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4화 (67/68)

제5장. 브라키우드의 거짓말

1

태초에 완전한 종족이 생겼단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고 있다.

옛날에는 우매한 인간들이 이들을 신, 혹은 신의 심부름꾼으로 착각하기도 했던 적이 있다.

그들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이들을 픽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엘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부른다.

뭐가 옳은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엘프라고 부르는 편이니 엘프라고 하겠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가지고 이렇게 부르자 저렇게 부르자 떠들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뭐라 지칭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지칭하는 명칭에 인간이라 스스로를 지칭하는 존재들이 왜 그렇게 신경 쓰는지 의아해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스스로를 지칭하는 명사가 없었단다.

그것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 없을 수밖에….

그들과 만난 한 인간이 집요하게 물어보자 억지로 대답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냥 태고의 숲에 사는 존재라고 했단다.

그래서 그 인간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을 엘프라고 부르고 있소.”

그러자 그들은 엘프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단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인간은 ‘그냥 엘프라고 하오.’라고 대답을 했단다.

엘프를 엘프라고 하는데 무슨 뜻이 있겠냐고 생각한 인간과, 자신들에게 엘프라는 명사를 강요하는 인간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엘프.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 양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게 없어도 자신들은 존재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라 지칭하는 존재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든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 명사를 가진다고 자신들이 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애매하긴 하다.

분명히 중요하긴 하지만, 간혹 그런 것들이 정말 중요한지 의문이 들 때가 있으니까.

인간을 그냥 인간이라고 하지 않고 황인, 백인, 흑인으로 나누는 것만으로도 뭔가를 나누는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나누는 것을 또 나누고 또 나눠서 결국 개인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끝도 없지만, 이들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였다.

여하튼 이들은 스스로를 자연과 동일시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자연에서 스스로 생겨나서인지 조화신공을 익히지 않았음에도 자연과 하나였고, 자연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작정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것 나름대로 큰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너무 완전한 이상을 이룬 상황이다 보니 그 이상의 발전이 없이 도태된 탓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이 도태되고 있다는 그 이유와 사실에 대해서 한 치의 의문이나 의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을 설명하는 유명한 말이 하나 있었다.

‘인간이 숲을 지나면 오솔길이 생기고, 엘프가 숲을 지나면 그는 숲이 된다. 인간이 별을 보면 별자리가 생기고, 엘프가 별을 보면 그는 별이 된다.’

너무 완전하여 결국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존재들.

하다못해 생존에 대한 본능조차 크게 없는 상태였다.

그런 그들이 세상과 타협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신들의 존재에 의문을 가진 이들이 생겨났다.

그 이유는 놀랍게도 인간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성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포획을 시작한 추잡한 인간에게 당해, 숲에서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버틴 탓에 그들의 성향이 변한 것이다.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싸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막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간이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도태되고 있음을 깨닫고 스스로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동료들이 하나둘 숲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실종이 아니다. 실제로 숲이 되어 사라진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존재에도 분명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존재의 이유도 모른 채 이대로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문제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들의 문제의 답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었다.

복잡하게 머리를 싸매는 인간과 다르게 그들의 순수함은 그 문제의 답을 바로 찾아냈던 것이다.

인간들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모르는 의문을 던지게 되었고, 그들은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상황까지 갔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의 사소한 의문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인간들의 의문을 듣고 대답해주는 일을 버렸다.

자신들에게 그럴 이유가 사라진 탓이다.

그때, 독특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현자, 혹은 마법사라고 부르는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상식을 무시하는 듯한 의문을 툭 던졌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완전함에 의문을 던지는 것들이었다.

그들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듯한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의문들이었다.

그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선명해지는 대신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던 신성한 힘은 조금씩 소멸되었고, 그로 인해 엘드리안은 큰 소란을 겪게 되었다.

숲의 존재인 그가 앤디에게 말한 ‘그냥 돌아가 줄 수 없겠는가? 우리는 이대로 평화롭게 살고 싶다.’라는 말은 그 소란을 피하고 싶다는, 지금으로 만족하고 싶다는 의지의 반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지금 그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와중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자연의 어우러짐을 포기하고 세상에 나갈지에 대한 의논을 나누는 중이었다.

