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1화 (64/68)

제2장. 태고의 숲으로

1

앤디는 부모님과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눈 후, 아버지와 둘이 마주 앉아 잔을 기울였다.

아버지 벤존스는 자신의 잔을 비우고 물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보시면 아시잖아요.”

“건강해 보이긴 하는구나. 하지만 병은 겉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곪는 거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걱정이 너무 많으세요. 아들이 그래도 명색이 헤르만 왕국의 최고수인데 말이죠.”

그때, 어머니 클레오가 안주를 직접 들고 오며 말했다.

“그 고수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자식이 잘나면 부모의 어깨가 으쓱여지지만, 언제나 자식이기에 부모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단다.”

가슴이 뭉클해진 앤디가 클레오를 올려다보았다.

클레오가 미소를 지으며 앤디를 바라보고는 벤존스 옆에 살포시 기대듯 상체를 숙였다.

벤존스는 클레오의 허리에 팔을 감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앤디는 둘의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벤존스가 물었다.

“공주는 어떠냐?”

“항상 같아요. 착하고 예쁘죠. 그리고 건강도 하구요.”

클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챙겨 주어라. 연애를 할 때와 같아 보이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변하는 게 없어 보여도 심적으로 큰 변화를 요하는 일이란다. 항상 같아 보여도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지. 철없는 남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밖을 배회하지만 말이다.”

벤존스가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앤디가 웃었다.

“저도 사실 할 말이 없네요. 신혼여행 중에 자리를 비우지 않나,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떨어지고.”

“그렇다고 너무 부담은 갖지 말거라. 여자는 작은 것에 감동하는 법이란다.”

“네 어머니는 얼마 전 내가 선물한 작은 반지에 감동했지. 킥킥!”

“이이는.”

클레오는 약간 어색한 손동작으로 자신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것이 반지를 자랑하는 것임을 파악한 앤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도 여자구나 싶었다.

앤디는 마침 떠올랐다는 듯이 둘에게 물었다.

“두 분은 어쩌다가 만나게 되셨어요?”

클레오와 벤존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시 피식 웃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웃음의 성질은 조금 달랐는데, 클레오는 정말 다시 생각해도 유쾌하다는 듯한 웃음이었고, 벤존스는 약간 부끄러워하는 웃음이었다.

클레오가 입을 열며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벤존스는 간혹 부족한 상황 묘사를 설명하거나 불리한 부분을 무마하며 보조적인 역할을 했다.

앤디는 즐거움에 흠뻑 빠지며 모처럼 가족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 저 멀리 어둠 어디선가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청 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근래에 들어 처음으로 근심과 걱정을 지우고, 그 어떤 때보다 편안하고 행복한 밤을 보내는 앤디였다.

앤디는 이틀 정도의 시간을 영지에서 보내고 혼자 영지를 벗어났다.

이히힝! 푸륵!

뚜거덕뚜거덕!

“….”

앤디를 태운 말이 투레질을 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안젤른과 파프가 따르겠다고 했지만 앤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 혼자 가는 것이 빠르게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어서 빨리 돌아가 레오나 공주와 함께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앤디는 조금 전에도 본 지도를 또다시 살폈다.

“태고의 숲이라….”

앤디가 코끝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몇 번이고 확인한 지도였지만, 걸으면서 할 일이 없다 보니 자꾸 보게 되었다.

태고의 숲은 베리오스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라훔 왕국과 무토 연합국의 국경, 그리고 쿠렌트 제국 사이에서 광범위한 넓이를 차지하고 있는 숲이다.

그 중심에 생명의 나무가 있는데, 고대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가 그곳에 자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포른트 영지에서 태고의 숲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243킬로미터 정도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막막하기 그지없는 거리다.

다른 왕국의 국경을 총 네 번 넘어야 하고, 걸어서 간다면 노숙을 신경 쓰지 않고 하루 70킬로미터로 잡고 이동했을 경우 대략 47일 정도가 소요된다. 여러 돌발 상황을 접한다면 55일 정도 걸린다는 소리다.

이것은 앤디의 경우고, 일반 사람들의 경우는 하루 40킬로미터를 평균으로 잡고 계산해야 하니 돌발적인 상황을 포함했을 시 석 달도 더 걸린다.

문제는 지금 계산이 단순한 직선거리라는 것이다. 제대로 난 길을 따라 이동한다면 3,243킬로미터는 4,000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다.

갔다가 오는 데만 반년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마왕이 짠! 하고 나타나서 세상을 지배하고도 남을 시간이군.”

