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62화 (33/68)

제3장. 멸망의 징조

1

순식간에 드래곤들은 절반의 패로 갈렸다.

반으로 갈렸다고는 하지만 이미 전체적인 흐름은 파이온의 말대로 복수를 하자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는 상황이었다.

단지 나눠진 이유는 파이온의 말에 동조하여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자는 부류와 조금 더의견을 나눠서 생각을 정리한 후에 가자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파이온은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정해진 것이라면 바로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 아닙니까? 언제까지 입 아프게 서로 떠들기만 할 겁니까?”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계속 정리하고만 계십시오. 마음이 정리가 되어 있는 우리들은 먼저 가겠습니다.”

파이온이 그렇게 쏘아 붙이듯 말을 하고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브라키우드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파이온은 태연하게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파이온과 그에 동조하던 드래곤들이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순간 짧은 빛을 뿌리며 허공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런 파이온들을 보며 베르카와 브라키우드는 안타까운 눈빛을 던졌다.

베르카와 함께 남아 있던 다른 드래곤들은 파이온과 동료 드래곤들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갈등이 더욱 커진 듯 술렁이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아….”

베르카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들을 막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르카와 남은 드래곤들이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브라키우드가 드래곤들의 시선을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저들의 뒤를 따라 갑시다.”

“브라키우드님.”

베르카의 나직한 목소리에 브라키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베르카의 마음을 이해한다네. 나 역시 지금 이 상황이 옳은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어. 우리가 단합한다고 타락한 날개를 정말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면 모두 힘을 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은가?”

“저 역시 파이온님이나 브라키우드님의 말씀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유 모를 불안감이….”

베르카가 말끝을 흐렸다.

브라키우드가 가볍게 베르카의 어깨 다독여 주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베르카의 묵직했던 가슴이 한결 풀어지는 듯했다.

브라키우드가 베르카를 향해 작은 고갯짓을 한 후 주위 드래곤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

파팟!

브라키우드의 몸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드래곤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넓은 동공에는 바람소리만이 애처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 농부가 하늘을 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저, 저게 뭐지?”

“서, 설마 드, 드래곤?”

“말도 안 돼!”

고오오오오.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며 허공을 가득 메웠다.

그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는 드래곤이 아니 드래곤 무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드래곤 백이십 마리의 대부대가 허공을 까맣게 메운 그 장면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하늘이 거대한 드래곤들에 의해 세상과 단절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연히 그 장면은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굳거나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모두 입을 쩍 벌리며 넋을 잃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현실감이 없었다.

자신들이 착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두 눈을 부벼봐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대한 위용.

사람들은 드래곤 부대의 모습에 두려움을 넘어 경외감을 느꼈다.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런 그들이 우뚝 멈춰섰다.

그들 앞을 막아서는 어떤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드래곤들이 그들을 목격함과 동시에 몸에서 살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분노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쏘아 보냈다.

녀석들은 바로 타락한 날개를 보좌하던 그리고 어린 드래곤들을 농락했던 바로 그 마족들이었기 때문이다.

반쪽 날개를 가볍게 흔들며 허공에 선 다섯 명의 마족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백이십 마리의 드래곤 무리를 막아섰다.

그들은 드래곤들을 전혀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도발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래곤들은 분노가 극도로 응축된 싸늘한 시선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그리고 다섯 마리의 드래곤이 앞으로 나섰다.

그 다섯 마리 중에는 파이온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이온이 이를 갈며 말했다.

“건방진 녀석들.”

그러자 마족 녀석들이 입 꼬리에 머금은 미소를 더욱 짙게 드리우며 웃음소리를 흘렸다.

“드래곤이라고 해서 조금 긴장했었는데, 막상 싸워보니 별 것 없더만.”

“역시 전설이나 소문 따위는 믿을게 못된다니까.”

“큭큭큭큭큭.”

파이온이 녀석들의 대화에 조용히 끼어들었다.

“그럼 그 소문과 전설이 진실보다 못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주마.”