앤디는 그들의 얼굴을 살피면서 이질적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얼굴, 아니 존재에 현실성이 없었다.

‘현실성이라….’

상당히 애매한 말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다 비슷하게 생긴 얼굴들이다. 전체적인 외형도 물론이거니와 느낌도 마찬가지다. 마치 이렇게 생겨야만 한다고 종용받은 듯한 느낌의 얼굴들.

물론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개성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앤디의 시선과 비슷한 시선으로 그들도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그제야 머쓱해진 얼굴로 말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호기심을 위해 대답하지 않는다.”

“의문을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경청하는 모습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앤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받으십쇼.”

앤디는 구겨져 있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뭐가 적혀 있는지는 앤디도 알 수 없었다.

안드레이가 주라고 해서 건넸을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받아서 확인한 후 침묵했다.

“뭐가 궁금한가?”

“찾고 싶은 존재가 있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는 곧 답을 얻을 수 있었다.

2

“워워.”

이힝! 푸륵.

앤디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여긴가?”

엘드리안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16일.

정말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쯧! 정말 꽁꽁 숨어 있었군.”

앤디가 건물을 쭉 올려다본 후, 계단 위로 올라가 정문 앞에 서서는 사자 얼굴을 한 손잡이를 잡고 노크했다.

탕탕!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작은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앤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을 연 소녀가 말도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디도 별말 없이 그냥 시선을 마주했다.

소녀가 다시 갸웃거리고 그 큰 눈을 깜빡였다.

귀엽고 깜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 소녀의 뒤로 한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십니까?”

“앤디라고 합니다. 브라키우드 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

집사는 뒤를 돌아 하녀를 찾았고, 하녀는 집사의 눈길을 받고 소녀를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앤디는 의아한 시선으로 하녀를 따라 사라지는 소녀의 뒤를 주시했다.

“인간이군요.”

“얼마 전 주인님께서 거두신 아이입니다.”

앤디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집사가 말했다.

“드시지요.”

앤디는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계십니까?”

“잠시 출타 중이십니다. 하지만 나가시기 전에 누군가 주인님을 찾아오실 것이라는 언질이 있으셨습니다. 여기 객실에서 쉬고 계시면 오실 것입니다.”

누군가 찾아온다는 언질이라….

자신은 온다는 이야길 하지 않았었는데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단 뜻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찾아오는데 자신이 먼저 선객으로 온 것인가?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앤디는 편안하게 테이블에 앉아 다과를 즐겼다.

그러다가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는 꼬치를 들며 물었다.

“이건 웬 꼬치입니까?”

요즘에는 손님 접대에 꼬치를 놓는 건가 싶어서 질문하자 근처에서 일을 보고 있던 하녀가 대답했다.

“아, 주인님께서 요즘 꼬치에 빠지셔서….”

“아….”

앤디가 꼬치를 들고 한참 주시하다가 입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이, 이 맛은!’

냠냠! 쩝쩝!

허겁지겁! 허겁지겁!

먹어도 먹어도 입안에서 감칠맛이 맴돌며 식욕을 당기는 것이 아닌가.

앤디는 정신없이 5개의 꼬치를 해치우고 말았다.

그때, 조금 전 얼굴을 보였던 소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녀는 종종걸음으로 앤디가 앉은 테이블 옆에 자리하고 앉더니, 꼬치를 먹는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맛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앤디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하지만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보았다.

앤디는 소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며 꼬치를 먹지도 못하고 마주 봤다.

그때, 하녀가 소녀 대신 대답했다.

“그 아이는 말을 잘 못해요.”

“아, 그렇군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죠?”

“예.”

앤디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이 꼬치 같이 먹을래?”

그러던 중에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라키우드였다.

외출하고 돌아온 것이다.

어째서인지 브라키우드의 표정이 평소보다 더 차갑다.

그 이유인즉,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 표정이 그 표정이지만.

앤디는 브라키우드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했다.

