. 내가 얼마나 얼마나….”
여인이 울먹이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을 부둥켜안고 말았다.
“나 돌아왔어.”
“알아! 바보! 왜 이렇게 늦었어? 얼마나 기다린 줄 알아?”
“미안해.”
“굶고 다닌 건 아니지?”
“어.”
“그런데 날개가 생겼네?”
“어.”
“한쪽은 어디다가 때먹었어?”
“원래 한쪽 밖에 없었어.”
“뿔은?”
“없어.”
“뭐야. 재미없게. 뿔도 없으면서 뭣하고 숨고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