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60화 (31/68)

제1장. 산으로 가는 배

1

타락한 날개가 브라키우드에게 질문했다.

“이젠 자네 차례군.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

브라키우드는 조금 전 그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떨리는 몸과 팔을 내려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도저히 진정 할 수가 없었다.

꿀꺽.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거대한 존재가 세상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다.

타락한 날개가 피식 웃으며 위해 없이 자신을 돌려보내 준 것만으로도 브라키우드는 기가 죽어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고 있었다.

절대적이며 신에 가깝다고까지 불리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기가 죽었다니.

하지만 사실이다.

브라키우드가 자신의 손톱을 잘근 씹으며 초조감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브라키우드가 자조적인 미소를 흘린다.

초조함이라니.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닌가.

언제나 최강의 자리에서 굽어봐왔던 자신이다.

하지만 막상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를 만나게 되자 스스로가 일개 인간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소를 하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존재케 했던 자존심과 자긍심이 단지 가진 자의 오만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가만히 있겠다고 했지만, 브라키우드는 그가 정말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움직여야했다.

서둘러서 어서 그를 막아야만 했다.

이것은 자신이 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타락한 날개가 스스로의 말처럼 정말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그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세상은 충분히 지옥으로 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순간 어째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브라키우드의 머릿속에 앤디라는 인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지워버렸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인간 따위를 떠올린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브라키우드가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흩어진 동지들을 불러 모아야겠군. 우선 그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지.”

브라키우드가 하늘로 날아올라 거대한 함성을 내질렀다.

크와아아앙!

마치 자신의 나약한 모습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는 것일까?

거대한 드래곤 피어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허공에서 내지르던 브라키우드는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브라키우드가 자리한 거대한 동공(洞空).

그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대략 백에 가까운 수다.

모두들 여유로움이 한껏 배어 있는 모습이다.

조용한 목소리로 담소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각자 자리를 잡고 서있거나 앉아 있었다.

귀족인가 싶지만, 우선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위대한 존재라고 말이다.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놀랍게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드래곤들이 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바로 드래곤 로드 브라키우드의 부름 때문이었다.

겉으로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며 고심하는 중이었다.

브라키우드가 어째서 자신들을 불렀는지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냥 기다릴 뿐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해줄 때까지 말이다.

한참의 기다림 끝에 자신들을 불러낸 이, 브라키우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들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한 브라키우드에게 정중한 인사를 했다.

“로드. 오랜만에 뵙습니다.”

“베르카. 반갑군.”

“건강하신 모습이군요.”

“파이온, 자네도 더 듬직해 졌군.”

모두 조용하게 인사를 건네며 주고받았다.

차분한 분위기로 인사를 마친 이들 앞에 브라키우드가 섰다.

브라키우드가 잔잔한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때 한 드래곤이 질문했다.

“로드. 어째서 우리를 부르신 겁니까?”

“….”

그 질문에 브라키우드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옅은 한숨을 흘렸다.

그것을 대답해 주기 위해 부른 것이니 대답을 해야겠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브라키우드의 모습에 모두들 고개를 꺄웃거렸다.

브라키우드의 행동에 의아심이 든 탓이다.

그들로서는 브라키우드가 보여주는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아는 브라키우드는 언제나 자신만만하며 거침없는 존재였던 탓이다.

거의 700년 만의 부름이다.

그것도 일반적인 부름이 아닌 로드의 권한을 사용하여 잠에 빠져있거나 꿈을 꾸고 있는 이들까지 모두 불러들인 것이다.

솔직히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로드가 저렇게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숨을 토할 정도의 일이라니 대체 어떤 일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물론 약간의 감을 잡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잠을 자고 있던 드래곤들과 달리 깨어 있던 이들이 그 마기를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드래곤이 브라키우드에게 질문했다.

“혹시. 저번에 세상을 덮었던 그 거대한 기운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 말에 브라키우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키우드의 반응에 드래곤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드래곤들도 있었다.

“저번의 일이라니요?”

녹색 머리카락을 하고 어린 기운을 지닌 드래곤의 질문에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성체 드래곤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얼마 전에 세상을 거대한 마기가 뒤덮었던 적이 있었다네.”

