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5화 (68/68)

제6장. 순수한 악

1

“헛!”

밀턴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터져 나온 거대한 기운!

그것은 너무나도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마기였다!

마계에서나 느낄 수 있는 마기 말이다.

다급하게 그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마기의 영향일까? 사방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일개 인간이 저토록 강력한 순수한 마기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들조차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순간, 자신이 할 일을 깨달았다.

이 기운이 밖으로 더 퍼지거나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피해가 더 커진다면 앞으로의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밀턴은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미리 구축해두었던 마법진을 시동하여, 마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낼 수 있었다.

급한 불을 끈 밀턴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다시 가기 시작했다.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방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만한 시선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레온 프라메트 1세였다.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등 뒤로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검은 날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밀턴이 검은 날개를 달고 있는 레온 프라메트 1세를 보고는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평소와 달리 지금의 모습에서는 신실한 마음이 보일 정도였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넌 누구냐?”

“저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레온 프라메트 1세가 피식 웃었다.

“마계에서 온 녀석이군. 네 녀석이 날 깨운 것이냐?”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밀턴이 황망한 듯한 어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주인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감히 제가 주인님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주인님께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실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아케브라이누세스카나우베테말루지마루….”

“그만. 쉽게 가자.”

“밀턴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이곳에서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타락한 날개시여.”

“큭큭! 밀턴이라. 네 마계 서열이 어떻게 되지? 못해도 100위 안에는 드는 녀석 같은데, 아무리 내 앞이라 해도 허리 굽히는 게 쉽지 않겠어.”

“38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님은 마계의 지배자이십니다. 제가 어찌 경망된 생각을 하겠습니까?”

밀턴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밀턴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 같은 존재가 떼로 달려들어도 그의 검은 깃털 하나 건드릴 수 없이 몰살당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와 함께 마계를 5개로 나눠 다스리는 바알, 메피스토, 디아블로, 벨제뷰트조차 그의 힘이 두려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물론 겁을 상실한 아스타로트가 끊임없이 덤벼든다고는 하지만, 그건 크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레온 프라메트 1세, 아니 마계에서 중간계로 현신한 타락한 날개가 말했다.

“배가 고프군.”

“그러실 거라 생각하고 미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타락한 날개는 공손하게 안내하는 밀턴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밀턴은 이미 텔레파시를 통해 30명의 사령단을 시켜 마물을 불러들인 상태였다.

3만 마리의 몬스터를 모두 모은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1만 마리 정도라면 순식간에 모으는 것은 가능했다.

다행스럽게도 밀턴과 타락한 날개가 도착하기 전 2만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30명의 사령단은 무릎을 꿇고 밀턴과 타락한 날개를 맞이했다.

그들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마기에 친숙한 이들이었지만, 이토록 강력한 마기와 거대한 위압감 속에서는 몸을 가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밀턴이 나름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타락한 날개에게 말했다.

“세상에 현신하시느라 힘드셨을 것입니다. 저 녀석들로 소실된 마기를 충족하시옵소서.”

순간, 타락한 날개가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저것들은 뭐냐?”

“주인님을 위한 것들입니다.”

“네 녀석의 눈에는 저게 음식으로 보인단 말이냐? 저 냄새나고 더러운 녀석들이?”

“예? 저, 그, 그게 아니오라….”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올라오는군.”

밀턴은 당황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타락한 날개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타락한 날개의 등에 달려 있는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펄럭이며 거친 바람을 일으켰다. 그리고 떠나가며 나직하게 한마디를 흘렸다.

“등심 스테이크. 레어로.”

“…예?”

밀턴이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타락한 날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남은 30명의 사령단은 긴장감이 풀어지자 바닥에 주저앉거나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제어를 상실한 몬스터들끼리 튀든, 지지고 볶고 싸우다가 뒈지든 말든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타락한 날개는 근엄한 모습으로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씹으며 육질과 육즙을 즐겼다.

‘바로 이 맛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음, 좋아.”

타락한 날개는 그 한마디를 하고 말없이 음식을 먹었다.

벌써 다섯 접시를 비우고 있었지만, 그동안 타락한 날개가 한 말은 저 한마디와 ‘더’가 전부였다.

밀턴은 약간 질리는 표정으로 타락한 날개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지켜만 봤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신이 나서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딴죽을 걸 군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 먹고 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겠거니 한 것이다.

달그락.

타락한 날개가 일곱 접시를 비운 후 근엄한 모습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포도주를 마신 후 차가운 물로 입가심을 마쳤다.

“잘 먹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배가 부르니 이제는 쉬어야겠다.”

