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50화 (63/68)

제1장. 포른트 영지

1

브라키우드는 자신이 즐겨 마시는 덴바우르드산 와인과 하녀를 시켜 시장에서 사온 닭 꼬치, 그리고 소스를 버무린 퉁퉁 불어 있는 어묵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란 없다는 그의 지론은 시간을 떠올리기 힘든 멀고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레나는 그런 자신의 주인인 브라키우드를 보며 방긋방긋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주인의 행복은 자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 행복한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주인은 정말 싫어했다.

엘리는 그런 주인을 빤히 바라보며 함께 닭 꼬치를 먹었다.

주인은 엘리의 시선이 느껴지자 눈을 떴다. 그의 시선에 엘리가 방긋방긋 웃는 것이 들어왔다.

주인의 뒤에 시립한 채 자리하고 있던 레나는 그런 엘리가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반면에 주인은 여전히 감정 없는 표정으로 멀뚱히 엘리를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혹시 다른 게 먹고 싶은 거냐?”

레나는 놀랐다.

지금 저 말은 자신의 주인이 할 만한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을 배려하고 신경 쓴다는 것은 자신의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인 것이다.

지금 주인은 자신의 행동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레나가 보기에는 그가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오랜 시간 보필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얼마나 오래 모시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주인의 가디언이 된 그날이 까마득하니 말이다.

자신의 나이도 모르는데 그를 보필한 시간을 계산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냥 자신은 주인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다른 삶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할 이유가 없다.

주인의 곁에 존재하는 것 이상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시선, 그의 부름, 그의 행동, 그의 목소리. 그라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내 얼굴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이냐?”

엘리는 대답으로 활짝 웃었다.

주인은 엘리의 표정을 한참 보더니 자신의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보았다.

따라 웃는 것일까.

하지만 엘리와 같은 미소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듯한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엘리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반면에 주인은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흠흠! 그럼 더 먹어라.”

레나는 주인의 빈 잔에 와인을 마저 따랐다. 선홍빛 와인이 향기를 흘리며 잔을 가득 채웠다.

엘리가 눈을 반짝이며 와인 잔을 바라보자 주인이 다시 말을 걸었다.

“마셔 보고 싶으냐?”

엘리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고갯짓을 했다.

레나는 주인의 사인에 엘리의 물잔 옆에 놓여 있는 빈 잔에 와인을 따라줬다.

엘리가 주인을 따라 향을 맡았다.

달달한 냄새가 나자 마음에 드는 듯, 우아한 표정으로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한 모금을 머금은 엘리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쓰고 떫고….

“….”

이게 무슨 맛이냐는 듯한 표정이다.

브라키우드와 레나의 얼굴에 웃음이 자리했다.

앤디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로 범인입니다.”

여인은 전신을 덜덜 떨며 자신의 죄를 고했다.

모두 안드레이의 말대로 이뤄졌다.

범인은 자신의 죄책감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드레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앤디는 역시 스승은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여인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여인을 추궁하고, 사건의 전말을 모두 정리하여 내 앞으로 가져와라.”

앤디의 말에 병사들이 그 여인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리고 그녀의 추궁에 관련된 서류가 자신의 책상 앞에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그 여인이 모든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든 정황이 다 들어맞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앤디는 먼저 자신이 읽은 후, 안드레이를 찾아가 직접 그 서류를 넘기며 물었다.

“이 말이 모두 사실일까요? 제가 봤을 때는 거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안드레이가 잠시 고민을 하고는 대답했다.

“뭐,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지.”

“어떤 가능성 말이죠?”

“첫 번째 의혹은 저 여인이 정말 훔친 사람이 맞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 의혹은 저 여인이 하는 말이 진실이냐는 것이고, 세 번째 의혹은 저 여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토대로 의문을 파고 들어가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론해볼 수가 있다. 하나, 저 여인을 이용해서 물건을 입수한 다음 입을 일부러 막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히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알았을 텐데 말이지. 그렇다면 일부러 이 상황이 일어나서 저 여인이 범행을 고백하길 기다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둘, 정말 저 여인이 훔친 게 맞는가. 분명 누군가의 의뢰로 이곳에서 훔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 단약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훔치게 만들고,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한 것이라면? 셋, 누군가….”