“세상을 말입니까?”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대답해주던 푸른 머리카락의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대답해준 드래곤에게서 시선을 돌려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브라키우드가 지금 막 이야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오.”

“대책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에 대한 대책을 세우자는 거죠?”

드래곤들의 연이은 질문에 브라키우드가 대답했다.

“세상에 마신이 등장했소.”

그 말에 모두들 고개를 꺄웃거렸다.

어색한 단어 때문이었다.

“마신?”

“마신이라고요? 혹시 마왕을 말하시려던 것 아닙니까?”

수많은 드래곤들의 웅성거림에 브라키우드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 분명 마신이오.”

그 한마디에 드래곤들 사이가 술렁였다.

그때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드리운 드래곤이 질문했다.

“마신이라니 대체…?”

“타락한 날개라고 하면 아시겠소?”

순간 술렁이며 소란스럽던 드래곤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2

블루 드래곤의 수장 베르카가 질문했다.

“타락한 날개? 설마….”

“….”

“로드.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것입니까?”

모든 드래곤들이 베르카와 같은 눈빛으로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브라키우드는 드래곤들의 시선을 받으며 침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유 모를 죄책감과 책임감이 밀려온 탓이었다.

“로드.”

다시 한 번 흘러나온 베르카의 독촉에 브라키우드는 힘겹게 대답했다.

“잘못들은 것이 아니오.”

베르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타락한 날개라는 이름은 단 한 존재만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계의 절대지배자이지요.”

“그가 맞소.”

순간 성토라도 하듯 드래곤들이 부정어린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됩니다.”

“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브라키우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금 그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소.”

“로드의 착각이 아니십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하지만 그의 존재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대화를 나눴소. 아니라고 부정해서 될 문제라면 1억 번도 더 부정하겠소.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이 모든 말은 사실이고 현실이오.”

그 한마디에 떠들던 드래곤들이 모두 침묵했다.

드래곤들을 이끄는 자.

로드라 불리는 브라키우드가 하는 말이다.

그가 허투룬 말을 할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단언을 하는데 더 이상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브라키우드를 무시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브라키우드가 다시 말했다.

“지금 그의 존재 여부를 따지며 언성을 높이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오.”

“….”

“내 심정역시 그대들과 같이 정말 단순히 내가 착각한 것이면 좋겠소. 그래서 로드의 권한을 이용하여 이렇게 그대들을 불러 모은 것에 대한 책임을 졌으면 좋겠소. 하지만 내 착각이라서 생긴 일이라면 나중에 밝혀질 것. 차후 단순한 나의 착각으로 밝혀진다면 그때는 정말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소. 그러니 지금은 머리를 맞대고 마신에 대한 대책을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소?”

브라키우드가 스스로의 자존심을 굽히며 하는 말에 모두들 한숨을 토했다.

그가 저렇게 자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그토록 급박한 상황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블랙 드래곤의 수장 파이온이 입을 열었다.

“어떤 대책을 말씀 하시는 것입니까?”

“말 그대로 대비책을 말하는 것이오.”

“그가 정말 타락한 날개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슨 대비책을 낼 수 있단 말입니까?”

파이온의 한마디에 브라키우드는 슬프게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어떤 수를 써도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넋 놓고 세상이 파멸로 향하는 것을 지켜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밀려오는 피로에 눈을 감고 있던 브라키우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두에게 하나 묻고 싶소. 우리라는 종족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오?”

“어떤 존재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혹시 우리를 한낮 지성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혹은 인간들에게 너무 개입하여 스스로를 인간화 하고 있지는 않소?”

그 말에 드래곤들이 모두 자신도 모르게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브라키우드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모두 뛰어난 두뇌를 지닌 드래곤들이다 보니 브라키우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단박에 파악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도 악도 어느 한쪽으로 치중하지 않고 세상을 굽어봐야하는 관찰자며 중간계를 수호하는 수호자요. 우리가 그리 하자고 한 것이 아니라 신이 그리 만드셨소. 그분께서 우리에게 강대한 힘을 준 것은 바로 사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닌 당신대신 세상의 중심을 잡으라는 뜻이오.”

“….”