“위대하신 존재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왔지?”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뻔하지. 나를 찾을 수 있는 녀석들은 세상에 한 부류밖에 없으니.”

“제가 올 것은 어떻게 짐작하셨습니까?”

“녀석들이 나를 파악할 수 있는데, 나라고 녀석들을 파악하지 못할까?”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분명히 나를 찾아오려면 뭔가를 가져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자네 인간치고는 똑똑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나쁜 건가?”

“조언을 얻기 위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자네가 얻는다고 하면 내가 줘야 하는 건가?”

앤디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브라키우드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먼저 거짓말을 하신 것은 브라키우드 님이셨습니다만.”

그 한마디에 브라키우드의 한쪽 눈썹이 위로 슬쩍 올라갔다.

브라키우드가 입을 열기 전에 앤디가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을 만든 녀석이 인간이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내가 그랬었나?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의외로 능청이 자연스러운 브라키우드였다.

아니, 의외를 넘어 뻔뻔할 정도의 포커페이스이기까지 했다.

“마왕의 존재를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죠?”

“마왕이라니, 무슨 말이지?”

“원래는 브라키우드 님께서 직접 잡으실 생각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저로 인해 그를 잡을 길이 사라지셨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모르셨습니까?”

브라키우드가 앤디를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도 그것을 물어보는 걸 보니 흔적은 찾은 모양이군.”

앤디가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제 예상이 맞았군요.”

“그 예상이 뭔지 궁금하군.”

“사실은 저에게 큰 기대를 안 하고 계셨다는 것 말입니다. 브라키우드 님은 제가 여기저기 그 녀석을 찾기 위해 들쑤시길 원했고, 그래서 마왕이 반응을 보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셨던 것이겠죠?”

“재밌는 추측이군.”

앤디와 브라키우드의 시선 사이에서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브라키우드가 웃고야 말았다.

“뭐, 거의 비슷하긴 해.”

“그럼 저희를 조금 더 믿어보시죠?”

“너희를 믿으라. 내가 너희의 어떤 점을 어떻게 믿어야 하지?”

“생각보다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쓸 만하실 겁니다.”

브라키우드가 비릿한 시선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너희에게 도움을 줘라, 뭐 이런 뜻인가?”

“….”

“큭큭! 재밌군.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아서 좋아. 그래, 내가 어떤 것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앤디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안드레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는 거기다가 덫을 하나 놓는 거다. 녀석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덫 말이다.”

“덫이라고요? 우리가 무슨 덫을 어떻게 놓는단 말입니까? 녀석들이 상상도 못할 덫이라니? 그런 게 우리에게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앤디의 질문에 안드레이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브라키우드.”

“예?”

“브라키우드를 덫으로 사용하자.”

앤디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헐! 스승님, 며칠 전부터 부쩍 안색이 안 좋아 보이셨는데, 결국 이상이 오신 모양이네요. 빨리 신관을….”

“내가 헛소리나 하는 늙은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앤디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지금 하시는 헛소리는 헛소리가 아니란 말입니까! 스승님은 지금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고요! 잠시만 계세요.”

“장난하지 말고 앉아라. 때릴지도 모른다.”

“누가 때린다고 하면 겁먹을 것….”

앤디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안드레이의 손에서 거대한 마나가 회오리치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하십쇼. 경청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놈.”

안드레이가 기운을 거뒀다.

“솔직히 스승님 말씀이 말이나 되냐고요. 브라키우드가 어떤 존재인데 그를 미끼로 쓴단 말입니까? 브라키우드의 동굴로 찾아가라는 것은 아니겠죠?”

“지금 브라키우드는 동굴에 없다.”

“예? 그걸 스승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이미 확인을 했지.”

“어떻게 말입니까?”

“다 방법이 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벽도 구멍은 있기 마련이지.”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를 어떻게 찾죠?”

“그것도 방법을 생각해놓았다. 혹시 엘프라고 아느냐?”

“어떻게 모르겠어요.”

“그들에게 부탁하면 알려 줄 것이다.”

“그들이 부탁한다고 들어주는 존재들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거래를 트면 되지.”

