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3화 (66/68)

제4장. 태고의 숲 엘드리안

1

잠시 멈추는 듯하던 비가 다시 폭우로 쏟아졌다.

쏴아아아아아!

그 폭우 속에서 앤디를 중심으로 검을 든 신관들이 원을 그리며 포위하고 있었다.

앤디에게 당해 쓰러진 신관들은 다른 신관들의 손에 이끌려 뒤로 물려진 상태였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외쳤다.

“저 사악한 마귀를 잡으시오!”

그 말에 모든 신관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정말로 앤디를 사악한 마귀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얏! 이 사악한 마귀 녀석! 죽어라!”

갑자기 달려드는 신관의 공격에 앤디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대련인가?

앤디는 조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그 신관의 뒤를 점해 수도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퍽!

“캑!”

모두 경악하는 표정으로 앤디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앤디가 공격하는 신관의 뒤로 순간 이동을 하듯 나타나서 한 번의 손놀림으로 쓰러트렸기 때문이다.

“뭐, 뭐지?”

“저자, 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인간이 저런 움직임을!”

“정말 악마인가! 단순히 악마의 사주를 받은 존재가 아니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이들 신관의 실력은 정말이지 약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통할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검술은 정말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높게 쳐줘봐야 일개 영지의 병사들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라고 봐야 하나?

그것을 시작으로 앤디는 이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자 마음먹었다.

저들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의 매뿐이라면 사랑을 듬뿍 담아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앤디가 무형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순간 앤디의 몸이 2개가 되고 4개가 되더니, 곧 30개가 넘어갔다.

갑자기 불어난 앤디의 몸을 보고 신관들이 패닉에 빠졌다.

앤디가 막 공격을 하려던 찰나,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성가.

다른 신관들이 성가를 부름으로써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편에게 기운과 용기를 올려 주고, 사악한 존재의 정신력과 기운을 빼앗는 노래인 것이다.

모두 눈을 말짱하게 뜨고 앤디를 보았다.

정신력이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기운이 솟아나자 그들을 이끌던 신관이 호기롭게 외쳤다.

“저 분열된 악마를 하나씩 맡아서 처리하면 된다! 괜히 불어난 수에 놀아나지 마라!”

“우오오오!”

“신의 이름으로 철퇴를 가하라!”

“악마를 지옥으로!”

모두 각자 각각의 앤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문제는 앤디가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데 있었다.

저들의 노래가 앤디에게도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보다 좋아진 컨디션.

머리가 맑아지고 기운이 솟아났다. 마치 몸에 좋은 보약이라도 먹은 기분이었다.

‘살다 보니 별꼴을 다 경험하는군.’

앤디는 주는 것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 자체가 코미디였다.

앤디는 조금 전까지 가슴에 치밀어 오르던 화도 잊고 한숨을 토했다.

이들과 놀다 보니 자신도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든 탓이다.

잠시 자신에게 이유 모를 힘이 들어오는 뜻밖의 상황에 놀라 멈췄던 앤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형보에 지둔보를 섞었다.

그러자 수십 명의 앤디가 사라지고, 자신을 향해 공격하는 수십 명의 신관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앗!”

“이럴 수가!”

신관들이 경악성을 터트리기 무섭게 수십 명의 앤디가 신관들의 빈틈을 가격했다.

퍼벅!

수십 명의 비명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으로 그들이 쓰러지는 소리도 들렸다.

그와 동시에 수십 명으로 늘어나 있던 앤디가 모두 사라지고 한가운데 하나만 남게 되었다.

철저하게 전투 신관만 쓰러뜨렸다.

뒤에서 성가를 부르던 비전투 신관들은 다급하게 쓰러진 신관들을 향해 달려갔다.

걱정과 다르게 누구 하나 다친 이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최대한 배려를 하며 전투에 임한 것이다.

죄 없는 신관들까지 주먹다짐으로 패거나 죽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살인마, 혹은 저들이 말하던 악마가 아니다.

이 정도로 충분했다.

앤디가 고개를 돌려 미케로이스 대신관을 노려보았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곧 자신이 한 추태를 깨닫고 멈춰 서긴 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왔다.

참는다고 참고는 있지만 앤디의 눈에 뻔히 보였다.

