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9화 (30/68)

제10장. 중간계의 지배자

1

타락한 날개가 가는 곳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자신이 수하로 들인 인간 마족 녀석들이 즐겁게 해줘서 시간을 보냈지, 그 후로는 모두 길을 터줬다.

안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살육도 굳이 행하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모두 오체투지를 하듯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었다.

타락한 날개는 그런 예를 자연스러운 것을 넘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 시각 황제는 자신의 방에 꽁꽁 숨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아! 으아아! 으아아아! 으아아!”

자신의 목소리 외에 그 어떤 소음도 거부했다.

대륙을 손바닥 안에 쥐고 좌지우지했던 무소불위 권력의 쿠렌트 황제는 이제 완전하게 헤어날 수 없이 미친 것이다.

“….”

문밖에서 쿠렌트 황제의 비명을 듣고 있는 늙은 기사단장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더 굳게 다잡았다.

자신이 최후의 선이다.

지금 쿠렌트 황제의 방 복도에는 족히 300여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을 포함한 이들이 그 마왕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자가 여기 온다는 것은 쿠렌트 제국의 얼굴들이 쓰러졌다는 뜻일 테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마왕이 쿠렌트 황제를 만나는 것은 자신의 시체를 밟고 난 후가 될 것이다.

그때,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 인간은 재밌는 거 같아. 죽을 것을 알면서도 덤빈단 말이지. 후후후.”

그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사방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피비린내가 복도를 가득히 물들였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모두 토막 난 채 바닥을 핏물과 소실된 신체, 내장 따위로 장식했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머리나 가슴, 혹은 팔이나 다리에 구멍이 뚫린 채로 죽었다. 이런 자리에서 신체를 소실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복인가.

여하튼 이렇게 될 것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견딜 수 없이 두려웠다.

이제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뒤를 자리하고 있는 기사들이 두려움에 이를 딱딱 마주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늙은 기사단장이 자신도 두렵지만 마나를 끌어올려 고함을 질렀다.

“정신들 차려라!”

하지만 아무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는 마왕을 보며 공포심에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몇몇 기사들이 돌발적으로 검을 들고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고깃덩어리로 분쇄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늙은 기사단장도 버티기 힘들었다.

다리가 너무 떨리는 탓이었다.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그 존재를 보며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이대로 쓰러지거나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뿐이었다.

늙은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 후, 검을 든 채 마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야아앗! 황제 폐하시여!”

그것이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타락한 날개의 날개가 촉수처럼 움직이며 황제가 숨어 있는 방의 문을 가볍게 뜯어냈다.

타락한 날개는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역시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세상의 화려함으로 온통 도배가 된 듯한 그런 방이었다.

“여기가 내 방이란 말이지?”

그때, 구석에 이불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황제가 머리를 빼내며 소리쳤다.

“아니다! 짐의 방이다!”

타락한 날개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뭔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소년의 것처럼 빛났다.

쿠렌트 황제로 보이는 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으며, 얼굴은 온통 심술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타락한 날개가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네 방이라고? 아니다. 내 방이다.”

“짐의 방이라니까!”

“이젠 내 방이다. 나가라,”

“못 나간다! 못 나가! 짐의 방이다!”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죽여야겠네.”

그 말에 쿠렌트 황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싫다! 안 죽을 거다!”

“난 죽일 건데?”

타락한 날개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쿠렌트 황제가 다시 바락바락 소리쳤다.

“싫다! 안 죽을 테다!”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물었다.

“어떻게 안 죽을 건데?”

“모른다. 하지만 짐은 죽지 않을 것이다! 짐은 영원히 살아서 이 대륙을 계속 지배할 것이다!”

“큭큭큭큭큭큭큭!”

타락한 날개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락한 날개는 쿠렌트 황제의 앞에 아주 그냥 의자를 가져와 마주 앉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모른다.”

“모르면 어떻게 해. 알아야 살지.”

“모른다. 하지만 난 몰라도 산다.”

타락한 날개가 혀를 찼다.

“고집 센 것을 보니, 네 녀석 수하들이 꽤나 피곤했을 것 같다.”

