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조급한 선택
1
폭주를 한 앤디가 창백한 안색으로 죽은 듯이 누워 있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이, 간혹 한 번씩 뛰어대는 심박이 앤디가 살아 있음을 말해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냥 숨을 넘기고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베르커스는 이것이 스스로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라며, 손대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한 마을을 처참하게 몰살시킨 장본인들은 태연하게 옆 마을로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안드레이의 노력으로 죽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것 정도라고나 할까?
물론 그들에게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였겠지만.
뜨거운 차를 앞에다 둔 안드레이와 일행들.
안드레이가 첫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사연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안드레이의 질문에 베르커스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정말이지 대단하군. 그런 상황을 목격했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다니. 반면에 저 녀석은….”
베르커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탈리온의 굳어 있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조금 전의 전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안드레이는 대답 없이 그냥 미소 지었다.
베르커스가 물었다.
“그래, 무엇이 듣고 싶은가?”
“제 제자와 어르신들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
“자기 절제와 정신력 강한 저 녀석이 앞뒤 재지 않고 폭주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가? 하긴 얼굴을 보기 무섭게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으니, 자네 제자와 우리의 사이가 궁금하기도 하겠지. 자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혹시 환생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그 말에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가 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베르커스가 놀라는 눈빛을 지었다.
“저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
“예.”
“쉽지 않은 이야기를 했고, 쉽지 않은 이야기를 받아들였군. 그렇다면 설명하기 쉽겠군. 저 친구의 전생에 저 친구가 사랑하는 여인을 우리가 죽였다네.”
조금 전 마을 하나가 날아간 것에 비해서 허탈할 정도로 간단명료한 설명이었다.
물론 내용은 간단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안드레이는 그냥 그렇군, 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가 끝이었다. 마치 ‘뻔한 이야기였군.’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원하는 답을 듣고 만족해서 끄덕이는 것 같았다.
뭔가 일반적인 반응이 아닌지라 베르커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그때, 안드레이가 베르커스의 대답에 꼬리를 물었다.
“지금 그 말씀은 두 분은 환생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 같군요. 제 생각이 맞습니까?”
“맞네.”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원을 넘어서 오셨다는 뜻입니까?”
“그것도 맞네.”
“그게 가능합니까?”
베르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놀라지 않는군?”
안드레이는 태연하게 답변했다.
“마신도 등장하고 환생도 하는 세상인데, 차원을 넘어오는 것 정도로 놀라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수긍하는 듯이 주억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드레이가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생한 사람들이 모두 제 제자가 살던 세상의 사람들인 것 같더군요. 앤디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모르는 것 같았지만, 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게 상당히 이상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그 환생이 두 어르신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 없습니까?”
그 한마디에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놀란 눈으로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탈리온의 말을 듣고 설마설마했는데, 생각보다 놀라운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이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환생을 하는 존재들이었다.
환생 자체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희한하게도 자신이 있던 중원의 존재들만 환생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만일 다른 세상 사람이라든가 과거의 사람들이 환생을 하고 있었다면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그전에도 환생에 관련된 일이 있었는가 알아봤지만 없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오고부터 그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뭔가 자신들에게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마령환이라든가.
자신들만의 고민을 안드레이가 콕 집어서 질문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하긴 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습니까?”
“결론이랄 것도 없다.”
“그럼….”
“이것저것 알아본바 확실히 우리 때문에 생긴 현상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째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 다만 한 가지 추측이 가는 것이 있는데, 바로 마령환이다.”
“마령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아마도 이것이 그 세상의 고수들을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요.”
안드레이가 긍정의 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질문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인데, 어떤 계기로 차원 이동을 하게 되신 겁니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안테르트가 대답했다.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거지?”
“진실을 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대답을 했으니, 이번엔 우리가 자네 이야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네만.”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십니까?”
“자네가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하군.”
“지금 제가 두 분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에 대한 추론의 결과를 말씀해달라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어째서 그게 궁금하십니까? 단지 제 생각일 뿐인 것을 말입니다.”
베르커스가 대답했다.
“보이거든.”
“예?”
“자네 머릿속에 키 하나가 어떤 문에 꽂혀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말이네.”
“….”
“하지만 그 키가 어떤 문을 열려고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 그런데 자네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자네의 생각이 어떠한지 엿볼 수 있을 것 같거든.”
“솔직하시군요.”
“속일 필요는 없잖는가.”
베르커스의 말에 안드레이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제 머릿속의 키라니요. 그런 게 보이셨습니까?”