짧은 계산 끝에 앤디가 신세 한탄이라도 하듯 푸념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물론 그렇게 개념 없이 걸을 리가 없으니 단순한 시간 계산 놀이에 불과했지만, 아무래도 막막한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국경에서 국경까지 번화한 도시에 연결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이동이 가능하다.

돈이 좀 많이 깨지긴 하지만, 시간은 그만큼 절약할 수가 있다.

물론 단점도 많다.

가장 큰 단점은 멀미 같은 신체 이상 증상과 마법진으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없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자국 내를 벗어나는 텔레포트 마법진은 없다. 국경에 가까운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 이동한 후, 한참을 걸어 국경을 넘고 다음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반대 국경으로 가는….

참 번거로운 일이지만, 그래도 최소 절반 이상의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이라 볼 수 있었다.

앤디가 들고 있는 지도에는 어디로 어떻게 가서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라는 표시까지 꼼꼼하게 처리가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말을 사고팔며 이동해야 하는 건가? 그럼 대략 15일 정도면 태고의 숲에 갈 수 있겠군. 돈 문제도 걱정 없고. 어차피 결재를 올리면 위에서 처리해줄 테니. 우선 달려 볼까? 으럇!”

앤디가 고삐를 당기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히히힝!

마치 바람처럼 말이다.

앤디가 여행을 시작한 지 8일째 되는 날.

어디서 난 건지 고구마를 들고 쩝쩝거리며 단검으로 껍질을 깠다.

아삭! 아삭아삭!

“역시 야생 고구마가 맛있어.”

고구마도 그냥 고구마가 따로 있고, 야생 고구마가 따로 있는지 의문이 드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앤디 역시 그게 궁금했는지, 자신이 말해놓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혼자 시시덕거렸다.

사람이 키운 예의 바른 고구마와 거칠게 자란 난폭한 야생 고구마가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다 보니 잡생각이 많아진 탓이다.

앤디가 말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너도 먹어볼 테냐?”

푸륵!

먹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앤디는 익히지 않은 가늘고 긴 고구마를 가방에서 꺼내 말의 입에 넣어주었다.

말은 아그작아그작 소리를 내며 잘도 먹었다.

앤디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맛있냐?”

이힝!

말이 입맛을 쩍쩍 다시며 반응한다.

“또 달라고?”

푸륵! 푸르륵!

“크하하! 녀석. 네가 맛을 조금 아는구나. 그래, 또 주마! 어차피 지천에 널린 게 고구마다! 어라? 다 먹었군. 조금 캐고 갈까?”

앤디가 말에서 내려 고구마를 캐서는 가방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말이 다가와서 얼굴을 들이민다.

앤디가 캐던 고구마를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이 즐거운 표정으로 고구마를 씹어 먹었다.

푸힝! 푸힝!

앤디가 말 등에 올라타자 녀석은 왠지 봄바람 맞은 처녀처럼 깽깽이걸음이라도 하듯 들썩이며 걸었다.

사람의 적응력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단 8일 만에 말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가.

앤디는 혼자서 열심히 말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말은 신기하게도 앤디의 이야기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반응을 보였다.

앤디와 말은 저녁이 되기 전에 니아메라는 번화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면 되겠군.”

푸뤽! 푸루룩!

“너도 배고프고 피곤하다고? 그래, 알았다. 양질의 식사를 제공하도록 하지.”

앤디가 말의 목을 탁탁 치며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그러자 말은 좋다고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흥얼거렸고, 앤디도 따라서 흥얼거렸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흔치 않은 별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2

앤디는 한 여관에 도착해서는 말고삐를 여관에서 나온, 푸짐하게 생긴 중년 여인에게 맡기며 말했다.

“콩깍지와 여물을 잘 쒀서 신경 좀 써주세요.”

“예, 나리. 걱정 마십쇼.”

앤디는 말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손님. 뭐가 필요하십니까? 식사? 방? 목욕? 맥주?”

앤디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맥주, 식사, 방, 목욕!”

“루스야! 손님 모셔라!”

“예! 아버지!”

10살 정도 된 아이가 맥주를 들고 앤디에게 달려왔다.

앤디는 아이가 건네주는 맥주를 들고 시원하게 쭈욱 들이켰다.

“크, 좋군!”

갈증이 싹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앤디는 약간 아쉬웠다.

“조금만 더 시원했으면 좋겠는데. 쩝.”

왠지 모를 아쉬움에 맥주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앤디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스라는 아이가 말을 걸었다.