“그런데 지금 신께서 우리에게 맡긴 세상에 그 균형의 저울을 무너트린 존재가 나타났소. 세상의 중심을 틀어버리는 존재가 나타났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이는 행동은 무엇이오? 두려움에 질려 현실을 회피하고 무시하고 체념하고 있소. 우리들이 인간들을 보며 경멸하고 비웃던 행동을 그대로 우리가 하고 있다는 말이오. 부끄럽지 않소?”

브라키우드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의 말대로 모두들 부끄러웠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반박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브라키우드의 말에서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고민을 이유로 거대한 동공 안에 한동안 깊은 적막이 이어졌다.

그 적막을 블랙드래곤의 수장 파이온이 다시 말문을 열며 깨트렸다.

“로드의 말씀이 모두 옳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무작정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드래곤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드래곤들의 반응에 브라키우드가 옅은 한숨을 흘렸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드래곤들이 자신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걱정하여 한발 뒤로 물러선 듯한 느낌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반응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사실 자신의 말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거대한 적이 나타났으니 두려움을 버리고 무작정 싸워서 죽자라는 말로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말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브라키우드로서는 자신의 말을 듣고도 이들이 조금이나마 한발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던 탓이다.

드래곤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브라키우드는 내심 자신의 실망감을 가슴 깊이 감추고 파이온의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나는 처음에 분명히 말했소.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이 일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이오.”

“하, 하지만.”

“할 말이 있다면 말씀하시오.”

“….”

시간은 흐르고 흘렀지만, 이후로 이어진 대화는 단조로웠다.

그가 위험한 존재이고 그로 인해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모두들 수긍했다.

그러나 대화가 조금 풀려나가는가 싶으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돌고 돌며 답답함을 이어나갔다.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웅성거림과 달리 마땅히 별다른 의견도 나오지 않았고, 이대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해산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그럭저럭 마무리를 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수단과 마계에서 올라올 마족들과 대립할 수 있는 힘을 모으며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이야기를 일단락 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드래곤들은 해산을 하게 되었고, 다들 골치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네 마리의 드래곤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을 반짝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800살에서 1000 정도 된 갓 해즐링을 벗어난 어린 녀석들이었다.

구석진 자리에 모여 있는 녀석들은 960살 블랙 드래곤 마르체스와 899살 레드 드래곤 베아르카제 그리고 930살의 그린 드래곤 미토무스와 860살 블루 드래곤 카토였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마르체스가 말했다.

“타락한 날개라고?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로드와 어르신들이 저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나도 그게 궁금해.”

베아르카제의 대답에 모두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마르체스가 질문했다.

“타락한 날개라는 녀석이 있는 곳이 쿠렌트 제국이라고 했지?”

“맞아. 그런데 그건 왜?”

“우리 한번 보러갈까?”

마르체스의 말에 미토무스가 당혹스러운 어투로 대답했다.

“위험해. 어르신들이 이야기 나누는 것 듣지 못했어?”

“너는 그 녀석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하지만….”

미토무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마르체스가 부추겼다.

“다른 게 아니야. 그냥 보고만 오자는 거지.”

그 말에 미토무스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당연하지. 뭐가 걱정이야? 우리는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이야. 싸우러 가자는 것도 아니야. 그냥 숨어서 보는 건데 무슨 일이 있겠어?”

다른 드래곤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토무스가 한숨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렇지만 만에 하나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마르체스가 걸렸구나 싶은 표정으로 미토무스의 말을 받았다.

“잘못 될게 뭐가 있어? 혹시 너 겁이라도 먹은 거 아냐?”

순간 미토무스의 표정이 울컥 분노로 물들었다.

“누가 겁을 먹었다는 거야!”

미토무스가 한 말은 신중하고 진중한 그린 드래곤들의 성격상 나올만한 말이었지만, 타 드래곤들은 그것을 겁쟁이이기 때문이라며 폄하하곤 했다.

때문에 그린 드래곤들은 그 겁쟁이라는 말은 정말 싫어했는데, 블랙 드래곤 마르체스가 그런 그린 드래곤 미토무스의 성질을 건드린 것이다.

마르체스가 말했다.

“겁먹은 거 아니라고?”

“아니야!”

“그럼 증명해봐.”

“좋아. 가지. 내가 앞장서겠어.”

미토무스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자 마르체스와 베아르카제 그리고 카토가 히쭉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3

파팟!