“예?”

“왜? 내가 쉬는 게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내 시중을 들던 서큐버스들을… 흠, 없나? 그럼 괜찮은 아이들로 넣어라.”

뭔가 좀 황당한 밀턴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그림과 많이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수 있겠는가.

타락한 날개가 원하는 것이다.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괜찮은 아이들을 넣어드리겠습니다.”

“괜찮은?”

순간, 타락한 날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밀턴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말을 변경했다.

“최고의 아이들을 넣어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조용히 등을 돌려 사라지는 타락한 날개였다.

그가 모습을 완전히 지우자 밀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내가 감히 저분의 생각을 엿보려고 하다니.”

하지만 밀턴은 알지 못했다.

지금 것은 시작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2

“…하아.”

밀턴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갑한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내일은 아니겠지.’

그다음 날도 또 같은 생각을 했다.

‘설마 내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 다음다음 날도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는 정말 변화 없이 한결같은 나날을 보냈다.

“….”

으득!

밀턴은 타락한 날개를 보며 속이 부글부글 타들어갔다.

하루하루 스트레스로 인해 생겨난 위궤양을 약으로 다스려야만 했다.

그가 부활을 하도록 부추긴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힘들더라도 혼자서 복수를 시도했어야 했다.

매일같이 같은 고민을 하고 또 했다.

차라리 타락한 날개가 강림하기 전까지가 행복했다.

언제 부활할지 기다렸던 수십 년의 시간이 더욱 편했다.

지금은 하루 종일 전전긍긍 앓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불과 3개월 만에 한 1천 년은 늙은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밀턴은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

멋모르고 지옥에서 올라와 세상을 휩쓸려던 그때.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덤벼들던 인간들과 드래곤들의 견제를 받고 결국 인간 마법사에게 봉인을 당했던 치욕.

그래서 이번에는 봉인이 풀리고 나서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힘을 모았던 것이 아닌가.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마기에 반응하는 어떤 반지 모양의 기물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속에 자신 따위는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존재의 힘이 담겼음을 깨닫게 되었다.

저 기운만 있으면 자신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라는 사실을.

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자신이 얻게 되면 다른 거대한 존재의 부활을 위한 제물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 힘을 지닌 존재만 이 세상에 깨울 수 있으면, 그동안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인간과 드래곤들에게 참혹한 복수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끼는 것을 포기하고 그를 세상으로 이끄는 방법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 생각이 문제였다.

자신은 그 생각을 하지 말았었어야 했다.

자신이 어째서 그의 현신을 기다렸던가.

힘들더라도 자신이 직접 했었어야 했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때 그런 생각만 안 했어도 지금 자신이 지니게 된 스트레스 위궤양과 탈모(아니, 탈모라니! 마왕이 탈모라니. 이게 웬 망신인가!)를 경험하지 않았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밀턴은 쓰린 속을 옆에 있던 약병을 들이켜 가며 가까스로 달랜 후 다시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

사실 자신이 다른 마왕, 아니 마신의 존재에 기댈 생각을 한 것은 인간 같지도 않은 괴물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반지 모양의 기물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터무니없이 강했다.

드래곤도 아닌 인간 따위가 자신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그런 녀석이 둘이나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들이 무서워 기운을 숨기고 숨어야만 했다.

마왕 체면이 우습게 되었다.

저들을 처리해야만 한다고 결심을 하고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과 제자의 사이가 나쁘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최대한 손을 써서 결국 그들과 그들의 제자 사이를 가르는 데 성공하고, 제자를 이용해 그들을 다른 차원에 가두게 하도록 준비 과정을 거쳤다.

물론 자신이 그 일을 도운 사실을 도움을 받고 있는 제자조차 모르도록 해야만 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혹시라도 눈치를 채게 되면 좋을 게 없었다.

결국 그 괴물 같은 녀석들 둘을 다른 차원에 가두는 것을 성공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싹수 있는 그 제자 녀석을 다른 먼 곳으로 보내버리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평소 깐깐한 것과 다르게 자유라는 이름에 홀랑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조작하여 그를 제국의 공작으로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사실 당시 그를 직접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변수라는 놈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몰랐다.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조심해야 할 건 조심해야 했다.

돌다리도 두들겨 봐야 한다 하지 않던가.

굳이 위험을 만들지 않고 그냥 반지의 봉인이 풀릴 동안만 세상 밖으로 멀리 보내놓으면, 나중에 녀석이 성장한다 해도 세상에 현신할 그 존재의 힘을 통해서 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

얼마나 힘들었던가.