“손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심 스테이크 미디엄 레어로.”

“알겠습니다! 안심 미디엄 레어요!”

루스가 식당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앤디는 우선 나온 양송이 수프를 후루룩 들이마셨다.

그는 연이어 나온 안심 스테이크를 보고는 입맛을 돌린 후, 아스파라거스를 들어 아삭 소리가 나게 베어 물었다. 그리고 아스파라거스의 독특한 상큼한 향을 음미하며, 큼직하게 고기를 썰어서 입안에 넣을 준비를 했다.

칼을 대기가 무섭게 선홍빛 육즙이 짙게 배어나온다.

앤디는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소스를 듬뿍 묻혀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야들야들한 스테이크와 살살 녹는 이곳 특유의 소스가 입안에 가득히 퍼져 나갔다.

앤디는 이 행복한 충만감을 혼자 느끼기 아쉬운 마음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항상 사람들과 몰려다니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에는 앤디의 기분을 같이 공유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왠지 모를 안타까운 마음과 손놀림을 멈출 수 없는 감동 어린 맛에 물들어 있던 그때, 루스라는 아이가 다가와서 질문했다.

“맛은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세요?”

“우물우물! 조쿠나! 우물우물우물!”

앤디는 대답보다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느껴지는 식감과 입안에 퍼지는 육즙, 그리고 소스의 조화.

거기다가 질기지 않은 부드러운 고깃결.

씹으면 씹을수록 느낄 수 있는 담백함.

앤디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그것을 본 루스가 자부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지역에서 안심 스테이크는 우리 가게를 따라올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구요. 손님은 운이 좋으신 거예요.”

앤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도… 우물우물! 그러케… 우물! 생각… 꿀꺽! 한다. 쩝쩝!”

음식을 다 먹은 앤디는 목욕을 한 후 침실로 올라갔다.

그는 곧장 침대 위에 몸을 날렸다.

퍽!

“윽!”

생각보다 딱딱한 침대였다.

고통이 밀려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부드러운 이불을 접하자 몸이 나른한 것이 이대로 날아갈 것 같았다.

앤디는 눈을 감기가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쿠르르릉!

번쩍!

밖에서 거친 바람을 동반한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아아!

창밖에서 사람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에구머니나! 갑자기 웬 비람!”

“어머니 빨래는 제가 걷을게요. 마구간 문 좀 닫아주세요!”

“알겠다!”

“아버지는 열려 있는 창문 좀 닫아주시구요!”

“오냐!”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가 밖에 그려졌지만 앤디의 감긴 눈은 꿈쩍하지 않고 닫혀 있었다.

투두두두두두!

덜컹덜컹!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거센 바람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잠에서 깬 앤디는 한참을 하품했다.

“웬 비야?”

앤디는 창밖을 내다보며 찌뿌듯한 몸을 폈다.

우중충한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하루 이틀 만에 걷힐 모습이 아니었다.

“마을에 빨리 들어섰기에 망정이지 노숙했으면 피곤할 뻔했군.”

앤디는 운기행공을 마치고 찌뿌듯한 기분을 지운 후, 뽀송뽀송한 느낌으로 1층에 내려갔다.

비가 온 탓에 생각보다 늦잠을 잔 것일까, 아니면 피로가 중첩되어서 늦잠을 잔 것일까.

1층은 아침을 먹기 위한 사람들로 분주했다.

앤디는 마침 자리가 난 것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루스가 자신을 보고 쪼르르 달려오자 앤디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손님이 늦잠을 주무신 거죠.”

루스가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며 하는 말에 앤디는 할 말을 잃고 괜히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잡고 배배 꼬았다.

루스가 테이블을 치운 후 물었다.

“아침은 뭘 드실 건가요?”

“빵하고 고기 수프, 그리고 차 한 잔 부탁하마.”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가져다드릴게요.”

루스가 방긋 웃으며 주방으로 뛰어갔다.

정말 귀여운 아이였다.

“듬직한 아드님을 두셨군요.”

“하하!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여관 주인의 말에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루스는 음식을 들고 나왔다.

“여깄어요.”

“고맙다.”

앤디는 빵을 뜯어 고기 수프에 찍어 먹으며 비 오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왠지 처량 맞게 느껴지는 자신이었다. 괜히 우울하고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레오나 공주가 보고 싶어졌다.

그녀의 상큼한 미소를 보면서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빵과 수프를 모두 해치운 앤디는 뜨거운 차를 마시며 기분이 많이 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일터로 나가는 것이다.