“거래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 주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브라키우드의 위치를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거의 다 알고 있다. 자신들의 미래만 빼고 말이지.”

안드레이의 말에 앤디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의 미래만 빼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요?”

“그렇다.”

“신기한 종족이군요.”

“신기하지. 직접 만나보면 더 신기할 거다.”

“마치 만나보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물론이다.”

앤디는 놀란 눈으로 안드레이를 보았다.

“스승님이 안 해보신 거나 못해보신 것이 대체 뭡니까?”

“임신은 못해봤다.”

하나 마나 한 대답이었다.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앤디가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이 원하는 게 있습니까?”

“자신의 미래에 대한 답을 원하지.”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고요. 스승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가 그럭저럭 이렇게 저렇게 사는 것과 다르게, 그들은 종족 전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앤디가 궁금하다는 눈빛을 던졌다.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면 너무 길고, 쉽게 설명을 해준다고 하면 지향점이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나 할까?”

“지향점이요?”

앤디의 질문에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그래, 지향점. 우리는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고민이라는 것을 하지 않느냐. 자식을 낳고 다음에는 뭐를 먹고 돈을 번 걸 어떻게 쓰고 뭐, 이런 잡다한 것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할 거다. 아 참, 너에게 하나 물어보자.”

“예, 말씀하세요.”

“모든 파괴의 끝이 멸망이고, 공생의 끝이 소멸이라면 너는 무엇을 택하겠느냐?”

“그것참 애매한 질문이네요.”

“그렇지? 사실은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다. 그냥 가슴에 담아두거라.”

“알겠습니다. 여하튼 대충 답이 나오네요.”

“어떤 답 말이냐?”

“거래에 대한 답이요. 그들에게 뭘 주고 원하는 답을 들을지 알 것 같아요.”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들의 미래에 대한 조언 같은 것이겠지요.”

“그래, 맞다.”

앤디가 한참 동안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우선 브라키우드의 위치는 찾았고, 그를 어떻게 덫으로 쓰겠다는 건가요?”

앤디가 브라키우드에게 안드레이의 말을 전했다.

“덫이 되어주십시오.”

“덫?”

브라키우드가 약간 기분이 상한 듯한 분위기를 흘리며 되물었다.

앤디는 수긍하는 투로 대답했다.

“사실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것에 대한 확답을 듣기 위해 온 것입니다. 공동 전선을 구축하자는 말입니다. 미끼는 제가 되겠습니다.”

“큭큭큭!”

“마왕의 위치는 찾았습니다. 바로 콘 왕국입니다. 지금까지는 판단이었지만, 이제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확신을 이제 하게 되었다고? 뭔가 이유가 있겠군.”

앤디가 웃으며 말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브라키우드 님께서 지금 이곳 콘 왕국에 계시는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니셨습니까?”

“….”

“그놈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맛있어 보이는 미끼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브라키우드가 처음으로 드러내놓고 미소를 지었다.

3

베르커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밀턴이라는 그가 대체 누구냐?”

그 질문에 탈리온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콘 왕국의 장로를 직접 임명한 그가 모른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밀턴 장로를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

“모른다.”

“정말 모르신단 말입니까?”

“모른다. 확실하게 모른다.”

베르커스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탈리온은 한 번 더 물어볼 법도 했지만,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베르커스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더 이상의 질문은 시간 낭비에 입만 아플 뿐이다. 그 질문을 던질 시간에 오히려 어째서 이런 상황이 왔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이득이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셀린만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탈리온이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그는 콘 왕국의 장로입니다.”

“언제부터?”

“제 기억으로는 아주 오래전부터입니다.”

베르커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설마 내 기억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겠지?”

탈리온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땅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의 기억력을 제가 의심할 리 있겠습니까?”

“큭큭! 그걸 알고 있다면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겠군.”

“제 …기억입니까?”

인정하기 힘든 말이었다.

자신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니.

