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66화 (37/68)

제7장. 앤디의 죽음

1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안드레이가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기둥과도 같은 모습에 자신들도 모르게 기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그제야 나름 생각의 정리가 끝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말문을 열었다.

“할 말이 없군요.”

힘없는 안드레이의 한마디에 모두 맥이 쫙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믿었던 만큼 실망도 컸던 것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방법이 없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는군요.”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블랙 드래곤의 수장 파이온마저 눈을 번쩍이며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그 방법이라는 것이 뭔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알아내지 못한 타락한 날개의 약점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파이온이 물었다.

“그 약점이라는 것이 뭔가?”

“약점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방법이라고 했지.”

“그래. 그 방법 말이네.”

“죄송합니다.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사실은 사람들의 이상 기대를 높여 실수를 유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파이온은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지금 자신이 그렇게 하려던 행동 자체가 인간의 기득권층이 하는 짓과 다를 게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안드레이처럼 알 수 없는지 자신의 우둔함에 자괴감이 일 정도였다.

순간 의문이 하나 들었다.

드래곤 로드 브라키우드는 어째서 안드레이의 이름이 아닌 앤디의 이름을 말한 것일까?

어차피 모두에게 기억을 전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그래서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파이온은 앤디를 돌아봤다.

아무리 봐도 브라키우드가 그의 이름을 말한 이유를 모르겠다.

안드레이보다 나아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무리들 중에서 가장 평범해 보이지 않는가.

물론 일반적인 범위 내에서야 평범하진 않다.

인간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강력한 오만할 정도로 거대한 힘이 그의 안에 똬리 틀고 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저히 눈에 띄질 않는다.

뭔가 특별한 의견을 내지도 행동을 하지도 않고 말이다.

사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지금 뭘 해야 하지?”

파이온의 질문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우선은 힘을 정비하십쇼. 싸워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난 드래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들이 오시면 규합하여 힘을 모으십쇼.”

“알겠네. 혹시 다른 것은 없나?”

“지금으로서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자연히 진행 될 것입니다.”

‘뭐가 자연히 진행된다는 거지?’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안드레이의 말을 듣고 각자가 할 일을 찾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어떤 이는 최후의 일전을 앞에 두고 검을 한 번 더 잡고 휘둘렀으며, 어떤 이는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의 정리를 했다.

앤디는 후자에 가까웠다.

“앤디!”

“레오나!”

부인인 레오나 공주와 부모인 클레오와 벤존스와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듯 밤을 세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자잘한 이야기와 과거의 회상을 안주삼아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몰랐다.

부모님께 인사하고 부인을 침대에 눕힌 후 자리에서 일어나 각 영지를 돌며 병사들과 자신의 동료들을 만나 인사를 한 후 영지민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어떻게 보면 노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듬는 앤디 만의 방법이었고 선택이었다.

목숨을 건 승부 앞에서 검을 아무리 잡아도 미련이 남는다면 그 검이 무뎌지게 된다.

금쪽같은 시간이지만 무뎌진 검을 휘두를 바에는 시간을 들여 미련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지키고 말리라. 이 모든 것을 지키겠다. 난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을 만나고 난 이후 앤디의 가슴은 신념으로 단단하게 굳었다.

앤디가 검을 들은 것은 그 회의를 열고 사흘 후였다.

그 사이에 적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살아남은 드래곤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 것이다.

총 아홉 마리였다.

파이온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보다 많은 드래곤이 살아남았던 것이다.

“살아줘서 고맙군.”

파이온의 진심이 어린 한마디에 모두 어색한 미소를 던져줬다.

모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 참혹한 현장에서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자신들이 말이다.

파이온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지되어 있었다.

드래곤으로서의 그 넘치던 자부심과 자신감이 사라진 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파이온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자신도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이제는 작은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 갈 수 없었다.

탈리온 공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땅이 숨 쉬고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쌓고 또 쌓았다.

이 모든 흐름에서 자신은 무관한 듯하지만 중심에 서있다.

본질은 원과 직선이지만 흐름은 나선으로 소용돌이 친다.

모든 게 자신의 주위를 돌고 돈다.

그리고 결국 자신도 돈다.