리쿤이 반쪽 날개를 흔들며 비웃음을 흘린다.

“큭큭. 얼마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쿤의 눈이 휘둥그래졌고,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쿠과광!

바닥이 움푹 파이며 리쿤이 땅속으로 사라진다.

리쿤이 있던 자리에 파이온이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서서 아래를 내려 본다.

남아 있던 네 명의 마족이 파이온에게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파이온 근처에도 도달 할 수 없었다.

다른 네 마리의 드래곤들이 각기 녀석들을 공격해 온 탓이다.

마족들은 어쩔 수 없이 방어를 택했고, 곧 자신의 상대 드래곤과 엉키며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거친 굉음과 폭음이 사방에서 울린다.

파이온은 태연하게 주위의 소음에 신경을 끄고 바닥만 내려 볼 뿐이었다.

그때 땅이 폭발하듯 터지며 흙과 돌조각들을 사방에 흩뿌렸다.

그 한 가운데 리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표정이었다.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혹감도 잠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이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도마뱀 새끼가 감히!”

땅을 박찬 리쿤의 몸이 광선과 같이 긴 잔영을 남기며 파이온을 향해 돌진했다.

파이온은 가볍게 리쿤을 피하며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었다.

순간 거친 바람이 일어난다.

리쿤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파이온의 거대한 신형이 다급히 자리를 잡는 리쿤의 바로 측면에 모습을 드러낸다.

팔을 휘두르자 리쿤의 얼굴이 그대로 틀어지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파이온이 손을 들어 헬 파이어를 주문도 없이 만들어내서 그대로 쏘아 던진다.

리쿤은 자신에게 날아오는 헬 파이어를 보고는 양 팔을 모아 다급하게 엑스자로 만들어 상체를 방어했다.

쿠과과과광!

폭발이 가시고 그 속에서 전신이 넝마가 된 리쿤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쿤이 이를 드러내며 파이온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파이온이 여유롭게 그런 리쿤을 보며 말한다.

“내가 도마뱀이면 넌 도마뱀 장난감이겠군?”

치욕적인 한마디에 리쿤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시끄럽다!”

파앗!

리쿤이 파이온을 향해 양손을 휘둘렀다.

리쿤의 양손에서 형성된 강기가 우박처럼 파이온을 향해 쏟아졌다.

슝슝슝슝슝!

파이온은 자신의 날개를 펼쳐 거대한 몸을 가렸다.

리쿤의 공격이 파이온의 날개에 막혀 폭음을 터트리며 사그라든다.

퍼버버버버버벙!

파이온은 작은 피해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리쿤은 이번 공격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파이온의 사각지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파이온의 날개가 휘둘러지며 리쿤의 몸을 쳐냈다.

터엉!

리쿤이 전신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뒤로 날아갔다.

자신이 뒤로 튕겨져 날아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다가온다.

순식간에 자신을 따라잡은 파이온이 거대한 주먹을 거침없이 휘둘렀다.

리쿤이 몸을 틀며 공격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생각에 불과했다.

그 주먹을 피하지 못했단 말이다.

퍼억!

“크악!”

파이온의 주먹에 적중당한 리쿤은 엄청난 고통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리쿤은 도저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꿈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강함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2

쿠과과광!

다시 땅 깊은 곳에 파묻어진 리쿤의 머릿속에서는 현실을 부정하는 생각으로 가득히 들어찼다.

‘말도 안 돼. 내가 한낮 몸집만 거대한 도마뱀 따위에게….’

리쿤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패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다시 태어난 날 이후로 말이다.

분명 자신은 죽었었다.

타락한 날개에게 심장을 뽑힌 후에 말이다.

자신은 그의 손에 쥐어진 펄떡거리는 자신의 것이 분명한 붉은 심장을 보며 숨을 거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마족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냥 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자아를 찾고 인간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음에도 머릿속에 그 어떤 정체성의 혼란도 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짐작이 가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고는 하지만 그게 기억을 잃고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기억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단 뜻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취해 있었다는 말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주체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힘에 취한 자신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자신은 타락한 날개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그의 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힘을 사용하면서 무의식적으로 효율성을 찾게 되었고, 과거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기운을 다스리게 되자 조금씩 기억과 자아가 돌아오게 된 것이라 보였다.