앤디는 천천히 계속해서 걸어왔고, 어느덧 신전의 처마 밑에 자리하고 있던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바로 코앞까지 왔다.

앤디가 말문을 열었다.

“이보시오.”

휘청!

그 말에 놀란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다리가 풀렸다.

“아, 악마!”

앤디의 짜증이 폭발했다.

“누가 악마란 말이냐! 두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라!”

“히익! 아, 악마가 나를 죽이려 든다! 나를 죽이려 든다!”

“이런 미친 늙은이를 봤나!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두 악마냐!”

“모두 이 악마를 처단하라!”

그러나 신관들은 아무도 다가오지 못했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다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앤디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얼굴을 노려보며 손으로 그의 턱을 잡고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대신관은 아프다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네 녀석은 너만 아픈 것밖에 모르는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에서 신관들이 시끄럽게 쫑알거렸다.

“감히 신의 대리인에게 네 녀석이라니! 불경하다!”

“물러가라! 악마!”

“사탄아, 꺼져라!”

앤디가 피식 웃었다.

“어이, 대신관, 네가 신의 대리인이라고?”

“그, 그렇다, 악마.”

앤디가 인상을 구겼다.

“한 번만 더 악마라고 하면 정말 악마가 되어주지. 악마든 살인귀든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말이야.”

꼴깍!

뭐라고 이야기를 하려던 대신관의 입이 이내 다물어졌다.

꼴을 보아하니 악마 어쩌고 하려던 모양이다.

앤디의 으름장이 먹힌 것일까. 미케로이스 대신관만이 아니라 신관들도 입을 다물었다.

앤디가 하는 말의 뜻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악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능력이라면 자신들을 모두 처리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모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 믿어지지 않는 움직임을, 능력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굳이 그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앤디가 주위의 흐름을 살피다 말문을 열었다.

“나는 순수한 의도로 왔었다. 아이가 다쳤고, 치료가 필요해서 여기를 찾았다. 너희는 그냥 이 아이를 치료했으면 되었다. 그러면 나는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내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도둑이라고 했고, 악마라고 했다. 이곳이 정말 신을 섬기는 곳이 맞는가? 대체 어떤 성서에서 어떤 신이 돈의 양으로 신도와 악마로 구분 지으라고 했단 말인가?”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아주 양심이 없는 놈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줄줄줄!

옷에 스며든 빗물이 자꾸 질척이며 움직임을 방해한다.

앤디는 신경이 쓰여 몸에 기운을 돌렸다.

팡!

순간, 앤디의 몸을 흠뻑 적시고 있던 빗물이 기운에 증발돼서 허공에 터져 나갔다.

뽀송뽀송해진 앤디의 모습에 모두가 대경실색했다.

“헙!”

미케로이스 대신관과 다른 신관들, 그리고 그들의 뒤에 보조를 하고 있던 사제들이 놀란 눈으로 앤디를 보았다.

앤디는 그들의 시선에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너희는 신을 섬기는 것이냐, 아니면 돈을 섬기는 것이냐?”

모두 입을 다문 데 반해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할 말이 남은 모양인지 크게 소리쳤다.

“이 무례한 녀석! 감히 신을 모독하다니!”

“신은 너희가 모독하고 있다! 신을 돈만 밝히는 수전노로 만든 것은 바로 너희이다! 세상에 나가서 물어봐라. 사람들이 내리는 너희에 대한 평가가 어떤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웃기지 마라!”

“치료를 하는 알량한 재주 하나 가진 것 말고 너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현실을 봐라! 돈이 있는 자들은 너희를 주치의로 부리고 있고, 돈이 없는 자들은 치료를 위해 모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다. 정말 모른단 말이냐!”

“신이시여! 이자의 몸에 깃든 악마를 물리쳐 주시옵소서!”

“옘병 떨고 있네.”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원색적인 욕을 들은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 더러운 녀석! 저주받을 놈!”

이제는 대신관이 저주까지 퍼붓는다.

“씨발!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구나. 안 되겠다. 그냥 가려고 했는데, 너는 조금 맞아야겠다.”

앤디가 주먹을 까드득 소리 나게 움켜쥐었다.