“그만요. 그러니까 결론이 뭔데요.”

가만히 놔두다간 하루 종일 의혹에 관해 지껄일 분위기인지라 앤디는 말을 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안드레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는데, 라고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좀요! 이미 답을 내셨으면서 굳이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싶으세요?”

“이 녀석아! 내가 그 답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정도는 알아줄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게 그렇게 배가 아프냐!”

“배가 아픈 게 아니라 골이 지끈거려서 그렇습니다!”

“듣는 놈이 아플 정도면 생각한 놈은 머리가 터졌겠다. 쯧!”

“알겠어요. 나중에 들을 테니 결론이나 말해주세요.”

“알겠다. 그냥 믿자.”

“예?”

앤디가 황당한 눈빛으로 자신의 스승인 안드레이를 바라보았다.

안드레이는 뭘 그런 시선으로 보냐는 듯이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냥 저 여인의 말을 믿어보자, 이 말이다.”

“그게 결론입니까?”

“믿으라고 준 답인데 믿어줘야지.”

“허! 그럴 거면서 뭣 때문에 그렇게 머리 아픈 이야기를 줄줄이 나열하신 거예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말을 지껄이는 사람이더냐?”

“그럼요?”

“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리지 않고 ‘이게 옳다. 그러니 해라.’ 라고 말했으면 네가 따랐겠느냐, 이 말이다.”

앤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안드레이가 그것 보라는 듯이 고갯짓으로 말을 이었다.

“인간이란 간사해서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면 진실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과정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지. 난 너에게 잠시 과정을 보여 준 것이다. 단순히 내가 노력한 것을 너에게 생색내려고 떠든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앤디가 믿음이 가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안드레이는 무시했다.

“어차피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우리같이 머리 쓰는 놈들은 아주 없는 거짓말을 만들지 않아. 99개의 진실 속에 하나의 거짓을 넣을 뿐이지. 그 이유는 상대방의 머리를 아프게 하려는 것인데,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답을 유추한 상황이지. 그것에 대한 확인이 필요할 뿐이었고. 그런데 이미 확인하는 데 성공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녀석들이 무엇을 위해 거짓을 꾸몄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때지. 그러려면 직접 속아주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러면 위험하잖아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그런데 속아주라니, 뭔 소리죠? 설마 저를 또 위험에 밀어 넣을 생각이시라면….”

“내가 고작 제자를 위험에 밀어 넣는 그런 몰상식한 인간으로 보이는 거냐!”

“네.”

안드레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 채 말문을 열었다.

“말 잘 듣던 녀석이 대가리가 커지니 피곤하군. 역시 나에게 맞먹겠다고 환생 이야기 꺼낸 거였다니깐. 쯧!”

“예?”

“아니다. 아무 말도 안 했어.”

안드레이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방긋 웃자 앤디의 골이 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능구렁이 같은 양반.’

“전혀 아무 생각 없이 믿으면 당하지만, 알고서 당하는 것은 당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만큼 생각을 했으니 저 말을 믿자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

앤디가 버럭 화를 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결국은 위험에 빠트리겠다는 말이잖습니까!”

“그렇게 들리느냐?”

“예.”

“그럼 그런가 보지.”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요!”

“우매한 자들은 본시 자신이 믿는 것만을 진실로 보는 법이니라. 네가 그리  보인다는데 내가 어떻게 해주랴?”

“누가 배운 사람 아니랄까 봐 문자는….”

“그래서 안 하겠다는 뜻이냐?”

“으득! 합니다, 해요! 스승님의 말을 따르면 분명히 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이신 거죠?”

“바로 그렇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하긴. 미끼가 할 일이 무엇이냐.”

미끼라는 말에 앤디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미끼….”

이제는 대놓고 미끼란다.

화가 나긴 했지만 이미 한번 수그린 앤디는 마저 숙이기로 결정했다.

“그래, 미끼. 미끼란 바로 생생하게 파닥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는 것에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포식자가 그 먹음직스러움에 군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보고 파닥거려 보라, 이 말씀이신 거잖아요.”

“어허허허! 녀석. 누구 제자인지 똑똑하구나.”