그 말을 듣고 바로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베르커스가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라. 그의 모습이 언제부터 네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탈리온은 인상을 구기면서까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억이 흐릿하다. 다른 부분은 선명한데 밀턴에 대한 부분을 떠올리려고만 하면 안개가 낀 것처럼 막막하다. 기억이 오락가락하며 혼선이 온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럴까. 정말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베르커스가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탈리온이 주먹을 꽉 쥐고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큭큭큭큭큭!”

안테르트가 한숨을 토했다.

“지금쯤이라면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졌겠군.”

셀린이 물었다.

“재밌는 일이요?”

“그래, 아주 재밌는 일이지.”

“무슨 일인데요?”

“세상에 악마가 하나 탄생했을 것이다.”

“악마요? 무슨 말이죠?”

탈리온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두 스승님들의 추측이지,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안테르트가 대답했다.

“확인이 되었든 안 되었든 확실해. 시간이 말해주고 있는 거다. 이 정도 시간 동안 가만히 놔뒀다면 녀석은 이미 자신의 주인을 찾기 위해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숙주를 찾아서 발현하고도 남았겠지.”

“하지만….”

베르커스가 못을 박았다.

“우리보다 그 마물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탈리온이 항변하듯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악마가 탄생했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안테르트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게 무서운 거다.”

“똑똑한 녀석일수록 어금니를 감출 줄 알고, 사나운 매일수록 발톱을 감추지.”

탈리온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둘은 악마가 태어나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슬슬 탈리온도 불안했다.

왠지 둘의 말이 사실로 들리기 시작한 탓이다.

무엇보다 저 말이 무서웠다.

사나운 매가 발톱을 감춘다는….

정말 그러하다면 자신의 잘못이다.

모두 자신의 불찰로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두 스승을 다른 차원에 가둔 것도, 콘 왕국을 버린 후 사제에게 떠넘기듯 마령환을 넘긴 것도 다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자신이 미래의 짐을 받아들기 싫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다고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조금 더 고심은 해보겠지만, 어떻게든 마령환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마령환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승을 가두거나 사제에게 떠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령환을 봉인할 다른 후보자를 찾았겠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 문득 의문이 하나 들었다.

‘혹시 안드레이는 이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싹!

갑자기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의 갑작스러운 설득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과연 두 스승을 다시 세상 밖으로 빼낼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위협할, 목숨을 노릴 것이 분명한 사상 최강의 적을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안드레이의 말 하나, 행동 하나 모두 의심스럽다.

그들이 오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설마 마령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닐까?

단약이라는 말과 마왕에 관한 이야기도 의심스럽다.

왠지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하는 이야기에 상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안드레이에게 ‘단약을 의뢰했던 곳이 콘 왕국이었었고, 자신의 연구 자료를 빼간 곳도 콘 왕국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던가.

정말로 콘 왕국과 단약이 관련되어 있다면,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그 단약 제조에 관한 일을 추진한 것이리라.

시간상 연구 자료를 훔친 것은 확실하게 아니지만, 의뢰를 한 것은 바로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확실할 것이다.

콘 왕국에서, 아니 현 대륙을 통틀어서 그런 독특한 지식을 가진 존재는 저 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무엇보다 안드레이는 자신이 콘 왕국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정확하게 어떤 존재였는지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어떤 추론을 할 정도는 지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떠올려 보니, 당시 앤디와 안드레이와 자신이 단약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자신을 보던 안드레이의 눈빛이 의미심장했었던 것 같았다.

‘….’

의심이 구르고 굴러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억지로 이야기가 짜 맞춰진 탓인지 뭔가 정리가 안 된다.

생각하려 할수록 기억이 배배 꼬인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안드레이가 이 자리에 와서 모두 해명을 해줘야만 할 것 같았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탈리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뜬금없이 밀턴에 대한 생각이 났다.

밀턴이 언제 나타났는지 기억이 나는 것 같았다.

뭔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엉켜진 실타래의 시작점을 찾은 기분이다.

그러던 중에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이야기가 고막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밀턴이라는 존재는 대체 누구지? 이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마령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확실해.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존재인가?”

“아마도 그렇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마령환의 존재를 알 수 없을 테니.”

“혹시 마령환에 홀려서 종을 자처하는 것은 아닐까?”

