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황의 이름으로-49화 (62/68)

제10장. 각성

1

휘이이잉!

거대한 검은 마기가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전신을 타고 올랐다.

어둠 속에서조차 눈에 보일 정도로 검고 깊은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나선의 형태로 회오리치듯 감겼다. 그리고 곧 무형의 밧줄이 되어 옭아맸다.

감히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다.

“으으으윽!”

참을 수 없는 고통.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칠공과 전신의 모공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오기 무섭게 증발되어 사방을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으아악!”

전신의 세포가 하나하나 폭발하는 것인가!

콰광! 쾅! 쾅! 쾅! 쾅!

형용할 수 없는 고통.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이름 모를 쾌감!

“크흐흐흐흐흐흐….”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과도 같은 신음.

원해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입을 통해 검은 기운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하나의 형체를 형성했다.

그것은 곧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는데, 놀랍게도 레온 프라메트 1세, 그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전신에 먹칠을 한 것처럼 어둡다는 것.

레온 프라메트 1세의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밝은 광채가 밀폐된 연무장을 가득히 메웠다.

그때, 검은 레온도 피보다 붉고 짙은 눈동자를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내 것이다. 내놓아라.”

“누구냐!”

레온 프라메트 1세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외치자, 검은 레온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너다. 너의 심연 속에 숨겨진 욕망. 그게 바로 나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이 세상에 나는 나 하나밖에 없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검은 레온을 향해 장심을 휘둘렀다.

쿠과과광!

사방이 폭발하며 분진이 일어났다.

그런데 검은 레온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레온 프라메트 1세를 향해 걸어왔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연신 팔을 뻗어 공격을 가했고, 검은 레온은 한 치의 주춤거림도 없이 다가올 뿐이었다.

더 이상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등을 돌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렸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호기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때, 검은 손이 쑤욱 치솟고 올라와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눈앞까지 검은 얼굴을 들이밀며 말문을 열었다.

“다 도망쳤나?”

“히이익!”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두려웠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마치 당장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검은 손을 뿌리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더욱 멀리 뛰었다. 감히 누구도 쫓아올 엄두가 나지 않을 속도로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아니, 이젠 숨이 막혔다.

그럼에도 숨을 참고 발을 놀렸다.  녀석의 기운이 아직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바로 등 뒤에서 그 검은 녀석의 숨결이 목 뒤를 자극했다.

오싹!

달리고, 또 달렸다.

본능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멈추는 순간 녀석에게 먹힌다는 사실을 말이다.

달려야 했다.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녀석은 지금 여유로운 모습으로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한계에 도달했다. 지금은 달리다 못해 걷고 있었다.

터벅! 터벅! 터벅!

뒤로 저벅거리는 녀석의 발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녀석이 말을 걸었다.

“포기해. 어차피 모든 것은 정해진 운명이야.”

“포기 못해!”

“어리석은 녀석.”

순간, 검은 손이 레온 프라메트 1세의 머리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스며들었다.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녀석과 융화되며 그대로 먹혀 버렸다. 그 시간은 눈물조차 흘리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녀석이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 크하하하하하하!”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 전신을 아우르는 살기.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렸던가. 세상을 피로 물들여 주마! 죽이고, 또 죽여서 생명체를 말살시켜 주마!”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녀석의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은 뜻밖의 상황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뭐지? 이건 대체 뭐지?”

부르르르르르!

덜덜덜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진동이 심해졌다.

그때 녀석의 전신이 투명하게 물들더니, 백회혈을 시작으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녀석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고함을 지르며 전신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으악! 으아아아악!”

서걱! 서걱!

전신이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맑고 거대한 기운이 잠식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녀석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안 돼! 안 돼! 다시 빼앗길 수 없어! 어떻게 기다린 시간인데! 이 몸은 내 거야! 내 거란 말이다!”

뇌리를 가득히 메우는 녀석의 비명.

순간,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눈을 번쩍 떴다.

혈광이 번뜩이기 무섭게 사라지며 맑은 안광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혈광이 번뜩이고, 다시 맑은 안광이 비췄다.

그사이에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기운에 연무장이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쿠궁! 쿠구구궁! 쿠르르르르….