안드레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자, 앤디가 이제는 기도 차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파닥거려 드릴까요? 이왕 파닥거리는 거 미끼계의 전설이 한번 되어보도록 하지요.”

앤디가 반항심에 이를 갈며 한 말에 안드레이가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훌륭하다! 좋은 마음가짐이다. 떡밥보다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좋은 법이지.”

“지, 지렁이….”

이젠 지렁이란다.

밟으면 꿈틀거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앤디였다.

“미끼계의 전설은 모르겠다만, 귀감은 될 듯싶구나.”

“별로 그런 귀감은 되고 싶지 않네요.”

안드레이는 앤디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귀에서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듣도록 걸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이미 그들은 우리가 저 여인을 잡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이미 그들의 관찰 대상이 되었단 말이다.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나는 집구석에 처박혀 있기만 하니 별로 맛이 없어 보일 것이다. 회는 역시 양식보다 활어지 않겠느냐.”

“갓 잡은 녀석이 맛있긴 하죠. 그것도 직접.”

앤디가 수긍하며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렇지. 네가 움직이면 대부분의 시선이 너에게 쏠릴 것이다. 자신들이 꾸민 일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내놓을지 궁금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다가 덫을 하나 놓는 거다. 녀석들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덫 말이다.”

“덫이라고요? 우리가 무슨 덫을 어떻게 놓는단 말입니까? 녀석들이 상상도 못할 덫이라니? 그런 게 우리에게 있습니까?”

“있지. 있고말고.”

안드레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2

앤디는 지금까지 하루도 자신의 소유인 포른트 영지의 기사단과 병사들을 정비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방위군에 대한 훈련 사항도 놓치지 않았다. 영지 밖을 나가 일을 하는 와중에도 그날의 훈련 성과와 병사들의 상태를 상시 체크했다.

당연히 영지민들의 상황도 주시했다. 영지민들이 무엇에 어떻게 만족을 하고 있고, 불편해하는 점이 무엇인지, 현 포른트 영지의 치안 상태는 어떠한지.

사소하게 일어난 자잘한 범죄까지 모두 꿰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것까지 힘들다는 이유로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특히나 영지의 주인으로서 자주 자리를 비우다 보니 그 미안함이 더 큰 탓에 더욱더 소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영지민들의 건의를 받아 강에 다리도 꾸준히 증강 개설하고, 편의 시설도 하나씩 늘려 나갔다.

비싼 신전에 의존하는 형태를 타파하고, 병원도 건설하여 많은 사람들이 큰 병이 아니고서야 부상이나 자잘한 병 따위는 치료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결과일까. 전 대륙의 영지 중 가장 잘사는 영지는 아니지만,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영지 정도는 될 수 있었다.

모두 앤디를 칭송했고, 영주는 부유하지 않았지만 영지는 점차 기름져 갔다.

그러나 곡해해서는 안 된다.

영주가 가난하다는 뜻이 아니란 말이다.

영지가 기름져 간다는 뜻은 영주도 언제든지 부유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앤디가 안젤른과 파프를 이끌고 포른트 영지로 향했다.

앤디가 오랜만에 영지에 모습을 드러내자 영지가 떠들썩해졌다.

가장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병사들이 각을 잡고 앤디를 맞이했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벌써부터 영주의 저택이 분주해지고 있었다.

곧 앤디가 저택에 모습을 드러냈다.

앤디의 모습이 등장하기 무섭게 한 소녀가 저 멀리서 뛰어왔다.

“영주님!”

제시카였다.

과거 포른트 영지 판자촌에서 구해낸 9살의 제시카는 6년이 지난 이제 15살의 어엿한 숙녀로 성장한 상태였다.

동생이었던 토미와 오빠였던 까뮤도 지금은 14살과 17살이 되어 기사단의 예비 기사로 훌륭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리하고 있는 저 기사단원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미 실력은 기사단에 들어서도 무색할 정도로 강한 상태였지만, 실력보다 마음의 수양이 더 중요하다는 앤디의 취지하에 열심히 수행 기사로 뛰어다녔다.

어린 나이에는 그 나이대에 배울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앤디는 언제나 예와 의를 중시하도록 명했다.

쪼르르 달려온 제시카는 상기된 두 뺨을 양손으로 지그시 누르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앤디를 올려다보았다.