“그렇다네. 어떤가. 자네가 생각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차원 이동을 했고, 왜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는가?”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과대평가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네는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라네.”
안테르트의 말에 그제야 안드레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봤을 때 두 분은 차원을 넘는 어떤 방식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넘어오실 생각은 없으셨지요. 그런데 어떤 계기가 생긴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분은 차원의 벽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피해서일 수도 있고, 무엇인가를 버리려고 그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둘 다일까요?”
안드레이는 베르커스와 안테르트의 얼굴을 살폈다.
둘은 전혀 변함없는 덤덤한 표정으로 안드레이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이었다.
잠시 흐릿한 미소를 그린 안드레이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제가 생각한 추론은 우선 여기까지입니다. 두 분에 대한 정보가 너무 단편적인 것이라 그 이상은 상상이 힘들더군요.”
베르커스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군.”
“상상이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가?”
베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안테르트가 말했다.
“대단하네. 우리가 해준 이야기를 토대로 거기까지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말이야.”
“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맞은 모양이군요.”
안테르트는 의미심장한 고갯짓을 보였다.
수긍을 하는 것인지, 부정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고갯짓이었다.
“우선 궁금한 게 있다네.”
“물어보십쇼.”
“어째서 우리가 차원을 넘어올 방식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나?”
“만약에 실수로 넘어오신 것이라면, 두 분이 동시에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로 넘어올 확률은 희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르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그런가?”
“발견이라는 것은 대부분 우연에서 시작되지만, 우연이라는 녀석은 생각보다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덕이 너무 심하거든요. 그렇다면 어느 정도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현실적인 시각이라고?”
“그렇습니다. 차원의 벽을 발견하신 것이 정말 우연이라 하더라도, 그 틈이란 불완전한 것일 것입니다. 목적지의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신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두 분이서 작정을 하고 넘으신 것이 아니라면,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만나실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안테르트가 비꼬듯 말했다.
“발상과 말이 모두 억지군.”
“어차피 추론에 불과하니까요. 저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제 생각을 말한 것일 뿐입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사실에 근접하다고 생각하는 추론 말입니다. 이젠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아시겠습니까?”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이번에는 제가 묻겠습니다. 마령환은 파괴가 안 되는 물건입니까?”
“어찌 그걸 알았는가?”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다시 한 번 놀랐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한 이야기 중에서 지금 안드레이가 저런 질문을 할 만한 이야기를 꺼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까지의 평안한 눈빛과 달리 그 속에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파괴가 가능했다면 다른 차원에 버릴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
2
안드레이가 탈리온 등과 만나고, 앤디가 전생의 원수들을 만나서 폭주하여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대륙에는 많은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마기를 느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이들은 그냥 몸이 안 좋아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자들은 그 강렬한 마기를 놓칠 수 없었다.
이미 전 대륙의 왕국과 제국이 마왕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대륙의 지배자들이 서로 연합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며 일어났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이 열린 것이 아니었다.
마왕의 존재 여부를 부정하거나 인정한다 하더라도 아직 아무런 일도 없으니 그냥 지켜보자는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마왕을 우습게 보고 있던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큰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마왕의 존재를 우습게 여긴, 베리오스 대륙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쿠렌트 제국의 황제 쿠렌트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연합? 필요 없다.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 대륙의 지배자로서 대륙의 질서를 위해 짐이 직접 마왕이 강림하고 마왕을 섬기는 콘 왕국을 멸할 것이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쿠렌트 황제는 3개월도 안 되는 시간에 100만이라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하여 콘 왕국을 향해 보낸 것이다.
역시 대륙 최강의 제국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역시 쿠렌트 제국이라며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100만의 병력이라면 충분히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안드레이는 그것을 막고 싶었지만, 이미 진군한 병력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대 황권을 지닌 독선적인 황제 쿠렌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말이 곧 법이었기 때문이다.
무소불위 권력에 취해 있던 황제의 그 성급한 선택은 세상의 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변화의 계기가 황제가 보낸 100만 대군이었다면, 변화의 시작은 한 존재의 한마디로 시작되었다.
“밥값이나 해야겠군. 귀찮지만 더 놀려면….”
콘 왕국의 국경 지대를 넘어선 쿠렌트 제국의 100만 대군.
그들은 기세당당하게 콘 왕국에 들어섰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콘 왕국은 총인구가 30만도 안 되는 작은 왕국이다.