마족이 되어서 불만스러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만족스러움 그 이상이다.

마족으로 된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인간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 거대한 힘.

그 힘은 리쿤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만들어 주었다.

그에 따른 우월감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의 쾌감을 선사해 주었다.

더 이상 다른 그 어떤 이도 자신을 어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감히 머릿속에서조차 떠올려보지도 못했던 드래곤과의 전투를 통해 확신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놀랍게도 드래곤 앞에 섰음에도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무리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이 자신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쩔쩔 맸던 것이다.

그게 우습고 또 즐거웠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이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십 번의 싸움도 아니고 한두 번의 공방이 진행 될 때마다 전투감각과 마나를 다루는 것이 능숙해져갔던 것이다.

그 결과 본신으로 돌아간 드래곤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만일 처음부터 본신으로 돌아가 있던 드래곤과 싸웠다면 아마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드래곤 하트를 흡수함으로서 능력은 배로 더 강해졌다.

자신의 성장을 본 타락한 날개도 자신을 보며 놀라는 눈빛을 던지지 않았던가.

이런 힘이라면 중간계를 자신 혼자 정복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게 뭐란 말인가.

퍽!

“커허헉!”

그토록 강해진 자신이 반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당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상대의 공격은 커녕 움직임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상대가 공격하면 공격하는 대로 모두 얻어 맞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독한 악몽이다.

아니 설마 강해졌던 것이 꿈이었던 건가?

지금에 와서야 맞는데 이골이 났는지 다섯 번 중에서 한 번은 피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미 체력이 바닥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상대의 공격을 파악하기도 전에 죽을 것이다.

상대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날개로 후려치고. 발로 밟고. 주먹으로 갈기고. 머리로 박는다.

리쿤의 전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은 저 블랙 드래곤의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저 거대한 몸집을 지닌 도마뱀의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돌아봤지만, 다른 마족 동료들도 거의 비슷한 상황이었다.

절망이다.

답답함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야아아!”

리쿤이 붉은 눈을 부라리며 파이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퍼걱!

“크악!”

리쿤은 파이온의 강력한 발차기에 머리를 강타 당했다.

머릿속이 멍해지더니 그대로 다리가 풀렸다.

몸이 앞으로 쏠린다.

최대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다.

털썩.

간신히 앞으로 고꾸라지지는 않았지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 리쿤을 향해 파이온이 싸늘한 눈길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흥! 역시 빈 깡통이 요란했군.”

파이온의 한마디에 리쿤이 눈을 부라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렸다.

그런 리쿤을 향해 파이온이 분노의 일갈을 내질렀다.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감히 드래곤을 도마뱀 운운하며 무시하고 농락했단 말이더냐!”

“시…끄럽다… 도마…뱀 자식아….”

리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이온이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퍼억!

“꺽!”

리쿤이 엉망이 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파이온이 혀를 찼다.

“이런 녀석에게 화를 냈다니. 내가 다 한심해지는군.”

“….”

“이제 마무리를 짓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쿤의 어깨에 붙어 있던 오른 팔이 뚝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리쿤이 놀라 자신의 오른 팔을 바라보았다.

“뭘 놀라지? 네가 이런 식으로 놀아서 나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재밌는지 궁금했거든.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 이번에는 다리다.”

리쿤이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서걱.

오른쪽 다리가 뚝 하고 떨어져 나갔다.

푸슈슛!

검은색 피가 뒤늦게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리쿤이 다급하게 막아보려 했지만 그 사이에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갔다.

어떻게 수를 쓸 도리가 없었다.

“그냥 죽여라!”

“그럴 순 없지. 내가 분노한 값어치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서걱.

“크아아아아악!”