2

“뭐, 뭣이라!”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당혹스러운 듯 말을 버벅였다.

앤디가 태연하게 말했다.

“네 녀석은 도저히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그래, 나이도 있고 하니 딱 백 대만 맞자.”

“…!”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앤디의 주먹은 거침이 없었다.

슈웃!

퍽!

“커헉!”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머리가 뒤로 엄청난 속도로 젖혀졌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상태는 처음과 달랐다.

양쪽 콧구멍에서 쌍코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관이라고 해서, 자칭 신의 대리인이라고 해서 뭔가 다를 줄 알았더니 똑같군. 난 하도 돈을 받아 처먹어서 금색 피라도 나오나 했는데.”

“이노오오옴!”

퍼억!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눈앞이 컴컴해지는 고통을 경험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지금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알아채고 앤디가 설명해주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눈치네. 왜 아프겠냐? 맞았으니까 아프지. 왜 바닥에 있겠냐? 맞았으니까 쓰러졌지.”

상당히 원색적인 설명이었지만,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곧이어 앤디가 발을 들어 내려쳤다

퍼억!

“꾸엑!”

가슴을 걷어차인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을 기었다.

고통이라니.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것은 더욱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예를 보이며 존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자는 달랐다.

거침없이 욕을 하기도 했고, 패겠다고 선포하기도 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패기까지 했다.

무섭다.

처음으로 겪는 원초적인 두려움이자 고통이었다.

주먹이 이렇게 아픈 것인지 몰랐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것은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다가 손가락을 벤 것과 나뭇결에 가시가 찔려 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다 늙어서 누군가에게 쳐 맞고 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지독한 악몽.

신을 찾았다.

언제나 찾았던 신이고 불렀던 이름이지만, 오늘처럼 절실하게 신을 부르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저 악귀 같은 녀석만이 자신에게 말을 걸 뿐이었다.

“왜 이렇게 엄살이 심해. 이제 딱 세 대 맞았어. 앞으로 아흔일곱 대가 더 남았다고.”

“히이이이익!”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입에서 침을 흘리며 다급하게 바닥을 기었다.

무서웠다.

너무나 무서웠다.

텁!

그때, 뒷덜미가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어딜 도망가시나.”

“사, 살려 주게. 살려 줘!”

“대신관님을 놓아라!”

“제발 대신관님을 살려 주세요.”

앤디가 신관들을 향해 빽 소리쳤다.

“허! 누가 죽인다고 했어? 정신 차리게 해준다고 했지.”

“저, 정신은 차렸네.”

앤디의 말을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받았다.

앤디는 뻔뻔하게 말을 받는 미케로이스 대신관을 향해 이죽거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정신 차렸다고 한 녀석 중에 제대로 정신 차렸던 녀석 한 명을 못 본 사람이야. 그러니 우선 다 맞고 보자고.”

“내게 무얼 바라는가. 내게 무얼 원하는가. 흑흑흑!”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울기 시작했다.

추할 정도로 대성통곡을 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그것을 보며 앤디는 입안이 꺼끌꺼끌해졌다.

“쯧!”

아무리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나 나이가 지긋한 노인을 패는 것은 생각처럼 유쾌하지 않았다.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자신이 더 많긴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고.

앤디가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당신.”

“히익!”

“당신, 왜 그렇게 살아? 당신이 뭐라도 되는 위대한 존재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보라고. 똑같이 아프잖아. 똑같이 고통스럽잖아. 똑같이 피도 흘리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뭐가 다르지? 뭐가 달라서 그렇게 떵떵거리고 뻗대는 거지?”

“….”

“당신이 지금까지 받고 있던 존경. 그것이 당신이 잘해서 받은 거라고 생각해? 착각하지 마. 사람들이 당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섬기는 신을 향해 숙이는 것이라고. 설마 스스로를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쿠궁!

어째서일까.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자신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나 가장 마지막에 한 말은 정말이지…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더럽군, 더러워. 뭐가 이렇게 더러운 거지. 퉤!”

