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마신이 지배하는 세상
1
“브라키우드님께 연락을 보냈지만 자리에 없다네요. 오시면 바로 전해드린답니다.”
앤디의 말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그리고 혹시나 몰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해놨습니다.”
“다른 친구들?”
“예전에 이야기 드렸죠? 해적의 섬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을 불렀단 말이냐?”
“예. 힘이 필요한 이 시점에 적지 않은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안드레이가 잠시 침묵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네 말대로 조금이나마 힘이 모여야 할 때지. 분명 큰 도움이 될거다. 잘했다.”
안드레이 말에 앤디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 마음이 편치 못하네요.”
“걸리는 게 있다고?”
“예.”
“해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냐? 그런 거라면….”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뭐가 걸린다는 말이냐.”
앤디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히쭉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죠. 헤헤.”
“원, 싱겁긴….”
해적들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단숨에 날아왔다.
앤디와 안드레이가 이야기를 나누고 만 하루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앤디가 걱정하던 사건이 터졌다.
첫 시작은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혀끝에서 시작되었다.
“뭐지? 저 애송이들은?”
“풋내가 풋풋한 것이 어른들을 보고도 인사하지 않는 것을 보니 싹수가 노랗군.”
그 말에 명색이 해적인 캡틴 얀과 수하들이 발끈했다.
그들의 성정상 가만히 듣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바로 대꾸하지 못한 이유는 어른 어쩌고 싹수 어쩌고 하는 이야기에 너무 기가 막혔던 탓이다.
척 보기에 20대도 안지나간 어린 녀석들이 떠드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녀석들이 말이다.
케산이 가장 먼저 말을 토했다.
“이런 미친 기생오래비 애새끼들이 어디서 혓바닥을 놀려? 그 건방진 혓바닥을 색종이처럼 접어서 돗단배 모형으로 오려 버릴라.”
그 말에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허.”
순간 안테르트의 몸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탓!
“컥!”
케산이 숨을 헛 삼키며 고통에 버둥거린다.
“뭐, 뭐약! 케케케켁!”
케산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에게 목이 잡혀 그대로 허공에 들려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눈을 최대한 내리깔며 누군지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었던 기생오라비중 한 녀석이었다.
‘어, 어떻게?’
자신 같은 고수가 움직임도 파악하지 못했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참고로 더 이해 할 수 없게 되었다.
머리로 피가 통하지 않아 서서히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잔영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익숙한 뒷모습.
캡틴 얀이었다.
“장난은 그만하지?”
캡틴 얀의 싸늘한 한마디에 안테르트가 피식 웃었다.
“오호? 옹알이 정도는 하는구나.”
얀이 눈을 가볍게 찡그리더니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휘둔다.
안테르트는 얀의 공격을 사뿐히 피하며 오른손으로 목을 쥐고 있던 케산을 풀어줬다.
케산은 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켁켁거렸다.
한참을 기침하고 일어난 케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를 노려보았다.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는 ‘고것들 생긴 것처럼 귀엽게 구는 군’이라고 말하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을 던졌다.
얀이 조심스럽지만 적대감을 숨기지 않고 질문했다.
“당신들은 누구지?”
살기가 한껏 치 올라가고 있을 때 앤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깐만요.”
해적들이 잠시 앤디를 보고 반가운 모습을 슬쩍 띄웠다.
하지만 곧 반가운 표정을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인사대신 질문을 던졌다.
“저 자들은 누구지?”
“왜들 그래요. 같은 편끼리.”
앤디의 말에 케산을 돌보던 바이널이 되묻듯 묻는다.
“같은 펴언?”
“예. 그러니 조금 좋게….”
“우리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고 공격을 하는 저런 인간들이 같은 편이라면 우리들은 그만 돌아가겠네.”
바이널의 말에 앤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심정이 이해 갔기 때문이다.
먼 길을 오자마자 이런 상황을 겪는다면 자신도 비슷하게 모습을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조차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에게 악감정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아니, 단순히 악감정이라고 할 수 없는 사이다.
정말 이런 위급한 사태가 아니었다면 자신 아니면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저 둘이 숨이 끊어지지 않고서야 같은 장소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얀이 앞으로 나섰다.
“바이널 진정해라.”
“캡틴. 하지만….”
얀은 손을 가볍게 들어 바이널에게 조용히 하라고 지시했다.