결국 리쿤은 파이온에 의해 처참하게 난자 되어 죽고 말았다.

그것은 리쿤 만이 아니었다.

리쿤과 같았던 다른 네 명의 마족도 비슷한 형태로 죽었다.

파이온은 자신에 의해 난자 되어 죽은 리쿤의 사체를 무감각한 시선으로 내려 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 위에서 누군가 자신들을 주시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이온만 그 시선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모든 드래곤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허공의 한 지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명의 사내를 발견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닫고 있던 브라키우드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타락한 날개.”

밑에 드래곤과 마족이 된 수하들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밀턴이 자신의 주인인 타락한 날개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모두 주인님의 계획대로 되셨군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어차피 자네가 짠 계획 아니었나.”

“하지만 주인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계획이었지요.”

타락한 날개는 유쾌하게 말했다.

“별로 굳이 실행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고 우연히 자네의 말이 떠올랐을 뿐이야.”

밀턴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저기에 모여 있는 드래곤만 모두 잡아낸다면 위험요소들이 모두 사라져 이 세상은 온전하게 주인님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타락한 날개가 말한다.

“너의 그 말은 틀렸다. 저들이 있든 없든 내가 원하면 이미 그것은 내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 나를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제가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알면 되었다. 그런 그렇고 이왕 네 장단에 맞춰 놀기로 했으니 놀아야겠는데, 저 녀석들을 모두 죽여야 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조금 아쉽군.”

타락한 날개의 한마디에 밀턴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을 처리하고 나면 뭐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지루함과 무료함만을 줄 뿐이지.”

“….”

“물론 있든 없든 차이는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말이야.”

밀턴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타락한 날개를 바라보았다.

타락한 날개가 마저 말을 이었다.

“작은 놀이터가 있네. 그 안을 포화상태로 만들 정도로 많은 수의 아이들이 뛰어 놀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그러던 중 한 아이가 타고 싶지만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아 탈 수 없는 놀이 기구를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한다네. 이 안에 있는 아이들이 모두 없고 자신 혼자만 있다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텐데 하고 말이야.”

타락한 날개가 거기까지 말하고 밀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밀턴은 송구한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타락한 날개가 그런 밀턴에게 질문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본노가 모자라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뜻이지 모르겠다고 하면 되는 걸 잘도 복잡하게 대답하는 군. 자네가 저 어린 아이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이네.”

“그렇군요.”

“정말 아무도 없이 혼자 놀이터에 있다면 재밌겠는가?”

밀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재밌을 것 같았지만, 타락한 날개가 원하는 대답은 재미없다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가 말했다.

“내 대답을 알면서 대답하지 않는 것은 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의견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뭔가?”

잠시 무표정하게 주시하다가 빙글 미소 짓는 타락한 날개였다.

“내 장난이 심했군.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네. 대답하지 못한다고 죽으란 소리는 아니니까. 자네가 아직 모르니 내 생각을 말해야 겠군.”

“….”

“그네를 내가 쉽게 앉는다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고, 미끄럼틀을 바로 타서 내려온다면 기다린 만큼의 기대감이 형성되지 않아 아쉬움이 없어서 몇 번 타지 못할 것이라네. 경쟁 상대가 없다면 도태되고 쉽게 얻는다면 쉽게 질리게 된다는 말이지.”

“아이들의 놀이도 경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이들의 놀이뿐만이 아니라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경쟁이지. 치고 박는 상대가 있음으로 스스로를 고취시키고 흥미로 이끈다는 말이네.”

타락한 날개는 거기까지 이야기 하고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밀턴이 이해가 가는 것 같지만 인정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됐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그 말이 끝났을 즘 밑의 전투도 끝을 향하고 있었다.

타락한 날개는 무슨 생각 중이었을까.

드래곤들에 의해 토막이 나 죽어가고 있는 수하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역시 흥미로워. 자넨 어떤가?”

그 질문에 밀턴도 흥미로운 시선을 지우지 못한 체 대답했다.

“인간을 마족으로 만든 탓일까요?”