짧은 섬광이 터지더니 허공에 순간 네 명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바로 갓 성룡이 된 블랙 드래곤 마르체스, 레드 드래곤 베아르카제, 그린 드래곤 미토무스, 블루 드래곤 카토였다.

로드 브라키우드의 레어에서 나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그곳에서 부터 4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쿠렌트 제국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순식간에 날아 온 것이다.

“여긴가?”

카토의 말에 베아르카제가 주위를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도착했군.”

미토무스가 베아르카제에게 질문했다.

“제국의 방향은 어느 쪽이지?”

“여기서 동서쪽으로 이동하면 되.”

그 말에 미토무스가 냉냉한 표정으로 마르체스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가자.”

네 명 아니 네 마리의 드래곤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아 쿠렌트 제국의 성을 향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바삐 날던 그들은 쿠렌트 제국의 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비행속도를 늦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중압감이 이들을 누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설 생각은 없었다.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타락한 날개란 녀석의 얼굴을 한번 봐야 한다는 마음이 굳어질 뿐이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드래곤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숨어서보는 훔쳐보는 것조차 무서워서 돌아간다면 어떻게 최강의 생명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모두들 서로의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유유히 쿠렌트 제국의 높은 성벽을 넘어섰다.

생각보다 쉬웠다.

아니 마음을 다잡고 온 것이 우스울 정도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자신들이 바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인간들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내는 감시를 서는 이들도 거의 없었고, 마법과 같은 경보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인저빌리티 따위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일행들은 유유히 하늘을 통해 자연스럽게 성안으로 들어섰다.

그렇다고 긴장을 확 놓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누가 들어와도 두렵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들의 호기심이 더욱더 커졌다.

카토가 말했다.

“녀석이 어디에 있을까?”

미토무스가 대답했다.

“황제를 누르고 제국을 얻었으니 있을 곳이야 뻔하지. 마굿간에 있을리는 없잖아.”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황제가 있을 곳으로 짐작되는 곳을 살폈다.

“저기다.”

카토의 말에 모두 기운을 더욱 숨기고 그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커튼이 쳐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투시마법으로 확인해 볼까?”

카토의 투덜거리는 한마디에 마르체스가 말했다.

“마족이야. 그것도 절대 지배자라 불리는 존재. 분명히 마나의 변화에 민감할 거라고. 그러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마법을 쓰면 그에게 백 퍼센트 걸린다고 봐야해. 조심해야 한다고.”

바로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아는 녀석들이 공간이동 마법에 비행 마법까지 써서 성벽을 넘어들어 와? 쯧.”

움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마르체스들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순간 움찔 놀랐다.

자신들이 봐도 놀랄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닌 한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던 것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화사하며 온화한 미소를 띄운 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체스가 생각했다.

‘저자가 설마….’

동시에 조금 전 그가 등 뒤에서 했던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몇 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의 마나흐름을 모두 꿰뚫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성벽이 허술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니 허술한 것이 아니었다.

그 어느 곳보다 더 철저한 감시시스템이 갖춰져 있던 것이다.

이미 그에게 모든 마나의 흐름이 쥐어져 있으니 무슨 감시가 더 필요하겠는가.

그가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물었다.

와삭.

시원하게 한입 가득 물고 능청스럽게 우물거렸다.

어떻게 보면 짓궂은 아이의 천진한 모습처럼 보였지만, 어째서일까.

마르체스와 베아르카제 와 미토무스 그리고 카토는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얼어 붙어버렸다.

그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탓이다.

모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깊이 삼키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내는 태연하게 사과를 뒤로 대충 집어 던지며 말했다.

“너흰 뭐지?”

“….”

사내는 마르체스들이 대답도 하기 전에 살포시 인상을 구기더니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만…. 이 기운이라면 인간은 아니고, …드래곤인가? 그것도 풋풋한 느낌이 나는 것을 보니 이제 막 성룡이 된 녀석들인가 보군.”

마르체스들은 놀랐다.

폴리모프가 되어 있는데도 자신들의 본질을 뚫어 본 것을 넘어 나이까지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족의 자라나는 새싹들이 이곳엔 무슨 일이지? 조금 전 말을 들어보니 내가 누군지 모르고 온 것 같지는 않고 말이야.”