“앤디. 저들은 누구지?”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나?”
“분노? 어째서 내가 분노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얀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앤디를 넘어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를 노려보았다.
왠지 짐작 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듯한 눈빛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발도를 할 것처럼 집어넣었던 검 손잡이 근처에 손을 끌어갔다.
그것을 보며 앤디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이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정체를 밝히는 순간 검을 뽑아 들 것 같았다.
자신도 다르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앤디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혹시, 설마 그들은 아니겠지?”
앤디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자네가 알고 있는 그들이 맞을 걸세.”
“흑백쌍마!”
짧은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날카로는 소음.
파칭!
한 순간의 일이었다.
모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테르트가 얀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앤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도 검을 뽑아들었다.
얀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얀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얀은 저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안테르트나 베르커스라면 거리낌 없이 얀을 죽일 수도 있다.
“저주받을 마교 놈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얀의 이를 가는 목소리에 안테르트가 피식거렸다.
“그런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찢어죽일 정파 나부랭이 새끼였군.”
앤디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얀. 그만둬. 그쪽도 그만하지?”
“흥!”
안테르트가 거칠게 검을 내리며 검 집에 넣었다.
적이 눈앞에 검을 뽑아들고 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검이 없어도 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라는 광오한 자신감이라고 해야 할까?
얀의 몸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그때 앤디가 말했다.
“얀. 저번에 나에게 했던 말은 뭐지? 마교 라고 다 나쁜 놈들은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건가?”
그 말에 얀이 고개를 돌리며 거칠게 콧방귀를 끼고는 대꾸했다.
“했지. 분명히 그렇게 말했네. 하지만 말이지 정말 나쁜 놈들도 있다는 말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나?”
“….”
“저 자들이네. 저 자들이 바로 그런 인간들이라네.”
앤디는 얀의 그 말에 뭔가 사연이 있음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반대편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제 모두 그만들 하는 게 좋겠군요.”
그 말에 모든 이의 시선이 저절로 뒤를 향했다.
안드레이였다.
“처음 뵙는 분들도 계시는 군요. 지금 인사를 하고 싶지만 급한 일이 생겼으니 우선 회의실에 가서 인사를 하도록 하죠.”
2
케산, 바이널, 패르스, 제시카, 그리고 캡틴 얀.
앤디, 셀린, 안드레이, 탈리온 공작과 흑백쌍마라고 불리는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안드레이가 직접 짧은 인사를 하며 각자의 소개를 했다.
하지만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흉흉했다.
긴장감으로 바짝 조여 있다고 해야 할까?
안드레이가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소개 인사를 마친 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과 자신들이 알아낸 것 그리고 짐작되어진 일들에 관해서 이런 저런 긴 설명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모두들 사태의 위급함을 파악했음인지 처음과 같은 소란을 접고 군소리 없이 심각하게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한참 후, 안드레이가 모든 설명을 정리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므로 과거는 어쨌든지 지금은 눈앞에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입장입니다. 개인의 원한으로 손을 잡지 않는다면 세상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제야 모두들 신중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들어서는 제대로 파악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안드레이의 말속에 담긴 다급함과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공염불은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패르스가 질문했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라면 우리만으로 무슨 힘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오. 하지만 백짓장도 맞들면 났다고 하지 않소. 지금 우리들의 힘은 어찌보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보면 대륙 최강의 능력을 지닌 정예들이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오.”
그 말에 모두들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존재들은 전생에서 이미 역대의 강자들로 불릴 만큼 최고의 능력을 지닌 최강의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약간 장난을 섞어 우습게 말하자고 하면 올스타라고나 할까?
얀이 눈을 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찌보면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누구하나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한 다음 얀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이 가볍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만큼 심력을 많이 소모했다는 뜻이다.
“좋소.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이 세상을 같이 사는 동료로서 말이오. 하지만 이 약속은 일시적인 계약에 불과하오. 모든 일이 해결 된 후에 저들은 다시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그러니 가능하다면 저들과 우리를 합동작전에서 떨어뜨려 주시오. 단순히 싫어서가 아니라 가까이 있으면 분명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이니 말이오.”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상황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그 이상을 참견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바이널이 투덜거리듯 몸을 의자의 한계까지 뒤로 젖히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할 일은 정해졌군. 마왕, 아니 마신이라고 했던가? 여하튼 어떻게 잡을 예정입니까? 작전은 있습니까?”