안테르트의 질문에 베르커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희박해. 내 생각으로는 뭔가 알고 있는 놈이 확실해.”

“하지만 그것도 가설에 불과하니 직접 봐야 알 텐데.”

안테르트의 말에 베르커스가 셀린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아이라면 놈이 어떤 녀석인지 알 수 있겠지?”

“그렇겠지. 본질을 뚫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아이니까….”

셀린은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안테르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녀석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못해도 우리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겠지.”

“우리보다 더 강할 수도 있고?”

“가능성이야 있지.”

“….”

“….”

베르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둘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씨익 웃는다.

“큭큭! 그거 생각만 해도 재밌겠군. 그렇지 않아도 너랑 싸우는 게 지겨웠는데 말이야.”

“나와 같은 생각을 했군.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해지는데?”

“킥킥킥킥!”

“큭큭큭큭!”

둘의 대화를 들으며 탈리온과 셀린은 어이가 없었다.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지금까지 했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상황이 아닌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지금까지 설파를 해놓고는 몸이 근질거린다며 좋아하는 모습이라니.

무엇보다 탈리온은 저들의 말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뭐가?”

안테르트가 의뭉스럽게 말했다.

“스승님들처럼 강하거나 더 강한 존재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말에 안테르트와 베르커스가 히죽거렸다.

“너는 우리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지?”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온 것도 알고 있고.”

‘다른 세상?’

이야기를 듣고 놀라는 셀린을 뒤로하고 탈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최강자가 아니었다. 우리만큼 되는 놈들이나, 혹은 더 강한 녀석도 적지 않았지.”

“말도 안 됩니다. 아니, 그렇다 쳐도 이곳은 그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 환생해서 들어오는 녀석들도 있는데 놀랄 것까지야.”

“환생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응? 우리가 이야기한 적이 없나? 모르면 그냥 넘어가자. 설명하기도 귀찮고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탈리온은 궁금했지만, 안테르트의 말대로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스승님들과 비견되는 능력자라니. 너무 그자를 과대평가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안테르트가 미소를 지우고 대답했다.

“우리는 지금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다.”

“별로 냉정하게 보이지 않으십니다만.”

“그건 네 녀석의 눈알에 문제가 있는 거지.”

베르커스가 탈리온에게 질문했다.

“네가 현경에 올라선 것이 언제냐?”

“꽤 오래되었습니다.”

“콘 왕국을 떠나기 전이냐 후냐?”

“후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자. 현경을 올려다보고 있는 화경의 고수가 있다. 지금의 너는 그 고수가 전혀 알 수 없게 앞니를 뽑아낼 수 있겠느냐?”

그 말에 탈리온이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말이 되는 예를 드십시오. 앞니가 빠지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물며 화경의 고수라면 더욱이 말입니다.”

“난 가능하다.”

“….”

탈리온은 결국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마 저 녀석도 가능할 거다. 예를 앞니로 들어서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화경급 고수의 정신력은 이미 보통 사람의 정신력을 넘어선 상태다. 굳건한 성벽과 같은 정신력은 최면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 걸릴 수가 없지. 한마디로 네 녀석의 정신의 벽을 뚫고 기억을 조작했다는 말은 화경 고수 모르게 뽑는 앞니보다 더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직접 최면에 걸리겠다고 작정하지 않으면 모를까 말이다.”

처음에는 무슨 개뿔 같은 소리냐고 생각했지만, 듣고 보니 왠지 이해가 가는 설명이지 않은가.

탈리온의 등줄기가 다시 한 번 식은땀으로 물들었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탓이다.

자신의 기억이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조작되었는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런 탈리온을 보고 베르커스가 말했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예? 무엇을 말입니까?”

“네 기억이 모두 조작된 것은 아닐 테니까. 아마도 겨우 녀석의 존재감만 끼워 넣었을 거다. 그러니 다른 기억은 멀쩡하다는 말이다.”

“아….”

그 말에 약간은 안심이 되는 탈리온이었다.

그리고 의아한 시선으로 베르커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자신을 위로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탈리온이 한참을 고심하다 이윽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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