“흥! 여긴 내 방이니 어서 나가라!”

타락한 날개가 미소를 띤 얼굴과 달리 웃지 않는 눈으로 쿠렌트 황제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에게 대들지 마라.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주제를 모르는 것들은 죽음 이상의 죽음을 선사할 테니까.”

“…!”

덜덜덜덜덜!

쿠렌트 황제가 몸을 떨며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 눈을 까뒤집고는 입가로 거품을 흘렸다.

쿠렌트 황제의 처참한 결말을 보며 타락한 날개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밀턴.”

타락한 날개가 나직하게 부르자 갑자기 허공이 갈라지며 밀턴이 모습을 드러냈다.

콘 왕국에서 공간을 가르고 나온 것이다.

“예,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밀턴의 얼굴과 전신에서 존경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곁에 없었다지만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본 것보다 더 정확하게 말이다.

진정한 마왕이란 어떤 것이다를 그가 직접 보여 준 것이다.

물론 절대로 숨어서 본 것이 아니다. 타락한 날개는 누가 자신을 숨어서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 수 있는 이유는 모두 다 타락한 날개가 허락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타락한 날개의 허락 없이는 그 어떤 것도 허용이 안 된다.

물을 마시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타락한 날개가 밀턴을 보고 말했다.

“잘 쉬었나?”

“주인님 덕분에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일을 해야지?”

밀턴이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떤 일을 시킬지 두려움과 기대가 함께 다가왔다.

“우선 저 늙은 녀석부터 폐기시켜라.”

“죽일까요?”

“흠, 죽이진 말고… 그냥 길에 버리는 게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이곳을 내가 살기에 어울리는 품위 가득한 곳으로 다시 정비하라.”

“명을 받듭니다.”

밀턴이 그 말을 마치고 쿠렌트 황제를 끌고서 밖으로 나갔다.

타락한 날개는 조금 전까지 쿠렌트 황제가 자리하고 있던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푹신푹신.

기분 좋은 침상이며 이불이다.

새로 뽑은 수하 녀석들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멀뚱히 보고 있었다.

조금 신경 쓰였다.

“그만 나가라. 할 일도 없냐?”

그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를 보인 후 문밖으로 나갔다.

신경 쓰이는 녀석들도 사라지자 타락한 날개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했다.

자신이 할 일을 모두 마친 표정이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던 순간, 아차 싶어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이번 일을 하면서 벌써 며칠 동안 여인을 안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이다.

“이런, 깜빡했군.”

타락한 날개가 입맛을 다시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고심했다.

다시 밀턴을 부를까 말까.

하지만 곧 생각을 정리한 듯 다시 누웠다.

밀턴이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대령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알아서 대령 안 해도 뭐 어쩔 수 없지만, 입이 심심했다.

“쩝.”

바로 그때, 타락한 날개의 그 생각이 떨어지기 무섭게 밀턴이 다시 나타났다.

“주인님.”

“무슨 일이냐?”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식사?”

타락한 날개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밀턴을 돌아봤다가 환하게 웃었다.

식사를 들고 들어오는 시녀들의 미색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그 모습도 나름 매력이 있었다.

밀턴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유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타락한 날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흠, 그럼 한술 들어볼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밀턴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타락한 날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특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고 있는 밀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밀턴이 타락한 날개의 방에서 나간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여인들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

세상이 바뀌었다.

대륙의 질서가 송두리째 말이다.

역사는 하루 만에 이뤄진다고 했던가.

그 말 그대로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변했다.

대륙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마왕은 놀랍게도 세상을 파괴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듣던 중 가장 황당하고 쇼킹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은 마왕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세상을 파멸할 계획이 없으며, 지금까지의 질서를 모두 유지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실 모두 얼마나 걱정했던가.

100만의 병사들을 눌러죽이듯 학살한 마왕이 다음은 어디를 공격할지 말이다.

제발 자신의 왕국만은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 와중에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니.

그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이야기였고, 희소식 그 자체였다.