텅 빈 식당.

앤디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땅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마무리했는지 루스가 다가와 앤디 앞에 마주 앉았다.

“심심해요? 할 일 없어요?”

“응.”

앤디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앤디는 환하게 웃으며 루스를 마주 보았다.

뭔가 재미난 거리 좀 달라고, 아니 좀 놀아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눈과 같았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왜? 항상 무겁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어른인가? 그런 어른도 있으면 이런 어른도 있는 거라고.”

앤디의 항변에 루스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앤디가 한마디 했다.

“너는 애늙은이 같다.”

루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그런 말 많이 들어서 좋겠다.”

“손님은 무슨 일 하시는 분이세요? 상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용병으로 보기엔… 너무 기생오라비같이 생겼고.”

“기, 기생오라비….”

앤디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잘생겼다, 멋있다라는 말은 조금 들어보았지만 기생오라비라니.

“뭐하시는 분이세요?”

“나? 네 말대로 상인은 아니고 용병도 아니다. 뭐하시는 분 같냐?”

“에효, 손님 장단에 맞춰서 놀아드리죠. 어차피 점심시간 전까지는 한가할 것 같으니까요.”

“….”

앤디는 정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아무리 자신이 그런 의사를 비쳤다고 해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한심스러운 시선이라니.

하지만 앤디는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루스가 놀아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거면 충분했다.

루스는 깊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직업을 나열하며 고민했다.

앤디는 놀리듯 모두 틀렸다고 했다.

결국 제비에서 도둑놈에 소매치기까지 나올 만한 직업군이 모두 나오고 나서야 루스가 손을 들었다.

“대체 뭐예요?”

“나? 사실은….”

짤랑!

앤디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식당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 이야기해주세요. 어서 오세요!”

루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앤디는 뒷말을 삼키며 입맛을 쩍 다시고는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손님들을 확인했다.

3

레일 상회의 레쉬는 상단주 레일의 셋째 동생이다.

레쉬는 혈연을 떠나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상단주 레일의 신임을 모두 받고 있다.

지금은 상단의 일을 마치고 본단에 복귀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태풍을 접하게 되었고, 이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어 가장 가까운 마을을 찾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기 니아마 마을이었다.

레쉬와 상단의 일꾼들은 마을에 들어서기 무섭게 여관을 찾았다.

“저기 여관이 있습니다.”

일꾼의 말에 레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저기서 몸을 쉬도록 하자. 비가 하루 이틀 만에 그칠 것 같지가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레쉬가 직접 상단의 마차와 말을 모두 마구간과 공터에 밀어 넣고 일꾼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한 잘생긴 사내와 마주 앉아 있던 아이가 튀어나와 자신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루스는 안을 한 번 훑어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레쉬가 말했다.

“지금 비를 맞고 와서 몸이 으슬으슬하니 뜨거운 물이나 차를 우선 가져다다오.”

“끓이고 있는 물이 있으니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방도 있나?”

“열세 분이십니까?”

“그렇다.”

“방은 충분합니다.”

“다행이군. 방을 좀 내다오. 비가 그칠 동안 쉴 것이다.”

“그럼 물을 가져다드리고 와서 바로 방을 치워놓겠습니다.”

루스는 신속하게 일을 하고 위층으로 다다다 뛰어 올라갔다.

짤랑짤랑!

그때 다시 여관 문이 열리고 거칠게 생긴 사내 6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레쉬가 보건대 이 동내에 사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비를 피하기 위해 이 마을로 들어선 듯싶었다.

‘용병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관 주인이 직접 나섰다.

아들 루스는 손님들 방을 정리하기 위해 위층에 올라갔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쇼!”

“맥주.”

“알겠습니다.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여관 주인은 정말 최대한 빠르게 맥주를 가져와서 그들에게 건넸다.

사내들은 잔을 받아들기 무섭게 마시기 시작했다.

“크아! 좋군.”

“나쁘지 않아.”

하지만 한 명의 반응은 다른 다섯과 달랐다.

“어이, 주인 양반, 잠깐.”

“예,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

여관 주인이 다가오자 그가 자신의 맥주잔을 가리키며 성을 냈다.

“누가 여기다가 맥주를 가져다놓으라고 했지?”

“예?”

여관 주인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맥주잔을 들더니 여관 주인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와그작!

나무로 된 맥주잔이 부서졌다.

여관 주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그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누가 여기다가 맥주를 가져다놓으라고 했냐고!”

여관 주인이 다급하게 말문을 열었다.