“제시카구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예뻐졌네?”

“헤헤!”

제시카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앤디는 그런 제시카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는 완전히 숙녀가 다 되었는걸?”

제시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뒤에 안젤른과 파프가 제시카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하지만 제시카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으며 앤디에게 물었다.

“그런데 공주님은요? 안 오셨나요?”

결혼하고 나서 밀려든 업무로 인해 영지에 한 번도 돌아오지 못했던 앤디다. 공주 역시 이곳에 한 번도 오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은 왕국에서 일하고 있는데 공주만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 공주를 끼고 이곳으로 올 수가 없었다.

바로 영지의 일을 확인하고 길을 떠나야 하는데, 그 말은 공주만 달랑 놔두고 떠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혼자 왔다.

그나마 왕국에는 공주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신이 없는 빈자리를 그나마 채울 수 있을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공주는 오지 않았는데?”

제시카의 얼굴에 이내 실망감이 가득 들어찼다.

“치! 공주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하하! 녀석. 다음에는 꼭 볼 수 있을 거다. 그것도 오랫동안.”

그때, 본관 문이 열리고 부모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레오와 벤존스가 달리듯 바삐 나오며 앤디를 달갑게 맞이했다.

“앤디, 왔구나.”

“네 소식은 많이 전해 들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자식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앤디는 부모님 앞에 다가서서 극진한 예를 보였다.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물론이다. 하던 일은 모두 마무리 지었느냐?”

아버지 벤존스의 질문에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아가는 어디에 있느냐?”

“왕실에 놔두고 왔습니다. 제가 다시 일을 하러 가봐야 해서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모님께 돌아온 후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다. 네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머니 클레오가 물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올 수 있는 것이냐?”

“이번 일만 해결하면 돌아올 것입니다. 나중에는 나갈 일이 없어져서 영지에 틀어박혀 살지도 모릅니다. 그때는 절대 나가라고 하지 마세요.”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야 모를 일이죠.”

앤디의 농담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와하하하!”

벤존스가 말했다.

“안으로 가자. 설마 할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은 아니겠지?”

“오늘 밤을 새셔야 할 겁니다.”

“그래그래.”

벤존스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장성한 아들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가 몹시 좋았던 것이다.

“그럼 안에 들어가자. 아직 식사도 못했겠구나.”

클레오의 말에 앤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선 영지를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더니 제 영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가물가물하거든요.”

“그래. 우리는 먼저 들어가서 천천히 식사 준비를 할 테니, 일을 마치고 오려무나.”

“예, 어머니. 그럼 잠시 후에 찾아뵙겠습니다.”

앤디는 가장 처음으로 기사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상태를 점검했다. 자신이 받은 서류와 차이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 말이다.

괜히 문서만 그리 보내고 농땡이를 부렸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삼자가 객관적으로 문서를 작성하여 보내는 것이긴 했지만, 뭐든지 확실해야 하는 법이다.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앤디의 괜한 기우였던가.

기사도, 병사도 다들 잘 벼려진 검처럼 날이 서 있었다.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단 뜻이다.

보기만 해도 바로 알 수 있다.

무공을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며칠만 쉬면 바로 쉬었다는 흔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물며 천재라 해도 마찬가지다.

공부란 항상 갈고닦아야만 발전하고 퇴보하지 않는 것이다.

머리를 쓰는 것도 며칠을 쉬면 회전이 둔해지는데, 몸을 직접 사용하는 무공이야 오죽하겠는가.

앤디는 그것을 직접 확인한 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누구는 아무리 잘해도 칭찬을 하면 그가 해이해지기에 칭찬을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앤디는 달랐다.

칭찬을 받을 만하면 칭찬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악으로써 노력하는 것과 즐기며 노력을 하는 것은 차후에 드러나는 그 결과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으며, 즐기는 자는 운이 따르는 자를 이길 수 없고, 운이 따르는 자는 각성한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운과 각성은 말 그대로 하늘에 달린 것.

하지만 운과 각성을 받는다 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항상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노력을 해서 운과 각성을 할 그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앤디는 그들에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단순히 노력하는 것을 넘어 즐길 수 있는 최상의 상태를 말이다.

“모두 잘해주었구나. 수고들 많았다.”