대륙을 분배하여 지배하던 각국의 왕들도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마왕이 황제가 된 것을 축하하며, 축하 사절단과 선물이라 말하는 공물을 가져다 바쳤다.

물론 그렇게 하는 행동과 달리 누구도 마왕이 평화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우선은 마왕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혼란스러웠던 나라를 추스르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추스르고 난 후 마땅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모든 이들에게는 모를 내일보다 막상 닥친 오늘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놀랍게도 급박한 상황이 한순간에 시들고 너무나도 평온한 시간이 찾아왔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안드레이가 한숨을 토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이지 놀랍군.”

옆에 있던 셀린이 물었다.

“뭐가요?”

“누구 하나 마왕이 대륙을 다스리는 황제가 되겠다는데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다니 말이다.”

안드레이는 한순간에 변화한 세상과, 그 변화한 세상에 순식간에 적응하는 인간들을 보며 정말이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옆에서 안드레이를 올려다보던 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죠.”

“그렇긴 하지만….”

“그건 그렇고, 마신은 대체 무슨 속셈일까요? 갑작스럽게 황제라니요.”

셀린의 질문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서 나도 함부로 판단을 내세울 수가 없구나.”

“그럼 저대로 놔둘 생각이세요?”

“우선은 그래야겠지.”

“우선은, 이라고요?”

“저 마신을 이길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겠느냐? 마신과 경제를 놔두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권모술수를 다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틀리면 뒤집어엎을 존재인데 함부로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

그 말에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셀린이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분들이 그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걱정을 할 리가 없었겠죠.”

“….”

셀린의 으르렁거림에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속으로는 저런 핏덩어리 무서워서 시선을 피하다니 하며 스스로 비참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들이 한 짓이 있는 이상 함부로 말을 놀릴 수도 없었다.

설마설마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설마 안드레이가 자신들의 비밀까지 파악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저 마왕을 이 세상에 불러온 것은 자신들이었으니, 입이 10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모두 차와 간식을 드시면서 담소를 나누세요.”

“앗! 공주님! 죄송하게 뭘 이런 것을….”

셀린의 말에 레오나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해드릴 것이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그리고 여유를 조금 가지세요.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잖아요.”

레오나 공주를 따라 들어온 시녀들이 차와 과자를 사람들의 수에 맞춰 나눠주었다.

셀린이 레오나 공주에게 물었다.

“앤디는요?”

“지금 탈리온 공작님과 함께 연무장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앤디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렸다.

탈리온 공작은 그런 앤디를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앤디가 참다가 결국 한마디 던졌다.

“뭘 그렇게 보십니까?”

“자네를 좀 봤네.”

“신경이 자꾸 쓰이는군요.”

그만 보라는 말을 돌려서 한 말이었지만, 탈리온 공작은 도리어 혀를 차며 말했다.

“정신력이 그렇게 약해서야. 그러니 죽기 직전까지 폭주하고 쓰러지지.”

앤디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할 일이 그렇게 없으십니까?”

“없네.”

“….”

대놓고 저렇게 할 일이 없다고 대답하니 앤디는 뒤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효! 그냥 다른 데 가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네.”

“왜요!”

결국 앤디가 눈을 뜨고 참았던 화를 터트리며 탈리온 공작을 향해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좀 알려 주게.”

“뭘 말입니까!”

“자네가 사용했던 기술. 그게 무엇인가.”

“무슨 기술 말입니까?”

“저 괴물 스승들을 압도했던 그 기술 말이네.”

앤디가 한숨을 토했다.

“그건 어떻게 알려 준다고 알려 드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지금의 상태에서는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탈리온 공작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며 앤디가 이제는 끝났으려나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나직한 혼잣말 같은 한마디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쳇! 비싸게 굴긴.”

앤디의 이마에 핏대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작님은 저 망할 스승인가 뭔가 하는 존재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습니까?”

탈리온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냥 여기 있겠네.”

“아, 정말….”

앤디는 수련이고 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집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어머? 여보.”

“레오나 공주, 연무장은 왜 왔어?”

“스승님께서 여보를 찾아서요.”