앤디는 잡고 있던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멱살을 놨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내가 신에 대해서 뭘 알아서 떠드는 것도, 신을 절실하게 믿어서 떠드는 것도 아니야. 신에 대한 것이라면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다만, 이건 아니잖아. 이렇게 작은 아이가 고통에 울고 있는데, 돈이 없다고 쫓아내다니. 그건 아니잖아. 신을 믿는 것들은 모두 당신들 같은가? 신을 믿으면 측은함이나 불쌍하다고 하는 감정이 사라지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신을 믿지 않겠어! 환자를 치료해서 돈을 벌고 싶으면 의사를 하면 되지 왜 신을 팔아먹느냐고! 이건 아니잖아! 정말 아니잖아!”

앤디는 그렇게 한바탕 질러대고 시선을 돌렸다.

어째서일까.

솨아아아아!

빗속에 자리하고 있던 신관들이 조용히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냥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며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한 착각일까.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아직도 주저앉은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앤디는 태연하게 바닥에 누워 있는 루스를 가볍게 들어 안았다.

“후… 미안하게 됐수다. 장사하는 곳에 와서 설쳐 대서.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깽판 칠 생각까지는 없었소. 잘들 살아보시구려.”

바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앤디를 붙잡았다.

“잠깐!”

미케로이스 대신관이었다.

앤디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뭐요?”

조금 전까지 엉망으로 울던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를 막아주던 지붕 아래에서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는 앤디를 향해 걸어왔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앤디를 한참 마주하더니, 루스를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 상처에 대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전신에서 온화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포개어진 손에 모여들며 루스에게 스며들었다.

따스한 마나의 흐름.

치유 마법이다!

화아아앗!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 지나고 빛이 모두 사라졌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앤디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미케로이스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등을 돌려 돌아갔다.

모두가 미케로이스 대신관을 따라갔다.

미케로이스 대신관이 앤디에게 맞은 충격이 심한 듯 가다가 중간중간 휘청거렸지만,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계속 걸어갔다.

앤디는 애매한 표정으로 저편으로 사라지는 미케로이스 대신관의 등을 바라보았다.

앤디는 루스를 안고 여관에 들어섰다.

여관 주인과 부인이 함께 뛰어나와 자신들의 아들인 루스를 받아들었다.

부인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루스야! 아이고, 이놈아.”

여관 주인은 앤디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앤디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관 주인이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연신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앤디는 괜찮다는 손동작을 보였다.

“고생했소.”

앤디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쉬였다.

일꾼들은 모두 없었고 레쉬만 혼자 빈자리에 앉아 있었다.

“녀석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경비대를 불러서 압송시켰소.”

“수고가 많았군요.”

“수고는 당신이 더 많이 했다고 생각하오.”

앤디도 생각했다. 자신이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런 앤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쉬는 맥주를 건넸다.

“한잔 들겠소?”

앤디는 나무 잔을 받아들고는 가볍게 위로 들어올렸다가 마셨다.

잘 마시겠다는 뜻이다.

레쉬가 앤디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누구기에 그렇게 고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

“저에게 관심이 있으십니까?”

“그렇소.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상단에 들어와 준다면 정말이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오.”

“미안하지만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뭐,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소. 하지만 인연은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 생각 이상으로 심지가 깊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 여관 주인과 루스가 그들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막아준 것도 이자가 아니었던가.

요즘 자신 외에 타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자들이 대부분인 데 반해, 이자는 정의감을 보인 호인이었다.

관심이 갔다.

“이름이 뭡니까?”

“레일 상단에서 표행을 맡고 있는 제일 표두 레쉬라고 하오. 당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겠소?”

“앤디라고 합니다.”

“앤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레쉬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앤디는 그런 레쉬를 보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흔한 이름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겠죠.”

“뭐, 그도 그렇겠지만, 이런 강한 힘을 가진 앤디라는 사람은 흔치 않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앤디 드 카르미온 님?”

레쉬가 웃으며 말하자 앤디가 어색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했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레쉬가 웃으며 존대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알려진 외모와 여러 정황도 모자라 분명한 이름까지. 이 정도 상황에서도 눈치를 채지 못한다면 상인이라는 직업을 때려치워야죠.”

“굳이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굳이 파헤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미 왕족이 되신 분께서 홀몸으로 먼 타국에 어쩐 일로 나오신 것입니까?”