“그야 모르지. 아직 연구해볼 만한 가치가 많이 남았으니까. 성장속도도 물론이거니와 그에 비례하듯 주인이 된 나에게까지 적개심과 호승심을 드러낼 정도니 재밌는 물건들이지. 한동안은 지루해지지 않을 것 같아.”

그때 부터였다.

드래곤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자신들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한 것은 말이다.

타락한 날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드래곤들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던져주었다.

3

짧지 않은 시간동안 서로를 주시할 뿐이었다.

누구하나 먼저 움직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타락한 날개가 짓고 있는 미소의 영향이었다.

저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는 어째서인지 드래곤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확실하게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말이다.

타락한 날개가 느긋하게 한번 훑어보고는 브라키우드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지.”

“일부러 이렇게 되도록 상황을 만드신 것은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눈에 거슬리는 드래곤들을 한 번에 정리하시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 말에 놀란 드래곤들이 술렁였다.

타락한 날개가 감탄한 어투로 대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그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별로 그런 생각이 없었지만, 목적은 그러했다는 것이지.”

“언변이군요.”

“뭐 그렇게 생각해도 할 말은 없어. 하지만 지금 진행한 계획은 내 계획이 아니라 이 친구의 것이니까 궁금한 점이 있다면 따로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좋지. 그 사이에 각자의 타협점을 찾는다고 해도 난 상관없네. 나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까.”

타락한 날개가 짓궂은 어린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가 두려웠다.

개미의 다리를 뜯는 아이의 순수한 잔혹성이 담겨 있는 미소였기 때문이다.

브라키우드가 시선을 돌려 옆에 시립해 있던 밀턴을 주시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 말에 밀턴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원하는 바가 있으니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 아니오.”

브라키우드의 말에 밀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타락한 날개의 얼굴을 슬쩍 본 후 대답했다.

“난 파괴를 하는 것과 생명의 고통과 슬픔이 어우러진 비명과 눈물을 좋아하지.”

“취향문제를 걸고넘어질 생각은 없소. 하지만 다른 취향을 찾는 것은 어떻소?”

브라키우드의 대꾸에 밀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인간도 고양이나 개의 시체를 보며 불쌍하다고는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시체를 접한 것과 같은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으니까. 같은 생명체라고는 하지만 다른 종의 생명에 대해서는 같은 인간에 비해 낮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드래곤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급이 낮은 생명으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죽건 말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동족이 죽어도 무시하는 판국에 인간의 죽음을 신경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저런 말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같은 것은 하나 있었다.

그 생물이 존재하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강제로 생명들을 멸종시키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

여하튼 나름 답을 찾아낸 밀턴이 다시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취향에 만족해.”

“그러니 바꿀 생각이 없다는 말이오?”

“그렇지.”

“그런데 당신의 취향과 우리들이 무슨 관계가 있는 거요?”

“몰라서 묻나?”

“혹시 당신이 인간들을 학살하는 것을 우리 드래곤들이 막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차후의 번거로움을 위해 미리 처리하겠다는 뜻이란 말이오?”

“잘 아는군.”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돼서 이후 세상의 모든 생명이 마르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오?”

“그때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되지.”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데 생각을 한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오?”

그 말에 가만히 있던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나도 브라키우드라는 친구의 의견에 동조한다네.”

타락한 날개의 말에 밀턴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결국 한마디를 토하고 말았다.

“원한에 차서 죽은 생명들의 영혼은 상당히 효용성이 있지. 특히 지적능력이 뛰어난 영혼은 말이야. 지적능력이 뛰어 날수록 감정의 깊이가 깊어지거든.”

브라키우드가 의아한 어투로 되물었다.

“영혼을 사용한다는 말이오?”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죽이려한다는 말이오? 대체 영혼은 뭐에 사용하려 한다는 말이오?”

“내가 그걸 왜 대답해야 하지?”

“….”

밀턴은 대화의 단절을 표현했다.