수줍은 레오나 공주의 얼굴을 보며 앤디는 지금까지의 스트레스가 사그라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앤디가 이마의 핏대를 지우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가볼게.”

“여보, 힘내요.”

레오나 공주가 수줍게 볼에 키스를 해주고는, 붉어진 두 뺨을 양 손바닥으로 누른 후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옆에서 탈리온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가 탈리온을 향해 말했다.

“뭘 그렇게 보세요.”

“좋을 때군.”

“부러우시면 재혼을 하시든가요.”

“난 재혼보다 그 기술만 알려 주면….”

앤디는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수십 번 그려 가며 참고 또 참았다.

이러다 다시 폭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를 보며 깊은 한숨을 토했다.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참자.’

자신만 참으면 모두 해결되는 문제다.

사실 그 사건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세월에 희석되어 사그라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흐른 일.

그것도 모자라 전생의 일이다.

그런 것을 생각해본다면, 사실 그때 자신의 폭주는 오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그 기억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

지금 앤디가 하는 갈등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알고 보니 전생에서의 그 일은 모두 이들의 잘못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저들이 잘못했다곤 하지만, 분명 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불가항력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서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한 후, 타 차원으로 반지를 던지기로 한 것이다.

그게 문제가 돼서 이 다른 세상에서까지 이런 상황의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만.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앤디는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지울 수는 없지만, 최대한 저들을 수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자신들은 한배를 타게 되었으니까.

앤디가 마음을 추스른 후 안드레이에게 물었다.

“왜 부르셨나요?”

“혹시 브라키우드 님과 연락이 되느냐?”

“브라키우드 님요? 왜 그러시죠?”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 말이다.”

“제가 들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들어도 대답을 못하고 머리만 아플 거다. 사실 네가 머리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러면서 놀 만한 상황이 아니니까.”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드레이가 이토록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흔치 않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지금 그가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을 찾았다는 뜻일 확률이 높았다.

앤디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드레이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스승님을 만날지는 제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을 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네. 만일 정말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어디에 계시던가?”

“콘 왕국에 있더군요.”

안드레이가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짐작을 하고 계셨던 건가요?”

“증거만 없었을 뿐이지, 모든 상황과 정황이 다 콘 왕국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지금이야 마왕이고 뭐고 이런저런 모든 것들이 다 사실로 드러났지만, 그전까지는 확신은 아니고 그냥 심증만 있었을 뿐이었네.”

앤디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디 안드레이의 심증이 단순한 심증이던가.

뭔가 확신이 서지 않으면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사람이 바로 안드레이다.

앤디와 일행은 모두가 한결같이 지금 안드레이가 무슨 심증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렇다고 그런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기대가 안드레이에게 부담이라는 짐을 안겨 주는 것은 싫었기 때문이다.

3

타락한 날개가 황제가 된 후 세상은 놀랄 정도로 평온해졌다.

놀랍게도 평소보다 사건 사고가 줄어들었다.

백성들을 향한 귀족들의 착취도 사라지고, 횡포도 사라졌다.

호사가들은 이 모든 이유가 바로 마왕의 존재감에 두려움을 느껴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못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뭐가 답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많은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조용하고 평안해진 세상을 가져다준 마왕을 칭송하기에 이르렀다.

서서히 과거 용사가 마왕을 무찌른다는 이야기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커서 용사가 아닌 마왕이 되겠다고 떠들고 다닐 정도였다.

이제는 마왕이 돼서 용사를 무찌르는 놀이를 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게 모두 마왕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덕에 생긴 태평성대라고 생각하며 그를 찬양했다.

백성들의 생각처럼 지금 그들의 새로운 황제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업무와 다른 일이었지만 말이다.

“아아! 화, 황제 폐하! 아아아아아!”

“오오! 그래!”

“폐하! 폐하! 어서!”

타락한 날개는 환희로 물든 시녀의 거대한 가슴을 터질 듯 꽉 움켜쥐며 연신 허리를 움직였다.

사방에서 시녀를 제외한 5명의 여인들이 혀로 가슴으로 그 시녀와 타락한 날개의 전신과 중요한 부위를 핥고, 부비고, 자신의 몸을 스스로 애무하면서 쾌락에 목이 마른 듯 온몸을 비틀었다.