정말 눈물 없이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기대와 달리 그 오랜 노력 끝에 마계에서 중간계로 현신한 위대한 존재인 타락한 날개는 세상을 정벌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게을렀다.

너무 게을렀다.

그리고 식탐도 너무 강했고, 여색을 너무 밝혔으며, 잠자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이러했다.

아침에 일어나 자신을 깨우는 시녀를 탐하고, 점심 식사를 하며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를 탐하고, 간식을 먹고 잠시 달콤한 잠을 잔 후, 저녁 식사를 하며 시녀를 탐하고, 간식을 먹으며 방에 들어가 방 정리를 하고 있는 시녀를 탐하고, 자기 전에 밀턴 자신이 보내준 아이들을 탐하며 잤다.

그렇게 석 달의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석 달!

왠지 갑갑했다.

누군가의 뒷수발을 들기 위해서 힘들게 중간계로 현신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종노릇을 하고 있다니.

미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내색을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요령으로라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닌 탓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이상했다.

평소와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여자를 탐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정말 웃긴 것은 시녀의 모습이었다.

방에서 나오는 시녀는 실망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뭔가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보자 이유 모를 분노가 속에서 욱하고 치솟아 올랐다.

‘릴렉스, 릴렉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타락한 날개는 점심을 먹으면서 시중을 드는 시녀를 건드리지 않고 식사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다음엔 간식만 먹고 시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저녁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슬펐다.

이런 걸로 감격을 하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밀턴이 결국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지금의 변화는 좋은 것이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불안을 몰고 오는 탓이다.

“어째서 시녀들을 취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타락한 날개가 대답했다.

“너는 내가 색마로 보이느냐?”

‘그럼 뭡니까? 씨 뿌리는 농부?’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다.

물론 그러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마계로 강제 소환될 것이 뻔하다.

아니, 소멸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밀턴이 복잡한 속과 달리 겉으로는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큭큭! 나에게 바라는 게 뭔지 알고 있다.”

“….”

움찔!

밀턴이 찔리는 것이 있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반응하고 말았다.

그것을 보며 타락한 날개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타락한 날개는 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두려움을 느끼려던 찰나, 그가 단호히 말했다.

“하지만 클라나는 줄 수 없다?”

“….”

“….”

“예?”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밀턴은 그냥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그제야 타락한 날개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이게 아닌가?”

“주인님! 위대하신 분이여, 대체 중간계에 현신하신 이유가 무엇이시옵니까?”

“응? 그게 궁금했느냐?”

“그렇사옵니다!”

“흠… 생각을 안 해봤는데?”

“….”

“굳이 이야기하자면 휴가라고나 할까?”

“휴, 휴가란 말씀이십니까?”

밀턴은 그냥 바닥에 쓰러져서 드러눕고 싶었다.

“그렇지.”

“뭔가 원대하고 위대한 뜻은 없으십니까?”

타락한 날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없어.”

밀턴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3

“어째서이십니까! 이 세상을 암흑으로 만들겠다! 혹은 인간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공포를 심어주겠다! 세상을 파멸시키겠다! 등등의 여러 가지 일들이 수두룩한데, 정말 없으시단 말입니까?”

밀턴은 피를 토해내는 듯이 설토했다.

그런 밀턴을 보며 타락한 날개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야 하지?”

“그게 지옥에서, 마계에서 올라온 마왕의 본분 아닙니까!”

그 말에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는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그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당연 같은 소리 하고 있기는. 내가 너 같은 녀석을 잘 알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들어봐라. 마계가 지루해서 세상에 올라왔는데 생각해보니 마땅히 할 일은 없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빈둥거리다가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나 동화, 혹은 전설 같은 것을 주워듣다 보니 마왕은 세상을 파괴해야 하는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 아니냐?”

왠지 자신을 지금까지 관찰한 듯 자세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아닙니다.”

“아니긴. 큭!”

마치 속이 다 보인다는 듯 비웃음을 날려 주는 타락한 날개였다.

밀턴은 다시 속에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러다가 화병 날 것 같았다.

“지금 네 녀석이 발정난 개처럼 인간계를 뒤집어놓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괜히 마왕이라고 깝치다가 드래곤 같은 녀석들에게 굴욕스럽게 봉인되었다가 풀려나 복수심에 불탄 것 같은데 아니긴. 큭!”

밀턴의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너무나 적나라하게 맞혔기 때문이다.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에게 봉인당한 것이었지만, 쪽팔려서 차마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밀턴이 입을 다물고 있자 무언의 긍정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타락한 날개가 말을 또 이었다.

그는 한번 입이 풀리자 끝도 없이 쏟아부었다.