앤디의 진심 어린 독려와 칭찬에 모두 긴장된 표정을 풀고 한껏 우쭐했다.

지금까지의 수고가 이 한마디로 인해 보상받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앤디가 말했다.

“혹여나 내 칭찬으로 보상받았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기분이 좋아지는 것까지는 막지 않겠다. 하지만 내 칭찬은 칭찬일 뿐, 너희의 수고에 대한 보상은 내 한마디 격려 따위가 아니다. 너희의 노력과 수고에 대한 보상은 더 크다. 너희 가족과 영지, 더 나아가 나라를 덮을 정도로 말이다. 절대 나태하여 게을러지지 말고, 더 큰 보상을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 알겠는가!”

“충!”

“알겠습니다!”

포른트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은 자신의 주군의 명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자신이 나태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되짚어보는 모습을 보였다.

앤디는 이런 이들이 자신의 밑에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이들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하늘이 내려 준 운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3

앤디는 포른트 영지를 잠행하며 살폈다.

모두 왁자지껄하며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있었다.

여기저기 흥정하는 소리, 물건을 파는 소리, 싸우는지 언성이 높아지는 소리.

앤디는 이 모든 소리가 사람 사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경험한바 정말 힘든 곳에서는 이런 소리를 절대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잠행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앤디는 집무실로 향했다.

“안젤른, 파프.”

“예, 주군.”

“하명하십시오.”

뒤를 따르고 있던 안젤른과 파프가 바로 명을 받들 자세로 앤디의 뒷말을 기다렸다.

“너희는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알겠습니다.”

“곧 다른 호위를 보내겠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주위의 신경을 쓰고 싶지 않다.”

“충!”

안젤른과 파프는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지 않고 돌아섰다. 주군인 앤디의 편의를 위해서 자신들이 따라나섰을 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라고 불려도 무색한 존재를 누가 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억지를 부리며 남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날 수 있는 것으로, 그를 믿지 못한다고 떠드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안젤른과 파프가 멀어지자 앤디는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앤디는 오랜 시간을 비웠음에도 먼지 하나 없는 상태로 자신을 맞이하고 있는 집무실 내부를 보며 왠지 따스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앤디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오늘 집사가 올려놓은 듯 보이는 문서들을 살폈다.

집사의 꼼꼼한 성격이 고스라니 묻어 있어 각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것도 그렇고, 나름의 배려인가? 평소와 다르게 양이 절반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것만 추려서 올려놓은 것 같았다.

그것을 보며 앤디가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앤디는 마음을 추스르고 문서를 집어 들었다.

문서들은 자신이 왕국에서 받아보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앤디는 꼼꼼하고 신중하게 하나하나 살핀 후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한장 한장 천천히, 결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말이다.

앤디의 고요한 집무실에선 종이 위에서 춤추는 펜의 은은한 속삭임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앤디에게서 떨어진 안젤른과 파프는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을 기사단청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신감이 가득한 그들의 발걸음은 개선장군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런 자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앤디를 따르며 보고 배운 것이 얼마나 컸던가.

과거 이곳에 선출되어 왔을 때에 비해 실력은 몇 배라고 감히 평가하지 못할 정도로 비약했다.

안젤른과 파프가 기사단청에 들어서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사람들이 그들을 확인한 후 환호성을 터트렸다.

“오오오오!”

“안젤른 교관님! 파프 교관님!”

안젤른과 파프가 반갑게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잘 있었나?”

그때,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며 달갑게 인사했다.

“자네들 왔는가?”

“얀느도 잘 지낸 모양이군.”

“젠장! 내가 따라갔어야 했는데.”

얀느가 투덜거렸다.

얀느는 왕실에서 검술 교관으로 발탁된 3명 중 안젤른과 파프를 제외한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파프와 안젤른이 얀느에게 한마디씩 했다.

“자네가 이곳에 남아주지 않았다면 이들을 누가 지도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영주님께선 자네를 기사단장으로 임명할 계획이신 것 같더구만.”

얀느의 귀가 금세 꿈틀거렸다.

“그게 사실인가?”

약간 기분이 풀린 듯한 어투다.

파프가 웃으며 확답을 해줬다.

“확실하네.”