그런 콘 왕국에서 100만의 병력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만 마리의 몬스터들로 인해 한바탕 곤욕을 치렀지만, 그들은 당당하게 몬스터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수만의 몬스터라고 해도 100만의 병력 앞에서는 큰 힘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 앞에 저 멀리서 누군가 휘적휘적 유유자적한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렌트 제국의 병력들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우연히 모르고 지나치는 모습이 아니다. 분명하게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전장 한가운데 저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신이라고 한다면 붉은 기를 들고 소속을 밝히며 찾아왔을 것이다.
절대 저건 아니다.
아무리 용맹한 적장도 저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저 자식 뭐야?”
“미친 거 아냐?”
지금 저 모습은 자살하러 온 녀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쉬익! 팡!
쿠렌트 제국 병사 중 누군가가 쏜 화살이 그 사내 발 앞에 꽂혔다.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안타까운 탄성을 토했다.
그 탄성에 힘입어 다시 쏘아진 화살.
사내는 화살이 날아오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텅!
모두 눈을 의심했다.
기세 좋게 날아가던 화살이 튕겨 나간 탓이다.
착각인가 싶었지만, 사실이었다.
그것을 보며 사람들은 놀라기는커녕 비웃음을 흘렸다.
뜻밖의 결과이긴 했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큭큭큭큭! 지금 숨겨 둔 한 수가 있다고 드러낸 건가?”
“그건 그렇고, 저 녀석 혼자서 우리 병력을 막겠다고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설마가 사람 잡는다잖아. 공포심에 머리가 해까닥 돌아서 저럴 수도 있지.”
“그런가? 킥킥킥킥!”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히죽거리며 떠들어댔다.
이들에게 저기 모습을 드러낸 의문의 사내는 그저 흥밋거리에 불과할 뿐이었다.
사내의 신형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때쯤, 그가 바닥을 퉁 튕겼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신형을 날려 쿠렌트 제국의 병력 한가운데로 파고 들어갔다.
그것을 본 쿠렌트 제국의 기사와 병사들이 눈에 살기를 뿜었다.
“미, 미친 새끼! 정말로 혼자 우리를 치러 온 거였어!”
“으득! 우리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으면! 녀석을 죽여라!”
하지만 그 명령은 이행이 불가능했다.
그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몰려든 병사들이 사내에게 다가서기가 무섭게 흉부를 비롯해서 양팔이 함께 잘려 나가며, 둔탁한 소음과 동시에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믿어지지 않았다.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병사들이 그렇게 죽은 것이다.
하나같이 자신들이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절명한 탓에 눈도 감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 사내를 중심으로 자욱하게 피어나는 피 안개!
그리고 바람을 타고 유유히 퍼져 나가는 혈향!
“뭐,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의문이 들기도 전에 사내가 걷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창과 검을 찔러 넣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사내의 옷깃 하나 건들 수 없었다.
다가서기도 전에 몸이 토막 나서 바닥에 깔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300명이 추가로 죽는 시간은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이들의 수는 죽은 사람의 30배도 넘었다.
두려움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건 미친놈일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으, 으으!”
“저, 저자 대체 누구야!”
하지만 의문에 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내는 여전히 산책을 하듯이 느긋하게 걸어 나갈 뿐이었다.
스응! 스응!
날파리가 앵앵거리는 듯한 이상한 소음이 들리지만 그 소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뒤로 뒷걸음질하다가 뒤에 자리하고 있는 병력들로 인해서 더 이상 물러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사내는 신경 쓰지 않고 그 앞을 그대로 지나갔다.
그 사내의 모습에 병사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 으아!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
서걱서걱!
병사들은 마치 날카로운 검에 썰리는 뼈 없는 살코기처럼 토막이 나서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또다시 500여 명이 그렇게 죽어났다.
속수무책이라는 말이 이런 데 사용되는 것인가!
사내가 걷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그가 지나온 길은 시체와 피로 즐비했다.
아무도 그 어떤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근처에 다가서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썰어지니 말이다.
마치 원래 썰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신체가 뚝뚝 나가떨어졌다.
공포의 비명이 퍼지고 전염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막기 위해 뒤늦게 기사들이 움직였다.
100만의 병력이 이동하는 중이다.
소란을 파악했지만, 쉽게 근원지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사이에도 사람들이 녹아내리듯 사방에 고깃조각들을 흩뿌리며 죽어나갔다.
“모두 물러서라!”
누군가의 외침!
모두가 기다렸던 그 목소리다!
병력들이 진형을 변형하며 순식간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기사단장이 300여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나같이 최소한 오러를 검에 사용할 줄 아는 고급 유저들이었다.
그중 말을 타고 있던 기사단장이 자신들을 봤음에도 유유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네 녀석은 누구냐!”