“작전이라고 할 것은 아니고, 나름의 대책은 있습니다만….”
안드레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흐리자 얀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뭐죠? 혹시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부분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숨긴 것도 감춘 것도 없습니다. 다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해 보십쇼. 이제 좋든 싫든 힘을 합해야 하는 입장이니 모든 생각을 공유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씀이 옳습니다.”
“혹시 조금 전에 저희에게 말씀하셨던 드래곤들의 도움에 관한 부분 때문에 그러십니까?”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이십니까?”
안드레이는 짧은 고민 끝에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드래곤들이 우리와 힘을 합하는 것에는 걱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드래곤들이 우리들과 힘을 합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을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자신이 혼자하고 있던 생각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었다.
“저는 제가 마왕이라면 그리고 힘을 얻었다면 가장 처음 무엇을 했을까 하고 고민해 봤습니다. 그러자 한 가지 생각이 가장먼저 떠오르더군요.”
“그 생각이 뭔가?”
탈리온 공작의 질문에 모두들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변수의 처리입니다.”
“변수의 처리?”
사람들이 잠시 웅성거렸다.
약간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변수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인가요?”
셀린의 질문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변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보다 변수가 무엇이냐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변수가 무엇이냐고요? 혹시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변수라는 게 저희 같은 세력이나 힘을 말하는 것인가요?”
안드레이가 셀린을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맞다. 그렇다면 마왕에게 가장 큰 변수라는 것은 무엇일까?”
“…드래곤이겠군요.”
셀린의 한마디에 모두가 술렁였다.
“드래곤들을 처리했을 거라고?”
“그게 말이 되는 건가?”
모두들 각자 옆에 있는 사람들과 혼잣말과도 같은 질문을 되뇌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안드레이가 커져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볍게 정리했다.
“인간도 그러지 않습니까? 아무리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작은 힘을 지니고 있는 정적들을 처리하고자 하는 것 말입니다. 마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대업을 이루려 하기 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루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 반발이 생기게 되면 적지 않은 신경이 쓰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애초에 정리하고자 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말이 됩니까?”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지요.”
안드레이의 설명에 셀린이 다시 말했다.
“인간들이 이런 생각을 할 정도라면 드래곤들도 생각을 했겠지요. 그들은 인간보다 뛰어나지 않나요?”
“물론 뛰어나지.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단다.”
“어떤 문제죠?”
“드래곤들이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착각이요?”
“그래 착각. 지금 이 싸움을 중간계의 싸움이 아닌 드래곤 자신들과 마왕의 싸움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면 충분히 내가 걱정하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
“중간계의 싸움이 아닌 드래곤 자신들과 마왕의 싸움이라고요?”
셀린의 그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검을 뽑아들었다.
화앗!
그와 동시에 자신들이 자리하고 있는 회의실 안에서 거대한 섬광이 번쩍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일행들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3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
모두들 공격할 자세를 갖추고 긴장을 늦추질 않았다.
하지만 섣부르게 공격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존재에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 속에는 놀람과 감탄, 그리고 이유모를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 놀라워.”
“누구냐!”
바이널의 외침에도 태연하게 대답대신 자신의 할 말만 했다.
“혹시 드래곤들과 인간들이 힘을 합한다면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 존재는 직접 안드레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드레이가 잠시 뭔가 짐작했다는 듯 얼굴에 공손함이 베기 시작했다.
“위대한 존재시군요.”
그 말에 그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고, 사람들은 모두 당혹스러워했다.
정말 드래곤이 자신들을 찾아 올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드레이의 말에 모두들 이성을 찾고 자신들이 무기를 다시 갈무리했다.
안드레이가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잠시 어린 어둠을 알아차린 이가 있었다.
지금 안드레이의 인사를 받은 드래곤이 바로 그였다.
그는 안드레이를 향해 이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실망했나? 미안하군.”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임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안드레이의 말에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눈앞의 인간이라면 저런 말을 해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대체 무슨 말을 주고 받고 있는지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들에게 설명해 줄 것이니 말이다.
그때 그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블랙 드래곤의 수장인 파이온이라고 한다네.”
“저는 안드레이라고 합니다. 파이온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자네들에게 그런 환대를 받을 자격이 없네.”