무엇을 중심으로 도는지 모르지만 자신역시 나선의 방향으로 돌고 있다.

지금까지 관심 없던 그 중심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뭐가 있는 것인지, 그것은 자신에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깊은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안개 속을 보고 또 본다.

그러자 안개가 조금씩 걷히는 기분이다.

기분이 아니다.

분명히 안개가 옅어졌다.

서서히 옅어지며 시야가 넓어진다.

이대로 안개가 사라지길 기다리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한 순간 시야에 잡혔다.

어떤 존재의 육체가 그 속에 웅크리고 있음이!

그 육체가 숨을 쉬는 것처럼 들썩인다.

‘넌 뭐냐? 뭔데 내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거냐? 어째서 내 흐름의 중심이 내가 아닌 것이냐?’

그 육체가 자신의 부름을 들은 것일까?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얼굴이 절반쯤 들어 올려 졌을 때 탈리온 공작은 경악했다.

“너, 넌!”

순간 지금까지 감겨 있던 탈리온 공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가 자신을 깨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웠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볼 수 있었을 텐데….

더군다나 완벽한 깨달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얼핏 본 것이 확실한 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장면이 선명한데 얼굴만큼은 마치 검은 장막이 가리고 있는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을 깨운 진득한 살기가 거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탈리온 공작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부릅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뭐, 뭐지?”

탈리온 공작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든 체 바닥을 박차고 그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곳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캡틴 얀 패거리를 비롯하여 안드레이와 앤디 자신의 두 스승인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그리고 아홉 마리의 드래곤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탈리온 공작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쿠궁!

심장이 크게 수축했다.

자신이 전이 받은 기억 속에서 봤던 얼굴들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 저자가 여길 어떻게!”

2

하늘 위에는 세 명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상 가운데 있는 존재가 타락한 날개였다.

그는 검은 은광을 뿜고 있는 날개를 잔잔하게 펄럭이며 자신들을 내려 보고 있었다.

단지 그 뿐인데 모두들 창백한 표정으로 버티고 서는 게 한계였다.

모두들 신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어, 엄청나군.’

‘젠장, 저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니…. 이기는 것은커녕 검을 한번이나 휘두를 수 있을는지 걱정이군.’

기억 속에서 느꼈던 압력과 실제 느끼는 압력은 천지차이였다.

그 기억만으로도 공포를 주기에 충분했는데, 실제 그 기운과 접하니 공포와 경악을 넘어 상실감이 일었다.

그렇다고 주저앉거나 기절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실제 싸우지도 않았는데 주저앉거나 전의를 상실한다는 것은 이들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그들의 자존심은 그 공포와 상실감을 전투의욕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검을 굳게 고쳐 쥐는 모습은 죽더라도 당당하게 검을 휘두르며 죽을 것이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듯했다.

반면에 드래곤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넋을 잃은 듯 했기 때문이다.

바로 타락한 날개의 오른쪽에 위치한 사내 때문이었다.

“로, 로드?”

그러했다.

그는 바로 드래곤들의 로드였던 브라키우드였던 것이다.

정확하게는 타락한 날개의 능력으로 마족화 된 21호라는 존재였지만 말이다.

파이온이 아차 했다.

자신 외에는 로드가 마족화 된 것을 아무도 몰랐던 모양이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파이온이 다급하게 정신으로 말을 걸었다.

[정신들 차리시오. 저자는 더 이상 우리들의 로드가 아니오. 타락한 날개의 저주를 받아 마족이 된 슬픈 존재일 뿐이오.]

“….”

“….”

모두들 파이온의 말에 대답이 없었다.

파이온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실책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모두 알고 있으리라 착각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이들이 정신을 빨리 차리길 비는 수 밖에.’

안 그래도 터무니없는 전력이다.

그때 드래곤 120마리나 되는 거대한 전력으로도 이길 수 없었는데, 지금 이 초라한 전력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파이온은 조심스럽게 안드레이를 돌아보았다.

안드레이는 창백하지만 신중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파이온의 착각일까?

안드레이의 그 표정이 마치 지금 상황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던 듯했던 것이다.

순간 파이온의 가슴에 작은 기대가 어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짐작되고 있었던 상황이라면 어떤 대책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 안드레이가 파이온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나직하게 말문을 열어 한마디를 내던졌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 갈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세요.”