“….”
사내는 힐끔거리며 자신을 향해 소리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뭐가 짖느냐는 듯 한없이 무료한 시선.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사내의 외모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자마자 저 사내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위에 시체가 널려 있고 눈앞에서 여전히 병사들이 죽어나가고 있음에도 말이다.
사실 기사단장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뒤쪽에 있다가 병사들을 뒤로 물리고 모습을 드러낸 모든 기사들이 같은 생각을 했다.
저 사내가 사람을 죽였을 것이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저런 성스러운 외모를 지닌 자와 살인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이성을 찾았다.
모든 현장이 저 사내가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죽이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저 존재를 죽이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그래서 명했다.
“멈춰라!”
멈출 리가 없었다.
사내는 기사단장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왔다.
이제 기사단장과의 거리는 20미터 앞까지 와 있다.
“죽고 싶으냐! 멈추라 했다!”
무슨 말에 반응한 것일까? 갑자기 사내가 피식 웃었다.
순간, 빛이 환하게 터지는 것처럼 사내의 주위가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두근!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경외스러워 가슴이 떨려 왔다.
이제 거리는 10미터도 안 남았다.
그때, 기사단장이 정신을 갈무리하고 당당하게 외쳤다.
“저자를 잡아라!”
그 명을 받든 기사 둘이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검도 뽑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들은 왠지 검을 뽑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내에게 다가서던 기사 둘이 ‘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을 터트렸다.
순간, 머리에서 발끝까지 세로로 쩌억 갈라졌다.
얼굴과 머리를 시작으로 가슴과 등이 벌어지듯 앞뒤로 갈라지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두 기사 모두 온갖 내장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로 뜨거운 김과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기사단장의 머릿속에 자신의 머리끝에서 사타구니까지 화끈한 뭔가가 쓸어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사단장의 위풍당당한 몸이 타고 있던 말과 같이 좌우로 갈라지며 쓰러진 것은, 그 느낌이 전신을 아르고 나서 한 번의 호흡을 내쉰 후였다.
3
기사들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다, 단장님!”
“뭐야! 지금 무슨 일이…!”
의문이 풀렸을지 모르겠다.
같은 방식으로 목이 잘렸으니까.
뒤늦게 정신 차린 기사들이 몸을 뒤로 빼며 검을 뽑아 오러를 밀어 넣기 시작할 때쯤, 이미 몰려들었던 300명의 기사들 중 100여 명이 숨을 거둔 후였다.
기사들이 충혈된 눈으로 비명을 지르며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들이라고 병사와 다르지 않았다.
오러를 사용하건 못하건 간에 사내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덤벼드는 족족 죽어나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혈수가 되어 녹아 사라졌다.
허망한 죽음.
지금까지 몇 분이 되지도 않은 시간에 1천 명이 넘는 기사와 병사들이 고깃덩어리, 혹은 혈수가 되어 녹아내렸다.
사내는 그동안 자신의 걸음걸이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처음과 같이 태연한 걸음을 유지하며, 자신이 만들어낸 피의 강을 유유자적 걸어 나갔다.
그 모습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더 공포스러운 사실은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병력들이 뒤로 한껏 후퇴하고 나자 더 이상 사내에게 다가가는 존재들이 없었다.
누가 그에게 다가간단 말인가.
죽고 싶은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마법사들은 전후 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사내를 향해 마법을 날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법 역시 사내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강맹하게 날아가던 마법들이 사내의 주위에 닿기 무섭게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법사들은 눈이 튀어 나올 듯이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사내를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시 공격을 시도합시다!”
“알겠습니다!”
마법사를 이끄는 마법단장의 한마디에 모두 자신이 부릴 수 있는 최고의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그리고 곧 성이라도 무너트릴 듯한 거대한 에너지가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쿠와아아아아!
그 거대한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들은 지쳐서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곧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번에도 마법들이 스르르 녹아내리듯 사라진 탓이다.
순식간에 마법사들의 가슴속에서 자신감이 사라졌다.
바로 그때, 사내의 주위에서 강맹한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무료하다 못해 지루하게까지 보이던 사내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제길, 육포라도 가지고 오는 건데.”
사내로서는 지루할 만도 했다.
매일같이 지옥에서 벌이던 살육이다.
중간계라고 다를 것이 전혀 없던 것이다.
“뭐, 이번만 움직이면 한동안 편해지겠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인 사내가 바닥을 박찼다.
쉬우웃!