연신 시녀의 입에서 비명과 같은 달뜬 신음이 터지며 서서히 호흡이 짧아졌다. 그리고는 순간 전신을 강하게 수축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폐하! 아흐흐흐흑.”

가냘프게 우는 듯한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타락한 날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물건을 그녀의 비궁에서 뺐다.

그리고 곧장 다른 여인에게 다가갔다.

아직 자신은 한참이나 남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네 차례구나.”

“어맛! 폐하두.”

“크핫핫핫!”

“….”

밀턴은 여인들의 달콤한 신음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주인이 그때 보여 줬던 카리스마를 지우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와, 처음에 했던 행동을 그대로 되풀이하기 시작한 탓이다.

누차 말하지만 그는 너무나 게을렀다.

또다시 말하지만 그는 식탐도 너무 강했고, 여색을 너무 밝혔으며, 잠자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의 돌아온 하루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을 깨우는 시녀를 탐하고, 점심 식사를 하며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를 탐하고, 간식을 먹고 잠시 달콤한 잠을 잔 후, 저녁 식사를 하며 시녀를 탐하고, 간식을 먹으며 방에 들어가 방 정리를 하고 있는 시녀를 탐하고, 자기 전에 밀턴 자신이 보내준 아이들을 탐하며 잤다.

자신이 말한 대로 충실하게 악을 실행했다.

밀턴은 노화가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지만, 뭔가 생각이 있으려니 스스로 자위하며 매일매일을 보냈다.

물론 심층 저 깊은 곳에서는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지만….

“…에효.”

명색이 과거 이 세상을 노리던 이름 없는 마왕의 애환이 가득히 담긴 한숨이었다.

타락한 날개는 바닥에 널브러진 여인들을 한 번 쓱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쉽다.

조금 더 여인들과 몸을 섞어가며 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할 일이 있었다.

타락한 날개는 옷걸이에 걸려 있는 가운을 걸치고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 전 인간으로 마족을 만들어낸 5명의 수하를 불렀다.

“나와라.”

허공에 5명의 기사 복장을 한, 반쪽짜리 날개를 지닌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5명의 수하는 각자 리쿤, 앤시아, 밴도, 라이너, 카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타락한 날개는 아직까지 이들에게 마력을 주입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마력을 주입하여 온전한 마족으로 탈바꿈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저들을 수하로 만들 당시, 마력을 주입하지 않고 저들끼리 싸움을 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리쿤이라는 녀석이 의아한 모습을 많이 보여 준 탓에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녀석은 독특한 공격법을 만들어서 과거 동료들을 쓰러트렸다.

마나의 절대량이 비슷한 동료 넷을 혼자서 쓰러트린 것이다.

재밌는 결과였다.

무엇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의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부름에 녀석들이 작게나마 반항하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반항의 힘이 거세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령을 하면 듣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정말 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신의 명령에 개인적인 사고를 담다니.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영겁의 시간 동안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에게 심령(心靈:이 글에서는 계약의 조건으로 심장을 먹는 행위를 함으로 인해 종주의 권리를 획득한다.)을 빼앗긴 존재는 모두 한결같이 자신에게 절대복종을 했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생겼다.

인간이라서 자신과의 절대 계약에서 어떻게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특별한 존재기에 그런 것인지.

그 이유로 얼마 전에 평범한 인간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았다.

하지만 그 실험체에게서는 거부반응을 느낄 수 없었다.

그렇게 100명이 넘는 인간들을 실험했지만 저 다섯 녀석들과 달리 모두 절대복종을 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고민해봤다.

그러다가 하나 떠올랐다.

다 벌레 같아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인간 중에서도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수련을 조금 했다는 병사 100명과 기사를 각 등급별로 10명씩 실험에 사용하기로 했다.

조금 번거로웠지만, 밀턴이 잘해주었다.

자국에서는 문제가 되니 타국에서 납치를 해온 것이다.

뭐, 그건 타락한 날개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실험만 할 수 있으면 되는 문제니까.