하지만 맑은 기운이 강해질수록 광폭한 기운이 사그라졌다. 그에 맞춰 연무장의 진동도 멈춰 갔다.

여진이 남아 가벼운 흔들림이 있었지만, 서서히 그렇게 멈췄다.

맑은 기운이 아직도 흘러나와 바닥에 자욱하게 깔렸다. 그 기운이 닿는 곳에는 하얀 서리가 피어올랐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흡수되기 직전에 뭔가 신비로운 힘이 자신을 다시 되돌려 놓은 것이다.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다시 꾸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끔찍한 악몽.

문제는 단순히 악몽이 아니라 직접 겪었다는 것이다.

영혼을 잠식당하는 그 느낌. 그 생생한 느낌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몸에 남아 있었다.

부들부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자신의 몸을 끌어안으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 후후후후후… 후후후후후후! 으하하하하하!”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물이 흘렀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악령에게 빼앗겼던 몸을 되찾았는데 말이다.

레온 프라메트 1세만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면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수련도 수련이지만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있으면 다시 그 악령이 쫓아와 자신을 해칠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이 연무장을 벗어나는 공식적인 이유는 수련을 하던 중 이곳이 무너져 내린 탓으로 남을 것이다.

2

하녀에게 떡이 되도록 맞은 브리어트 강도단의 부두목과 수하들.

아무리 숨기고 다닌다고 해도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같이 목발을 짚거나, 눈이 시퍼렇게 물든 채 깁스를 하고 있는데 들키지 않는다면 은잠술의 달인일 것이다.

그것도 단체로 그러고 있는데 누가 모르겠는가.

부두목 보텡은 노심초사하며 칩거한 채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결국 브리어트 강도단의 부두목은 브리어트에게 호출을 당하게 되었다.

부두목 보텡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민했다.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말이다.

결국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찾아냈지만, 막상 브리어트 앞에 불려 가자 머릿속이 하얗게 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그래. 일을 맡았는데 실패를 했다고?”

“죄송합니다.”

“돈은?”

“의뢰를 실패하여 받지 못했습니다.”

“흥!”

브리어트가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쿠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눈치를 살피며 모습을 드러냈다.

호쿠를 본 부두목 보텡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호쿠 저 자식이 무슨 말을 어떻게 지껄일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자리에 저 녀석이 나왔다는 사실은 이미 두목인 브리어트가 어느 정도 파악을 마친 상태란 뜻이 아니겠는가!

브리어트가 호쿠에게 말했다.

“이봐.”

“예, 예에!”

“저 녀석에게 돈을 줬나, 주지 않았나?”

호쿠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할지, 아니면 거짓을 고해야 할지 말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후환이 두렵고, 거짓을 말하면 억울한 입장이었다.

결국 결정을 내린 호쿠가 대답했다.

“이, 일을 마친 후에 건네기로 해, 했었습니다.”

그러자 브리어트가 은근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 물론입니다.”

“사실이지?”

“그, 그렇습니다.”

“확실한 거지?”

자꾸 은근하게 압박을 가하는 브리어트였지만, 호쿠는 무사히 그 상황을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뭐, 그렇다는군.”

부두목 보텡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중에 만나면 잘했다고 칭찬이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칭찬한다고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아까워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받았던 계약금은 돌려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브리어트가 입맛을 다시며 부두목 보텡을 주시했다.

부두목 보텡은 뻔뻔한 표정으로 왜 자꾸 보는지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그 사이에 끼어 있던 호쿠가 눈치를 살피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던 중이었다.

브리어트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내보내. 눈에 거슬린다.”

뒤에 자리하고 있던 거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쿠의 뒷덜미를 잡아서 문밖에 휙 집어던졌다.

“꺼져.”

“으악!”

비명이 들리고, 문이 닫혔다.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호쿠의 상태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브리어트가 손톱의 때를 벗기며 말했다.

“그래. 우리 이름에 먹칠을 했단 말이지?”

“죄, 죄송합니다, 두목.”

“후! 후!”

그는 손톱에서 뺀 때를 입김으로 불고는 정자세로 앉아서 지그시 부두목 보텡을 주시했다.

부두목 보텡이 마른침을 삼켰다.