지금 이 순간, 타락한 날개는 석 달 동안 밀턴 자신에게 한 말의 수십 배는 많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인간들이 떠드는 그 이야기들이 어째서 나왔는지 알려 줄까?”

왠지 솔깃한 이야기였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귀가 쫑긋거리며 토끼 귀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타락한 날개가 피식 웃었다.

“그게 다 네 선배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선배라니요?”

“너보다 먼저 중간계에 발을 디딘 녀석들을 그럼 뭐라고 할까?”

밀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굳이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가 말문을 열었다.

“네 녀석 선배들이 처음에 무작정 중간계로 왔다. 하지만 중간계에 적응을 하지 못했지. 지옥에서 왔으니 성질이 좀 더럽겠느냐? 넘치는 힘을 주체 못하고 사방에 사고를 치고 다녔지. 그리고 할 일이 없다 보니 여기저기 시비를 걸어댔고, 결국 보다 못한 드래곤들이 나서서 녀석들을 죽이고 마계로 강제 송환을 시켰지. 그게 이야기가 다듬어지고 다듬어져서 마왕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가 떠돌게 된 거다.”

타락한 날개는 저렇게 가볍게 말했지만, 당시에는 심각한 일이었다.

엄청난 수의 인간이 죽어나갔고, 살아남은 이들은 멸망에 대한 공포에 떨었었으니까.

밀턴이 질문했다.

“그럼 어째서 먼 과거에 중간계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셨던 것입니까? 사실 저를 포함하여 전대의 마왕들은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중간계에 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질문에 타락한 날개가 미소를 지었다.

“알고 싶느냐?”

“예.”

“듣고 나면 네가 소멸을 해야 할 텐데도 말이냐?”

“….”

송환이 아니라 정확하게 소멸이라고 말했다.

밀턴은 입을 다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왕이라 해도 죽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은 귀한 것이니 말이다.

“큭큭큭! 그래, 궁금해하지 마라. 너희가 알아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말해줄 수 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중간계를 건 전쟁이 터지게 될 것이고, 그 시일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밀턴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이유 모를 기쁨에 전신이 부르르 떨려 왔다.

“목숨을 바쳐 승리하겠습니다.”

“큭큭!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지.”

“아직은 아니군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러니 복잡한 생각은 접어라.”

“알겠습니다.”

밀턴은 조금 기분이 나아졌다.

뭔가 자신들은 알 수 없었던 어떤 거대한 비밀에 다른 존재들보다 약간 더 앞서서 한발 다가선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날개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지금 내가 올라온 것은 말 그대로 유희다. 생각보다 중간계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 야들야들한 여자들도 많고. 마계처럼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것들도 없지.”

밀턴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 말고 다른 군주들이 지상으로 올라오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간계는 생각보다 재밌는 곳이거든. 조금만 힘주면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나갈 벌레 같은 것들이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꽤나 웃기지.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예? 어떤 존재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밀턴의 질문에 타락한 날개의 입이 다물어졌다.

말을 그쳤다는 뜻이다.

밀턴은 뭔가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생각을 돌려 보았지만 딱히 걸리는 것이 없었다.

그때, 타락한 날개가 다시 말했다.

“나는 네 생각과 달리 악의 군주로서 악을 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

“진정한 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밀턴은 타락한 날개가 말을 돌려서 뭔가 대충 넘어가려 한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 속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타락한 날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꾸했다.

“진정한 악이라니요. 나약한 인간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며 파괴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개 소리.”

“예?”

“진정한 악이란 바로.”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 말씀이십니까?”

타락한 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것이 바로 진정한 악이다. 게으름, 나태함, 성욕, 물욕, 식욕, 탐욕, 등등. 세상의 모든 욕망은 바로 악의 근원이지. 물론 그렇다고 그것들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악이 아니다. 일반적인 욕구에 불과하지. 악이란 바로 그것들에 의한 극단적인 치우침이다.”

“극단적 치우침….”

“그렇다. 극단적으로 그 욕망에 치우쳐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을 잊고 시간을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아!”

“고로 난 마계의 군주로서 충실하게 악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지.”

‘엥?’

밀턴은 순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아닌 것 같은데, 딱히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

당당한 타락한 날개의 한마디.

그의 말에 반응하듯 마령환이 검은 빛을 흩뿌렸다. 마치 옳다고 추임새를 넣는 듯한 분위기였다.

밀턴은 뭔가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악에 충실하고 있다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결국 밀턴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밀턴은 정말 그가 진정한 악마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암울한 미래가 그려진다.

‘씨, 씨발….’

밀턴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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