“하하! 여행이라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물론 믿지 않지요. 하지만 믿어드리겠습니다.”

“어째서 믿어주신다는 겁니까?”

레쉬가 센스 있는 답변을 내뱉었다.

“앤디 님께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고나 할까요?”

그 말에 앤디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약간 암울했던 기분이 싹 가셨다.

“이거 오늘 좋은 친구를 알게 된 것 같군요.”

“친구라니 영광입니다. 그러고 보니 맥주잔이 비신 것 같은데,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비도 오고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그러죠.”

앤디와 레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3

“아이구, 더 묵으셨다 가시지 그러십니까?”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비도 그쳤으니 이만 가봐야지요.”

여관 주인의 말에 앤디가 대답했다.

그러자 루스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저랑 좀 더 놀아요. 제가 더 놀아드릴게요.”

앤디가 웃으며 루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나중에 또 놀자. 내가 일을 마치고 언제고 한번 꼭 들를 테니.”

루스가 섭섭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는 품에서 돈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건넸다.

“아이구, 아닙니다.”

“받으세요.”

“이 돈을 받으면 제가 나쁜 놈이지요.”

여관 주인은 극구 사양했다.

그때, 루스가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돈을 기어코 내시겠다면 저는 형을 따라가겠어요. 아버지, 그래도 되죠?”

“네가 그렇다면 아비는 말리지 않으마. 저분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많이 배우고 오거라.”

“알겠어요. 보세요. 아버지도 허락을 하셨어요.”

생각보다 무서운 협박이었다.

앤디는 진땀을 흘리며 돈을 다시 챙겨 넣어야만 했다.

그때, 여주인이 들어오며 말했다.

“손님, 안장 다 쟁여 놨어요.”

“감사합니다, 부인.”

여주인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앤디가 말을 타고 떠나자 루스가 소리쳤다.

“다음에 꼭 또 오세요!”

“그러마!”

여행길에 오른 지 20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15일 정도면 도착할 것이라고 계산했었는데 말이다.

이제 태고의 숲에 들어선 것일까? 조금씩 수풀이 무성해지고 나무가 울창해지기 시작했다.

이히힝!

앤디는 말의 앞다리를 두드려 주며 고구마를 건네주었다.

녀석이 맛있게 고구마를 받아먹었다.

“맛있냐?”

이힝!

맛있단다.

이제는 풀은 안 뜯어먹고 앤디가 주는 고구마만 받아먹는다.

확실한 사실인데, 녀석은 정말 앤디의 말을 알아들었다.

원래 말은 중간중간 텔레포트를 이용할 때 팔고 목적지에서 사고 이런 식으로 교체를 하려고 했었다.

말을 사고팔며 생기는 중간 비용보다 말 한 마리를 텔레포트시키는 비용이 더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이 다니다 보니 정이 들어서 무리를 하여 함께 텔레포트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다각다각.

앤디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이제는 지치는군. 얼마나 가야 하는 거야?”

태고의 숲은 정말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도착했지만 도착이 아니었다.

어디 어느 위치에 가야 그들을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몇 날 며칠을 헤매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태고의 숲에는 정말 위험한 생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앤디가 아니었다면 이곳에 들어올 엄두조차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웬만한 몬스터는 찜 쪄 먹을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어느덧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쯤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방에서 들리는 몬스터 울음소리에 앤디는 말을 땅에 놔두기 애매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말을 들고 점프했다.

이힝? 푸르륵!

말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투레질을 했다.

나무가 울창해 사방에 잎사귀와 가지로 단단히 얽혀 있었기에 말의 무게를 충분히 견뎌 냈다.

앤디는 그 말 옆에 누웠다.

“오늘은 이 위에서 자자. 좋지?”

이히히힝!

좋단다.

앤디도 좋았다.

등을 푹신한 나뭇잎 구름에 대고 누워 하늘의 달과 그 주위를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게 너무나 좋았다.

무엇보다 눈앞에서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

정말이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아름다움이었다.

앤디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맑은 공기를 만끽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흘이 지났다.

푸힝! 푸히힝!

말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노래까지 부르며 걸었다. 앤디는 그 위에 누운 듯이 탄 채 하품을 했다.