사내의 몸이 대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사내의 몸으로 인해 전방 100터 내에 존재하고 있던 병사들이 거칠게 난도질당하여 찢어진 것처럼 토막이 나서 죽어나자빠지기 시작했다.
“으악!”
“으아아악!”
사람들이 경악을 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질서정연하던 쿠렌트 제국의 병력은 이제 사방으로 흩어지기 바빴다.
사내는 다시 유유자적 걸음을 옮겼다.
간혹 병사들이 밀집되어 있으면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갑작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순간에 수만의 병사들이 그 사내 한 명에게 죽어버렸다.
모두가 경악했다.
이 대병력을 이끌고 온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하나같이 두려움에 누구 하나 나서질 못했던 것이다.
“마, 마왕이다! 마왕!”
“마왕이야!”
“으아악! 살려 줘!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그 말에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저 사내가 마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너무 창졸지간에 일어난 당혹스러운 상황에 두려움만 머릿속에 가득했지,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귀족들 중 강단이 있던 귀족도 분명히 있었다.
엔슬린 백작이 바로 그였다.
그는 자신의 주위에 있는 병력들을 독려하고 위협하여 다시 정비했다.
그라고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마왕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저 아름다운 존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하고, 솜털이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이대로 마왕에게 농락당할 수는 없었다.
그게 인간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엔슬린 백작은 마법이 통하지 않았지만 물리적인 공격은 통용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떨어지기 무섭게 2만여 명의 궁병을 모아 외쳤다.
“모두 장전하라!”
궁병들은 모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향해 높이 활을 쳐들었다.
“쏴라!”
엔슬린 백작의 명이 떨어지자 궁병들이 재어놓은 시위를 놓았다.
핏핏핏핏핏!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같은 소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며 검은 구름 떼와 같은 화살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사내는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힐끔 시선을 돌렸다.
터덩! 텅텅텅텅! 터더더더더더더더덩!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
그 화살의 사거리에 자리하고 있던 같은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두 환호했다.
왠지 예감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번 공격이라면 사내를 어떻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의 행복한 착각에 불과했다.
사내는 조금 전과 같은 상태로 태연하게 서 있었다.
아, 하나 변한 게 있었다.
처음으로 사내의 걸음이 멈춰 선 것이다.
즐거웠던 것일까?
사내가 갑자기 히죽 미소 짓고는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가볍게 들었다.
그러자 바닥에 깔려 있던 수천여 개의 화살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엔슬린 백작이 다급하게 뒤를 돌아 포탄을 장전하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발사하라!”
쾅쾅쾅쾅쾅!
연쇄적으로 포탄이 쏘아지며 사내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퍼펑! 펑펑펑!
쇳덩어리 포탄으로 인해 사내의 주변이 움푹 파이며 터져 나갔다.
사내는 그 속에서 웃기 시작했다.
“킥킥킥킥킥! 재밌군. 생각보다 재밌어.”
하얀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마치 땅에 구름이라도 핀 것처럼 보일 정도다.
모두 관심 어린 시선으로 구름 속을 주시했다.
그때, 구름 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슈슈슝! 슝슝! 슈슝!
놀랍게도 그것은 화살이었다.
퍼버버버벅!
소나기처럼 퍼부어지는 화살비!
“으악!”
“크아악!”
“커헉!”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바늘꽂이가 되어 죽어나갔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이 너무 어리석었다.
마왕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왕이라는 존재는 자신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정말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으아악! 나, 나타났다!”
“저 위에 녀석이 나타났다!”
“도, 도망쳐!”
“히이이익!”
먼지구름 위로 그 마왕으로 추정되는 사내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둥둥 떠 있었다.
용맹하던 쿠렌트 제국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관리가 될 리 없었다.
그들을 지휘해야 하는 지휘관들도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도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비웃을 뿐이었다.
그는 병사들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며 사방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마치 여기저기 지시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손짓이 아니었다.
그 손가락이 뻗어지기 무섭게 땅이 폭발했다.
쾅! 콰앙! 콰과광!
“크악!”
“으아아악!”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시체들이 넝마가 되어 사방에 널브러졌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울부짖음.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그 분위기는 한순간에 번져서 살아 있는 수십만의 병사들이 함께 무릎을 꿇어나갔다.
그러나 사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계속 손가락을 사방에 뻗을 뿐이었다.
쾅! 콰광!
“룰루룰. 룰루.”
자신의 콧노래에 맞춰 폭발을 시키는 것 같았다.
콰과과광! 쾅쾅!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폭발에 휩싸였다.
사내의 장난 어린 모습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저주하며 죽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