“누구에게 당한 거지?”

“자,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냐?”

부두목 보텡은 자신이 만든 변명거리를 열심히 떠올리며 떠듬떠듬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자 하나에게 맞아서 이렇게 됐다고 말하는 순간 쪽팔린 것은 차치하고, 목이 잘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저, 저희는 어둠을 틈타서 모, 몰래 숨어들 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어둠 속에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들이 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놈들에게 당했다?”

“그, 그렇습니다!”

부두목 보텡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어트가 뭔가 생각하는 듯 신음을 흘렸다.

“흐음….”

“꼴깍!”

“네 녀석은 그놈들의 정체를 뭐라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우, 우리들을 기다렸다가 기, 기습한 것을 봤을 때 놈들이 무척 수, 수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 습니다.”

브리어트가 턱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수상하다고?”

“그렇습니다. 녀석들을 보건대 저희와 비슷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 꺼낸 거짓말의 개연성이 대충 맞아떨어지자, 그 뒷이야기들이 입에서 술술 나왔다.

“무슨 냄새? 킁킁! 킁킁!”

브리어트가 자신의 주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두목 보텡이 부연 설명을 했다.

“저희와 같은 직업 말입니다.”

“아아, 그 냄새.”

브리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그놈들이 새로운 조직의 놈들이다, 이거지?”

“그럴 것으로 판단됩니다.”

브리어트가 자리하고 있던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놈, 손 좀 봐.”

그 말에 부두목 보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퍽퍽퍽퍽! 퍼퍽! 퍽퍽퍽!

“으악! 크아악! 왜 그러십니까! 어헉! 용서해주십… 커억… 시오!”

브리어트는 느긋한 시선으로 부두목 보텡이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며 왜 맞는지를 알려 주었다.

“감히 핏기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들에게 맞고 와서 잘났다고 떠들어?”

“주, 죽을죄를 져, 졌습니….”

“죽을죄인 걸 알면 죽어도 억울하지는 않겠군. 묻어.”

부두목 보텡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살려 주십시오! 두 번 다시 실수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브리어트가 턱짓으로 사인했다.

그러자 부두목 보텡을 두들겨 패고 밖으로 끌고 나가려던 녀석들이 대충 내려놓았다.

부두목 보텡은 무릎을 꿇은 채로 기어서 브리어트 앞으로 가서 고개를 조아렸다.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든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으흑흑흑!”

“그 집이 어디냐?”

순간, 부두목 보텡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긴. 감히 우리 대브리어트 강도단을 건드린 것에 대한 보복을 해줘야지. 철저한 피의 보복을 말이다. 크흐흐흐!”

브리어트가 주먹을 불끈 쥐었는데, 그 모습을 보며 부두목 보텡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신들을 흠씬 두들겨 패며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면, 길 가다가 시야에 들어오기만 해도 그때는 정말 죽을 줄 알라고 말한 하녀복을 입은 마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자신의 거짓말이 곧 들통 날 것도 걱정이 되었다. 브리어트가 가는 순간 걸리는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하녀복을 입은 마녀에게 져도 문제고, 브리어트가 정말로 다 쓸어버려도 문제였다.

사실 약간 승리의 향방에 대해서 하녀복을 입은 마녀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브리어트들이 그 마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이 봤을 때 그 마녀는 거의 무적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뭐, 어찌 되었든 하나는 확실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서 도망쳐야 하는 것 말이다.

부두목 보텡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브리어트가 말했다.

“무슨 생각 중이냐?”

“아,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브리어트가 잔혹하게 웃었다.

“몰라? 알게 해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벼락 맞아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다급히 외쳤다.

“아! 압니다! 알구 말굽쇼!”

“큭큭! 당연히 앞장을 서야지. 네 녀석의 복수를 하러 가는 건데 말이다.”

“복수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목!”

“감사는 나중에 돈으로 받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물론입니다!”

우선은 살고 봐야 했기에 열심히 열성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머릿속 한쪽 구석에서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고민을 했다.

‘오우거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오우거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오우거한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거의 주문을 외우는 수준이었다.