“이곳에 와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환대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파이온이 슬픈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말을 해주니 정말 고맙군. 그건 그렇고 조금 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겠나?”
“인간과 드래곤이 힘을 합한다면 가능성이 있겠냐는 질문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가능성이 올라는 갔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 대답에 파이온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인간도 알고 있는 것을 자신이 알지 못해 그 엄청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급한 욕심과 마음으로 인해 동족을 전멸에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신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지자 모두들 경악했다.
모두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눈치는 있는 것이다.
모두 놀람을 금치 못한 눈빛으로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어떤 특별한 대답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안드레이가 이야기한 추측이 모두 들어맞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예전부터 인정은 하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다.
안드레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천재임을 말이다.
파이온이 푸념하듯 말했다.
“자네들을 진작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예전에 만났다면 인간들이 하는 말 따위는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한 말의 의미는 현재의 기억을 가진 과거의 시점에서 만났었으면이라고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파이온의 푸념을 이해한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파이온이 피로로 인해 깊이 파인 눈으로 안드레이의 위로를 받아들였다.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전달 해야 할 것이 있어서라네. 누가 앤디인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앤디에게 향했다.
파이온이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앤디를 주시했다.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밝혔다.
“제가 앤디입니다.”
“로드께서 자네에게 전해주라고 한 것이 있네.”
지금 말한 로드가 누군지 번거롭게 되묻지 않았다.
정황상 로드가 브라키우드임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저에게 주실 것이 뭡니까?”
앤디의 질문에 파이온이 대답했다.
“기억이다.”
“기억이라고요?”
“드래곤 로드께서 목숨을 걸고 우리에게 넘기신 직접 간추린 정보가 담긴 기억이라네. 받겠는가?”
“물론입니다. 그 속에 적에 대한 정보가 있겠지요?”
“그렇다.”
“가능하시다면 우리 모두에게 주실 수 있으십니까?”
파이온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다. 지금 믿을 이들은 자네들뿐이니. 어차피 내가 전하지 않아도 모두 알게 되겠지. 그러니 사소한 말 한마디로 잘못된 정보를 공유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전해주겠다.”
파이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손바닥에서 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열한개의 줄기가 되어 회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스며들어갔다.
모두의 머릿속에 그 모든 상황과 장면이 생생하게 마치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처럼 떠올랐다.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준이 아니라 펄쩍 뛴다.
믿을 수 없다는 부정과 공포가 외부로 표출되어 전신을 부들부들 떨기에 이르렀다.
누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이 이런 존재라니!”
“이길 수 없어.”
“불가능해.”
급격히 창백해진 얼굴.
지금까지 자신에 충만해 있던 절대고수들이 하나같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셀린 같은 경우는 기절을 했고, 다른 심기가 조금이라도 약한 사람들은 휘청거리며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한 피로감을 드러내고 말았다.
눈을 감아도 타락한 날개의 엄청난 존재감이 떠오른다.
그 떠오르는 존재감만으로도 몸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폭사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말은 직접만난다면 어떻다는 이야기겠는가.
믿어지지 않았다.
단순한 마왕이 아니라 마계의 지배자이며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자신들이 싸워야 할 적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건 그냥 자살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다를 바 없지 않는가!
“후후후후.”
“큭큭큭큭큭.”
이젠 웃음이 나온다.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기가 막혀서 자신도 모르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결과가 웃음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마신을 적으로 삼고 싸우려고 모였다는 이 상황이 너무나 넌센스 문제처럼 짓궂은 장난질에 농락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모두들 그런 감정을 갈무리하기에 이르렀다.
너무나도 큰 충격에 당황하여 잠시 감정을 드러내긴 했지만 명색이 초인들이다.
하나가 된 것처럼 침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이 상황에 대한 타개책을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그렇게 쉽게 떠오를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막막해졌다.
드래곤들의 절대 마법들이 통하지 않는 그에게 무슨 공격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나마 오러를 통한 공격은 소멸되지 않고 유지가 되는 것을 보면 뭔가 답이 있을까도 싶지만 날개로 보이는 촉수의 덩어리들을 뚫을 자신은 없었다.
자신들 모두 합심하여 덤벼도 아마 불가능 할 것이다.
한마디로 난공불락의 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잠시 이런 생각도 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긍하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곧 고개를 크게 가로저으며 흔들었다.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곳은 중간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마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마계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