저번에 파이온의 질문에 했던 대답과 일맥상통하는 말이었다.

안드레이의 말을 들은 이들은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이온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저 한마디를 들으니 마음속이 든든해 진 것이다.

저번처럼 가만히 멍하니 당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자신감이 다시 솟구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낮 하찮은 인간의 한마디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믿음을 주다니.

하지만 파이온은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때 타락한 날개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던 밀턴이 말문을 열었다.

“후후후. 이게 중간계 마지막의 희망인가? 정말이지 초라한 희망이군.”

모두들 화가 났지만 저 말에 반박 할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도 할 말은 있었다.

안테르트가 이죽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아, 정말 더럽게 시끄럽군. 야, 깡통 너는 구석에 가서 짜부러져.”

“큭큭큭큭.”

안테르트의 한마디에 모두들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드래곤들 조차 키득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안테르트의 한마디가 그들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준 탓이다.

반면에 밀턴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인간 벌레 따위가 대드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 벌레. 네 녀석이 지금 나에게 깡통이라고 한 것이냐?”

“얼레? 어떻게 알았데? 스스로 자신이 깡통임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넌 좀 사람 될 가능성이 있다.”

그 말에 다시 한 번 동료들이 자지러졌다.

“사람 될 가능성이 있데. 킥킥킥.”

“크크크크크크크.”

드래곤들도 대놓고 웃기 시작했다.

물론 밀턴의 표정은 더 보기 좋게 구겨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노골적인 살기가 물씬 풍겨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반면에 타락한 날개는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기세도 접고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밀턴은 타락한 날개에게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원래 이런 존재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밀턴이 안테르트와 주변에서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찢어 죽여버리겠다. 감히 나를 보고 깡통이니 찌그러져 있으니 뭐니 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 대답에 안테르트는 더욱 이죽거렸다.

“깡통 따위에게 겁먹느니 그냥 혀 깨물고 죽어야지.”

“크아악! 자꾸 깡통깡통 할 것이냐!”

“그럼 좀 아가리를 닥치시든가.”

밀턴은 눈에서 살기 광선이라도 뿜어 낼 것 같은 시선으로 안테르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안테르트가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네 녀석이 왜 깡통인 줄 아냐? 원래 가득히 차있는 놈들은 조용한 법이거든. 있는 놈들은 조용하단 말이야.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놈들이 항상 문제라고. 어딜가나 지 능력도 모르고 떠들거든. 빈 수레가 요란한 거 알지? 그거랑 같은 거라고.”

“그래? 큭큭. 그럼 내 능력을 보여주마.”

팟!

밀턴의 모습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안테르트의 코 앞에서 불빛이 번쩍인다.

창!

안테르트와 밀턴이 충돌한 것이다.

그때 안테르트 앞에 밀턴의 잔영이 완성되기도 전에 검기가 쏘아 올려졌다.

베르커스의 공격이다.

서걱!

밀턴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그리고 약 30미터 떨어진 곳에서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는 히쭉 웃으며 그런 밀턴의 눈빛을 태연하게 받아냈다.

그리고 도발하듯 밀턴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기까지 했다.

“덤벼. 깡통.”

으득!

밀턴이 다시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에게 충돌했다.

팟! 팟! 팟!

창! 챙! 파칫!

밀턴과 안테르트 그리고 베르커스는 짧은 잔영만 남기며 충돌하고 사라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사방에 그들이 충돌한 흔적으로 불똥이 튀었다.

마치 불꽃놀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드래곤들이 놀랐다.

아니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자신들이 모두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마왕을 인간 둘이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한 상대를 하는 수준이 아니다.

마왕 밀턴이 그 둘에게 밀리고 있었다.

거의 압도적인 수준으로 말이다.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여유로움에 비해 밀턴의 움직임에는 조급함이 보일 정도였던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어떻게….”

“설마 인간이 아닌 건가?”

드래곤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만도 했다.

인간이 저런 움직임과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넘어 인간이 마왕을 농락하며 전투를 할 정도라니.

정말이지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다.

그들도 상당한 능력을 보이는 강한 인간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수준에서 강하다는 것이지 그 힘이 자신들을 넘어 설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상식이 깨지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둘이라서 강한 게 아니었다.