기사단원들이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해주었다.

“미리 축하해야겠군요.”

“얀느 기사단장님이라고 불러야겠죠?”

“기사단장님 만세! 만세!”

하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얀느가 조금 전과 다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면 뭐하는가. 어차피 달라진 것은 없지 않나. 교관이었을 때나 단장이 돼서나 이 친구들을 가르치는 것은 내가 될 텐데. 지금 대충 봐도 자네들의 실력이 나보다 월등하게 오른 것이 보이는데, 아닌가?”

파프와 안젤른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게.”

“뭘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건가. 자네들은 영주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것에 반해, 나는 내 수련 시간도 갖지 못하고 아직도 제자리걸음인데 말이네.”

그러나 그의 푸념과 다르게 얀느 역시 상당히 성장해 있었다.

이 포른트 영지에 도착했을 때 가르침을 받았던 호흡법과 검술을 갈고닦았다는 뜻이다.

파프와 안젤른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꼬리를 잡지는 않았다. 분명 앤디를 따라다니며 자신들이 하나라도 더 배운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더 강해졌고.

과거에는 서로 비슷한 실력이었지만, 지금은 큰 차이가 날 정도다.

분명 그 점이 얀느로서는 억울했을 것이다.

그때, 파프와 안젤른이 서로 눈빛으로 사인을 교환한 후 씨익 웃었다.

그러더니 파프가 능청스러운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럼 기사단장을 하기 싫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뭐, 내가 하지. 기사단장 직위 나에게 넘기게나.”

파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젤른이 말을 받았다.

“파프,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기사단장은 내가 할 거라네. 자네는 다른 일이나 알아보게. 얀느, 나에게 위임할 것이지? 제발 부탁일세.”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고.”

“지금 뭐라는 건가? 어차피 얀느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인데 먼저 말한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보게, 얀느, 나에게 위임하게나.”

파프와 안젤른이 옥신각신하자 얀느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둘의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난질 그만 치고. 뭔가? 할 이야기가 있으면 바로 하게!”

“하하! 미안하네. 자네 기분이 너무 가라앉은 것 같아서 장난 좀 친 거야.”

“영주님께서 말씀하셨네. 기사단장이라면 기사단장에 어울리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이지.”

얀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을 드러냈다.

“혹시 그 말은?”

“자네 짐작이 옳다네.”

“자네에게 어울릴 만한 고급 검술이라네. 자, 여기.”

안젤른이 건네는 책을 얼떨결에 받아든 얀느의 표정이 곧 환해졌다.

“저, 정말인가? 이게 정말인가?”

“이 친구는. 아직도 우리가 장난이나 치는 애들인 줄 아는가?”

“여하튼 축하하네, 기사단장 나리.”

얀느는 자신이 받은 책을 보고 또 보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허둥지둥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서 빨리 자신이 받은 것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난 잠시 일이 있어서….”

얀느의 뻔한 거짓말을 듣고 안젤른과 파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다가, 얀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하하!”

“역시나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큭큭큭!”

그제야 사람들이 안젤른과 파프의 곁으로 하나둘 몰려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뭐하고 지내셨습니까?”

“영주님께 직접 검술도 배웠습니까?”

“어떤 일들이 있었나요?”

안젤른이 말했다.

“하나씩들 물어보게. 천천히 모두 다 이야기해줄 테니.”

그제야 사람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하나씩 질문을 던졌고, 안젤른과 파프가 서로 돌아가며 대답을 해줬다.

이후 기사단청 안에 있는 청자들의 입에서는 웃음과 감탄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하나같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안젤른과 파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안젤른과 파프가 워낙 말발이 뛰어나서 생동감이 흘러넘쳤다.

절묘한 곳에서 끊어주고, 긴박한 곳에서는 몰아치는 그 말재주.

사람들은 곧 쉽게 몰입했다.

자신들의 주군이자 영주인 앤디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났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사단청의 문이 열리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얀느가 술통을 이고 들이닥친 것이다.

“역시 이야기에는 술이 있어야지!”

파프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목이 타고 있었는데 잘되었군!”

곧 사람들의 손에는 시원한 맥주가 들어 있는 큰 잔이 들려졌고, 이야기 소리와 웃음소리가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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