“도, 동료분께서 분명 맥주를 시키셔서.”

여관 주인은 맥주를 시킨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지만, 그는 자신을 왜 보느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이 시켰지 내가 시켰어? 나는 입도 열지 않았는데 왜 맥주를 가져왔냐고!”

“그, 그게 일반적으로 한 분이 시키시면….”

“일반적? 그럼 나는 일반적이지 못하다! 병신이다!”

여관 주인이 당황해서 양손을 저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오호라! 이거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이구만!”

그가 왕방울만 한 눈을 부릅뜨며 여관 주인을 노려보았다.

“바, 바가지라니요!”

“지금 이런 식으로 우리를 등쳐먹으려고 했다, 이 말이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오해십니다!”

“오해는 무슨 오해! 지금 맥주를 마시지도 않는 나한테 맥주를 넘기고 돈을 받으려 한 거잖아!”

그의 말에 그 동료들은 전혀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마치 지금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아니, 일부러 이런 상황을 연출한 것인가?

“….”

여관 주인은 그의 억지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당한 것이다.

녀석들은 작정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여관 주인은 자신도 싸움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거친 용병 여섯을 처리할 정도의 실력은 없었다.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은 이곳을 한번 뒤집어엎은 후 도망치면 잡는 것도 쉽지 않다.

알면서 당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들은 무슨 말을 해도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서 어떻게든 해를 끼칠 인물들이었다. 아마도 이곳을 공짜로 빌리고 돈까지 뜯어가겠다는 심보일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저들에게 최대한 맞춰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때, 보다 못한 레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오!”

순간 녀석들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들을 향해 언성을 높인 레쉬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맛있는 먹이를 발견한 승냥이 같은 눈빛이었다.

“넌 또 뭐야?”

“너무하지 않소. 저 여관 주인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이오?”

“허 참! 죽고 싶은가 보지?”

지금까지 여관 주인에게 시비를 걸던 녀석과 동료들이 단체로 일어서서 레쉬를 위협했다.

레쉬 주위에 있는 12명의 수하들도 살벌한 기세로 일어났다.

조금 위축된 모습으로 녀석들이 말했다.

“뭐야! 지금 우리랑 한번 떠보자는 거야!”

레쉬가 대답했다.

“그냥 이곳을 나가시오. 그러면 지금까지 있던 일들은 없던 셈 치겠소.”

“그럴 수 없다면?”

레쉬가 사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를 봐야 한다면 굳이 피하지 않겠소.”

상단의 일꾼들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다.

화물을 옮기는 일은 많은 상황을 겪는다.

도둑을 만나거나 강도를 만나거나 산적을 만나거나.

조금 더 큰일을 맡게 되면 용병을 쓸 수밖에 없는데, 용병들의 기에 눌려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상단의 일꾼들은 웬만한 실력이나 보통 이상의 담력을 가지게 되었다.

용병 여섯 정도야 우습다, 이 말이다.

두 팀이 막 맞붙으려 할 때 위층에서 루스가 내려왔다.

루스는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앤디가 말리기도 전에 생긴 일이었다.

“왜들 그러세요. 싸우지 마세요.”

레쉬가 말했다.

“위험하다. 저리 비켜라.”

하지만 루스는 듣지 않았다.

“그냥 좋게 해결할 수도 있잖아요. 서로 참으세요.”

시비를 걸던 용병들은 루스를 보며 이를 드러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제발요!”

“난 분명히 꺼지라고 경고했다.”

용병은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더니 그대로 루스를 향해 찔러나갔다.

루스가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오른쪽 어깨 깊숙이 찔리고 말았다.

푸욱!

“아악!”

“루, 루스야!”

여관 주인이 놀라 다급하게 자신의 아들 루스에게 달려갔다.

용병이 검을 뽑아 여관 주인에게도 휘두를 모습을 보이자 레쉬가 달려들어 그것을 막았다.

채챙!

레쉬의 검이 용병의 검을 쳤다.

덕분에 여관 주인은 무사히 아들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레쉬의 배려로 인해 뒤로 몸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

여관 주인은 연신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아들이 몽글몽글 피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검을 막아낸 레쉬의 행동에 분노한 용병이 검을 고쳐 쥐었다.

“큭큭! 이렇게 나오신다. 그래, 모두 죽여주지!”

스릉! 스르릉!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쪽 모두 무기를 뽑아들고 서로를 겨눴다.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때, 그들의 사이로 누군가가 태연히 걸어오더니 루스와 여관 주인에게로 다가갔다.

앤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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