브라키우드는 뭔가 더 말을 이어나가고자 했지만, 밀턴은 자신의 뜻을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 타락한 날개가 말했다.

“대화는 끝났나?”

밀턴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결과는?”

“대화를 더 나눌 가치도 없습니다.”

“그럼 원래대로 진행하자는 뜻이로군.”

타락한 날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브라키우드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잠시 드릴 말이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타락한 날개의 허락에 브라키우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한 날개시여. 당신은 세상의 멸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어찌하여 저자의 말을 들으시는 겁니까?”

“글쎄? 어째서일까?”

타락한 날개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밀턴은 순간 뜨끔하는 반응을 보였다.

타락한 날개가 그런 밀턴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녀석과 있으면 재미있거든.”

“그게 다 입니까?”

“그게 다냐고? 왜 내 생각이 그토록 궁금한가?”

“제가 무례를 범하지 않았다면 듣고 싶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군.”

“….”

타락한 날개의 이야기에 밀턴조차 귀를 기울였다.

타락한 날개를 주인으로 섬기고는 있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사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라네.”

“그 말씀은 중간계에 오신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군요.”

“그렇다는 뜻이겠지?”

타락한 날개가 미소 지으며 알 듯 모를 듯한 대답을 했다.

“그게 중간계를 붕괴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라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브라키우드의 질문에 타락한 날개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시야를 마주했다.

“정녕 모르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대답을 해주지. 이미 중간계는 붕괴되어 가고 있네.”

“예?”

“말 그대로야. 내가 나서지 않아도 중간계는 곧 사라지지.”

“그, 그게 무슨….”

브라키우드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브라키우드만이 아니다.

밀튼 조차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빈말이 아니야. 사실이네. 자네가 눈치 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이미 그것에 관한 징조들은 드러났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본다면 여기저기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드래곤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 안 믿는 분위기군. 물론 믿든 안 믿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

“아까 말하지 않았나. 나는 뭐든 상관이 없다고 말이네. 어차피 다가올 중간계의 붕괴.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내 손으로 먼저 붕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이 말이지. 이제 내 마음을 알겠나? 자네들은 어떤가? 살고 있던 중간계의 멸망을 보기 전에 내 손에 먼저 죽는 것 말이네.”

오싹.

소름이 드래곤들의 전신을 휩쓸었다.

“웃기지 마라!”

모두들 자연스럽게 목소리의 주인공을 쫓아 시선을 돌렸다.

파이온이었다.

드래곤 무리의 앞에 나서고 있던 파이온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너 같은 녀석의 말에 현혹이 될 정도로 어리석다고 생각하느냐!”

타락한 날개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들의 믿음 문제를 나에게 떠넘기지 마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는다. 믿는 것 안 믿는 것 모두 너희들의 판단에 달린 것이니까.”

“흥! 마지막까지 우리를 현혹하려 하는 것이냐! 속지 않을 것이다!”

파이온의 대꾸에 타락한 날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타락한 날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보니 대답을 하나 하지 않은 것이 있었군.”

“그게 무엇입니까?”

“내가 밀턴의 말을 왜 듣느냐고 했었지?”

“그랬었습니다.”

“나는 밀턴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네. 나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지. 오로지 내 판단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네. 그 말은 자네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도 내 판단이 가져온 결과라는 뜻이지. 이해하는가?”

브라키우드가 무섭게 몸을 뒤로 피했다.

“눈치가 빠른 친구야. 죽이기 아까울 정도로 말이지.”

저 뒤로 도망친 브라키우드가 타락한 날개를 향해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하지만 타락한 날개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폭발했다.

콰과과과광!

그제야 눈치를 차린 드래곤들이 단체로 타락한 날개를 향해 공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이 결렬되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바로 그때 모든 드래곤의 머릿속으로 텔레파시가 전송되었다.

타락한 날개의 마지막 한마디가 선명하게 그들의 뇌리를 자극했다.

큭큭큭. 더욱더 발버둥을 쳐보라고. 내 무료함이 조금이라도 가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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