벌써 앤디의 손에 잡힌 몬스터만 60마리가 넘었다. 하나같이 중, 대형급 몬스터다.

“심심하진 않아서 좋은데, 여긴 조금 심각하게 위험하군.”

이곳은 완벽한 원시림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종류의 것들이 많았다.

그것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몬스터든 말이다.

알고 있는 것은 무서운 것이 아니다. 모르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경계를 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라는 것은 불현듯 어디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앤디의 신경을 자극하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존재를 잡아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앤디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낀 것은 분명 움직임이다.

그것도 인간에 가까운 존재의 움직임. 거의 경공을 극상으로 놓고 움직이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

앤디는 저 기척을 완벽하게 잡아내는 방법이 하나 떠올랐다.

바로 조화심경.

앤디는 조용히 조화심경을 운용했다.

지금까지 숲에 자리하고 있던 앤디가 인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앤디뿐만이 아니라 말도 함께 사라졌다.

앤디는 이미 조화심경의 자연이 되는 세 번째 단계는 예전에 넘어섰고, 자연을 자기 수족으로 부리는 네 번째 단계도 넘어서 이제는 자연이 자신이 되는 다섯 번째 단계에 들어서 있었다.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 번째의 자신이 자연이 되는 것과 다섯 번째의 자연이 자신이 되는 것은 엄청난 간극이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앤디가 자연과 동화되어 그냥 자연이 되는 것을 뜻했지만, 다섯 번째 단계는 그 자체가 자연이 되어 서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조화심경이라는 것이 설명으로 모든 것을 알려 주기에는 애매하지만,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러하다는 것이다.

숲이 앤디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앤디는 웃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존재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황하는 것도 보였다.

주시하고 있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것일까?

‘처음부터 사용했어야 했는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고 했던가.

좋은 도구를 백날 가지고 있으면 뭐하는가. 써먹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한 것을.

그때, ‘고구마가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앤디의 뇌리 속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말의 생각이었다.

앤디는 조화심경으로 동식물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앤디는 다시 정보를 모아 그 존재들을 찾았다.

그들이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한둘이 아니다.

마흔셋이나 되었다.

앤디가 조화심경을 풀었다.

그러자 순간 사라졌던 처음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놀란 그들이 다시 몸을 숨겼지만, 이미 앤디는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숨어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움직임은 앤디 자신이 쉽게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숲에서 보이는 그들의 움직임만큼은 앤디가 함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괜히 숲의 종족이라고 불리겠는가.

앤디가 외쳤다.

“엘드리안에 가고 싶습니다!”

앤디의 시선이 정확하게 어느 지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곳에서 반응이 나타나더니 결국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은잠이 들켰다.

더 이상 숨어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앤디가 그의 그림자를 확인하고는 달가운 표정을 지었다.

“반갑습니다. 앤디라고 합니다.”

“가라. 이곳은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꼭 엘드리안에 가야 합니다.”

“더 이상의 경고는 없다.”

“그럼 그냥 죽이시죠. 여길 어떻게 왔는데.”

앤디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우습게도 말이 그 옆에 따라서 다리 4개를 하늘로 향한 채 벌러덩 드러누웠다. 앤디의 행동이 재밌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들의 모습에 그림자만 보이는 존재가 동요를 한 것일까.

사사삭!

숲이 크게 움직이며 그가 빛 속으로 나타났다.

잘생겼다고 해야 하나,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아니, 정확히는 이질적인 외모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생긴 것도, 아름다운 것도 맞다.

하지만 인간의 이목구비라고 하기엔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다.

왤까? 눈, 코, 입, 귀가 다 있는데.

단순히 뾰족한 귀 때문은 아니다.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선 찾았던 그들과 조우한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 존재가 한숨을 흘리듯 말했다.

“우리는 그대를 죽일 수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돌아가 줄 수 없겠는가? 우리는 이대로 평화롭게 살고 싶다.”

“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앤디를 피해서 숨어들었다면, 앤디는 절대로 그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이 자신을 찾아서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언제나 문제를 만든다. 그 문제는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풀어야 하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다. 인간이여, 이번에는 무슨 문제를 가지고 왔는가?”

…저들은 스스로의 존재 여부를 밝혀내지 않으면 사라지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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