병사는 평민과 다를 바 없었다.

기사도 어웨어급이나 익스퍼트급은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마스터급의 녀석들을 실험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반응이 있었다.

미약을 넘어 거의 간질거리는 수준이었지만, 처음으로 타락한 날개가 원하는 반응을 발견한 것이다.

그 이상의 녀석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우선은 호기심이 약간 풀렸다.

어떤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인간 중에서 수련을 한 강한 존재는 죽어서도 자의식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진 않았다.

마계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질투심이 유난히 강한 듀라한이나 다크 나이트 같은 허접한 녀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종의 자의식이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니까.

여하튼 재밌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인 것이니까.

타락한 날개는 저 다섯 녀석이 얼마나 자신에게서 자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마기를 주입받은 녀석도 자의식을 찾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리쿤과 앤시아, 그리고 밴도는 그냥 놔두고 라이너와 카젠에게는 자신의 마기를 주입시켰다.

그러자 라이너와 카젠은 자신이 지닌 능력의 10배 이상이 강해진 대신, 바로 자의식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절대복종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쿤과 앤시아, 그리고 밴도는 조금씩 어떻게든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날 미세한 몸부림을 쳤다.

이번에는 색다른 실험을 준비했다.

밴도는 그대로 놔두고, 리쿤과 앤시아에게 인간이었을 때의 무공을 익히라고 한 것이다.

리쿤과 앤시아에게서 재미난 결과가 나타났다.

바로 자신이 짐작하고 원하던 반응이 말이다.

둘의 힘이 강해질수록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정말이지 재밌었다.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실험을 준비했다.

이번에는 라이너와 카젠에게 주입했던 마기를 카젠만 다시 뽑아내기로 한 것이다.

그러면 자의식이 돌아올지 궁금했던 것이다.

아직 정확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결과가 나온다면 더욱 재밌어질 것 같았다.

결국 매일같이 실험의 결과를 확인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타락한 날개는 그들을 찬찬히 살핀 후 다시 돌려보냈다.

이제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는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 해도 식사 시간을 놓치는 것은 피했다.

세상에서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었다.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보았지만, 중간계에서 인간들이 만드는 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놓친다는 것은 정말이지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니, 밀턴이 모든 식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타락한 날개는 밀턴이 준비한 식사를 맛있게 들었다.

음식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며 모든 미각을 살려서 먹었다.

여인과의 잠자리와는 다른 거대한 즐거움이 음식에 숨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타락한 날개는 모든 이들을 물렸다.

자신과의 잠자리를 기대했던 시녀들이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지엄한 황제의 명인지라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때, 타락한 날개가 입가심으로 따른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문을 열었다.

“나와라.”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오라니,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그런데 바로 그때, 커튼이 걷어지며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를 보며 타락한 날개가 물었다.

“드래곤인가?”

그 말에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했다.

“자넨 누구지?”

“뭐야? 설마 모르고 찾아온 건가?”

“세상에 현신한 마왕 이런 거 말고.”

“아, 내 이름을 말하는 거군. 열심히 조사하던 것 같은데 아직도 못 알아냈나?”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흠칫 놀랐다.

“내가 조사하고 있단 것을 알았군.”

“모를 수가 있나. 쥐새끼들이 여기저기 바삐 움직이는데.”

“그런데 왜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지.”

“상대할 시간이 어딨겠나. 나도 바쁘다고, 친구.”

“하긴 매일 인간과 관계를 맺느라 눈코 뜰 시간도 없어 보이긴 하더군.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자네의 이름이 뭐지?”

붉은 머리카락 사내의 질문에 타락한 날개가 마지 못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많은 이들이 나를 보고 타락한 날개라고 하더군.”

순간, 붉은 머리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

타락한 날개가 자신의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윙크를 했다.

매혹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에게는 전혀 매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힘겹게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눈앞의 사내가 그 이름을 듣기 싫어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 탓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는 감히 상상도 못한 존재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락한 날개가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에게 물었다.

“이젠 자네 차례군.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러자 붉은 머리카락의 사내가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브라키우드.”

검황의 이름으로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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