둘의 톱니바퀴와도 같은 공수의 교대는 단순한 한 몸 이상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저 정도 능력이라면 마왕과 일대일로 겨뤄도 쉽게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파이온이나 로드의 말을 듣고도 인간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냐며 무시하고 있던 드래곤들의 머릿속에 누군가 거대한 폭탄을 떨어 트려 놓은 것 같았다.

드래곤들만의 놀람도 아니었다.

밑에서 그들의 전투를 보고 있던 케산, 바이널, 패르스, 캡틴 얀의 놀람은 더욱 컸다.

“역시 괴물이었어.”

“젠장. 그때 앤디가 왜 말렸는지 이제야 알겠군. 만일 그대로 싸웠다면 지금 이 자리에도 있지 못할 뻔 했잖아.”

“쳇!”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었는데, 저 모습을 보니 복수에 대한 마음이 쏙 들어간 것이다.

저건 인간의 강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초월했다는 초인을 넘어서는 천외천의 무공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탈리온 공작도 신음을 흘리며 그들의 전투를 집중했고, 앤디와 안드레이만이 타락한 날개의 거동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때 타락한 날개의 시선이 앤디를 향해 내려왔다.

3

“이제 네가 왜 깡통 인줄 알겠냐?”

“시끄럽다! 그만 죽어라!”

“미안하지만 아직은 죽을 생각이 없다고 깡통 친구. 특히 네 녀석 손에서는 말이지.”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도발에도 이젠 화를 낼 수 없었다.

다만 짜증이 났다.

인간 따위도 어떻게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기가 막혔다.

“크아아아아!”

싸우다 말고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미친 놈. 그렇게 소리 지르면 뭐가 달라지냐?”

“이제 끝을 내야겠군.”

“그럴까?”

너무나 쉽게 마왕의 목숨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이었다.

같은 편인 드래곤들이나 인간들도 기가 막히는데, 밀턴의 입장에서는 어땠겠는가.

“이 놈들!”

스걱!

한 순간의 일이었다.

밀턴의 다리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다리가 잘려나간 허공에는 기다란 검은 공간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

밀턴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떨어진 다리를 보았다.

밀턴 만이 아니다.

이 상황을 알아본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탈리온 공작과 앤디 그리고 타락한 날개 뿐이었다.

“허공검….”

탈리온의 흐느끼는 듯한 한마디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온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이 겨우 벽을 넘어 깨달은 기술을, 무엇보다 저 기술을 자신이 사용한다면 녹초가 돼서 쓰러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스승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쉽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냥 단순한 오러블레이드를 휘두르는 것처럼 말이다.

타락한 날개가 조차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라그나 블레이드(ragna blade)인가? 설마 한낮 인간이 시공을 가를 정도로 강한 힘을 사용 할 수 있다고?”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타락한 날개의 표정에 경계가 어렸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라그나 블레이드의 정도가 되는 날카로움이라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밀턴이 자신의 다리를 보고 있던 와중에 오른쪽 팔이 가볍다고 느꼈다.

“어라?”

어깨를 보니 팔도 어느새 잘려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자랑스러운 네 개의 뿔도 마치 두부처럼 썰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으아 …으아아아!”

처음으로 밀턴의 얼굴에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에게서 전의란 찾아 볼 수 없었다.

드래곤도 아닌 인간에게 자신이 이렇게 당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히 당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을 정도라니!

두 인간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마치 괴물로 보는 듯한 시선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타락한 날개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던졌다.

살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타락한 날개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주시만 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과 상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밀턴이 그런 타락한 날개를 향해 외쳤다.

“사, 살려줘!”

그 말과 동시에 밀턴의 머리에서부터 가랑이 사이까지 붉은 실선이 비췄다.

순간 그 붉은 실선에서 핏방울이 팟하고  터지더니 좌우로 스르르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사, 살려….’

죽은 것이다.

그의 전신에 모래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그 모습이 정말 볼 품 없었다.

중간계를 뒤집어엎기 위해 마계에서 올라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주는

그 힘을 사용하여 천계 그리고 신을 올려다보던 이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죽음이었다.