마르체스가 힘겹게 말문을 열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저, 정말 당신이 타락한 날개십니까?”

“맞다.”

타락한 날개의 시원한 대답에 오히려 할 말을 잃게 된 마르체스 들이었다.

한참동안 적막이 이어지자 타락한 날개가 말문을 열었다.

“설마 할 말이 없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 설마가 사실이었다.

자신들은 타락한 날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왔을 뿐이었다.

숨어서 조용히 보고 떠날 생각이었다.

어떤 대화를 나눌지 생각하고 온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설마 이렇게 만나도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없군. 나를 굳이 찾아왔기에 어떤 친구들인가 해서 잔뜩 기대를 했었는데 말이야.”

타락한 날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주위에 반쪽의 날개를 가진 다섯 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체스들은 그들을 보며 놀랐다.

“인간?”

“인간이라니. 이 녀석들은 훌륭한 마족이라네. 아! 그렇지. 자네들 이 녀석들과 한번 놀아보는 건 어떤가?”

“놀다니요?”

“이왕 왔는데 그냥 가는 것도 그렇지 않나? 마땅히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고, 나도 손님대접을 해준 것도 없고 말이네.”

“그 말은 이 녀석들과 싸워서 이기면 보내주겠다는 뜻입니까?”

타락한 날개가 부드러운 미소를 입 꼬리에 머금으며 대답했다.

“안 보내 주겠다고 한 적은 없네만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그렇게 들어도 되네.”

“….”

“생각해보니 자네 말대로 싸워서 이겨야 보내주는 것도 재밌겠군.”

“원래는 그냥 보내주실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훗.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줬다고 뭐가 달라지지? 미련은 후회만 남길 뿐이라네.”

“미련은 후회만….”

틀린 말이 아니다. 마르체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꾸우욱.

타락한 날개가 말했다.

“후회는 하지 않을 걸세. 생각보다 재미있을 거야. 이 녀석들이 조금 독특한 녀석들이거든.”

“독특?”

“뭐랄까. 나도 지금 파악해 나가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가. 놀아보겠나?”

그 말에 마르체스와 베아르카제 그리고 미토무스와 카토가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왔다.

그가 싸우지 않으면 돌아도 갈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장난스럽게 말했다지만 장난이 아님을 모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상대는 얼마나 강한가?

모두들 힐끔거리며 다섯 마족을 바라보았다.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토무스가 타락한 날개에게 질문했다.

“알겠습니다. 이기면 우리들 모두 확실하게 보내주시는 겁니까?”

“물론.”

“어떻게 싸우죠?”

“흠, 그렇군. 5대 4라. 쪽 수가 맞지 않았군.”

“….”

타락한 날개는 고개를 꺄웃거렸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너희가 이 녀석들 모두와 싸울 필요는 없다.”

“어떻게 하자는 말입니까….”

“리쿤.”

마족 하나가 반쪽 날개를 가볍게 흔들며 타락한 날개의 앞으로 나왔다.

타락한 날개가 그를 보며 말했다.

“리쿤이라는 녀석이지. 이 녀석을 이겨봐라.”

“대표로 싸우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너희가 원하는 데로 해라. 일대 일로 싸우든 너희가 모두가 리쿤을 공격 하든 상관없다.”

타락한 날개가 피식 웃었다.

마르체스를 비롯한 어린 드래곤들은 속에서 울컥 열불이 났다.

타락한 날개의 말투와 행동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나서죠.”

가장 나이가 어린 블루 드래곤 카토가 앞으로 나섰다.

마족 나부랭이 따위 하나를 상대하는데 자신들이 모두 나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다른 어린 드래곤들은 가만히 그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의 결정을 존중해 준 것이다.

타락한 날개가 말한다.

“괜찮겠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후회는 저 녀석이 죽고 난 후에 타락한 날개님께서 하십쇼. 드래곤을 무시한 대가로 말이죠.”

카토의 말에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알겠네.”

카토는 타락한 날개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마족 리쿤을 주시했다.

왠지 카토의 강인한 심장이 크게 수축하기 시작했다.

쿵! 쿵!

지금까지 몰랐던 기운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 탓이다.

카토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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