물론 마왕의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니 마계로 강제 소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힘을 잃고 마계로 소환된 마왕의 미래는 뻔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검은 빛의 에너지가 쏟아지더니 그 밀턴의 시체를 강타했다.

콰과과과광!

모두들 놀라 그 에너지가 쏟아진 위치를 돌아보니 21호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21호의 브레스였다.

바닥에 자리하고 있던 밀턴의 시체는 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21호는 무슨 생각인지 밀턴이 죽어 사라진 그 장소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을 내려보았다.

그러다 드래곤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드래곤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단체로 날아올랐다.

자신들의 순서가 왔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인간이라. 인간….”

타락한 날개가 혼자 중얼거리며 웃었다.

이 세상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자신의 생각보다 재밌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타락한 날개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바닥에 선 순간 저벅저벅 앤디들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수수깨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너희를 만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것일까?”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누가 대답할 수 있겠는가.

타락한 날개 앞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숨 쉬는 것이 힘들어졌다.

밀턴을 물리치고 자리로 돌아온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안색도 굳어버렸다.

이건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다.

자신들도 모르게 뒷 걸음질을 쳤다.

그런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를 보며 밀턴이 웃는다.

케산과 바이널 패르스 캡틴 얀을 보며 웃는다.

안드레이를 보고 웃는다.

그리고 앤디를 보고 고개를 꺄웃거렸다.

앤디만이 자신을 보며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가 앤디를 향해 질문했다.

“너는 뭐냐?”

“나에게 묻는 것이냐?”

“그렇다.”

“무엇을 물어보는 거냐?”

“너는 어째서 나를 두려워 하지 않는 거지?”

“너를 어째서 두려워해야 하는 거냐?”

앤디의 대답에 타락한 날개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무슨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너는 내가 두렵지 않느냐?”

“적이 강하면 두려워해야 하는 거냐?”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두렵다. 죽음이 어째서 두렵지 않겠는가.”

타락한 날개가 다시 묻는다.

“그런데 내가 두렵지 않다고?”

“너와 죽음은 같은 뜻이냐?”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꺄웃거렸다.

그리고 씨익 웃는다.

“그건 아니지. 하지만 지금껏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그래서 별로 그 문제에 관해 신경 써본 적이 없었는데,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짜증나는 군.”

슈슛!

“헛!”

순간 앤디의 입에서 헛바람이 튀어나왔다.

앤디가 반응도 하지 못할 속도로 타락한 날개의 촉수가 뻗어 나와 자신의 가슴을 거칠게 후벼 팠기 때문이다.

늑골 따위는 괘념치도 않는 다는 듯이 가볍게 들어간다.

푸북!

“커헉!”

앤디의 거친 비명이 터진다.

그러나 앤디는 그 와중에도 눈을 부릅 뜨며 자신을 붙잡은 타락한 날개를 노려보았다.

“…이 자…식이….”

“오호?”

타락한 날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 꼬리를 올렸다.

자신이 가슴을 뚫고 심장을 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촉수를 강하게 부여 잡더니 반대 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휘두르려 했기 때문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공격의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정말이지 놀라운 근성이었다.

타락한 날개는 그 근성을 보아 단번에 심장을 뽑아 죽이지 않고 촉수를 밀어 넣어 심장을 감싸잡았다.

그 결과 촉수가 가하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앤디의 오른쪽 심장 주위를 감싸고 있는 흉골과 쇄골 그리고 늑골과 척추가 모조리 가루가 되어 으스러졌다.

우두두둑!

“크허헉!”

앤디의 입에서 피 화살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앤디의 몸이 뼈 없는 문어처럼 기이한 각도로 축 늘어졌다.

“앤디!”

모두 절규와도 같은 비명을 토했다.

설마 앤디가 저렇게 죽을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파팍!

타락한 날개의 촉수가 앤디의 가슴에 주먹 만한 구멍을 뚫어 놓고 그 속에서 유유히 펄떡거리며 거칠게 뛰고 있는 붉은 심장을 끄집어냈다.

펄떡. 펄떡. 펄떡. 펄떡.

“건강한 심장이군. 큭큭. 맛있겠어.”

타락한 날개가 앤디의 심장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아득아득.

꿀꺽.

“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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