그때, 브리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흐흐! 대체 어떤 간 큰 놈들인지 기대가 되는구만. 오랜만에 내 애검에 피를 듬뿍 먹여야겠어. 크크크크크!”

그 말이 끝나자 주변에 있던 수하들이 따라 웃었다.

“크하하하하하!”

“케헤헤헤헤헤!”

“겔겔겔겔!”

녀석들의 소란함 속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부두목 보텡.

중간에 어떻게든 빠져나가 살 수 있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3

부두목 보텡은 눈물을 머금고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저주 받을 놈의 저택 앞에 섰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도망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선두로 세워서 길 안내를 시키는 와중이었다. 뒤로는 수십여 명의 녀석들이 단검과 자신의 취향을 자랑하는 무기들을 들고, 히죽거리며 따르고 있는 중이었고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일 도망치는 기세라도 보였다면, 자신의 등은 수하들의 무기의 다트 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저택 앞에 서니 몸이 덜덜덜 떨려 왔다.

브리어트가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워서 그러나?”

“조금 밖이 서늘해서 말입니다.”

부두목 보텡의 대답에 브리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조금 서늘하긴 하군.”

‘휴우….’

다행스럽게도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이런 소란스러움을 안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이 상황을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했다.

그 마녀의 끔찍한 주먹을 또 한 번 맛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살려 두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부산스러운 지금의 상황이라면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부두목 보텡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외곽으로 몸을 빼내려던 그 순간, 무엇인가가 자신의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브리어트였다.

“보텡, 어딜 가느냐?”

‘징그러운 자식!’

물론 속마음과 달리 겉은 황송하기 그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소변이 급해서 말입니다.”

“설마 겁먹은 거냐?”

“아지트에서부터 마려운 것을 참고 왔는데, 한계라서 말입니다.”

브리어트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최대한 빨리 와라. 곧 쳐들어갈 테니 말이다. 알겠나?”

“바람같이 오겠습니다!”

바로 그때, 허공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자식들이 또 왔군.”

움찔!

부두목 보텡의 몸은 최대한 수축했다.

자신을 몇 주 동안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던 그 마녀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때가 기회였다.

부두목 보텡은 슬금슬금 이동하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멈춰 서야 했다.

“어이, 거기.”

처음에는 무시하고 그대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무시할 수 없었다. 확실하게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너, 또 왔냐?”

짜증난다는 어투였다.

부두목 보텡이 눈을 부릅뜨고 생애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미친년! 지금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거냐! 감히 이곳에 나타나다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목숨이 아홉 개라도 되느냐!”

목소리와 달리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고, 몸은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네가 제대로 미쳤구나?”

“뭔 개소리냐!”

부두목 보텡의 외침에 하녀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에서 내려왔다.

“저게 왜 저러지? 그때 내가 머리를 심하게 때렸었나?”

사람들이 모두 웅성거렸다.

“하, 하늘에서 내려왔다!”

“대체 저년 뭐야?”

“무슨 눈속임 같은 건가?”

땅에 완전히 내려온 하녀가 주위를 보며 말했다.

“대가리 수가 조금 늘었네? 자살하고 싶으면 다른 곳에 가서 하라니까, 정말 말들 안 듣는구만.”

하녀가 건들거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에 모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곧 정신을 차렸는지 브리어트가 부두목 보텡을 보며 말했다.

“혹시 설마 저 계집년 하나에게 당해서 왔던 것은 아니지?”

하지만 부두목 보텡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기 전에 이미 브리어트의 발길질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퍽! 퍽! 퍽! 퍼퍽! 퍽퍽퍽!

“죽어! 죽어라! 이 병신! 쓰레기야!”

“커억! 크허억!”

그 뒤를 이어서 두목이 힘들까 봐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수하들도 몇 대씩 거들었다.

푹! 퍽! 파박! 빡!

입이 아플까 봐 욕도 거들어줬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

“네가 꼴에 부두목이라고 목에 힘주고 다닐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여자한테 맞고 질질 짜서 오기나 하고! 쪽팔린 새끼!”

“꾸에에에엑! 사, 살려! 사람 살려! 꾸어어어어!”

하녀는 태연하게 녀석이 신명나도록 맞는 장면을 감상했다.

잠시 후, 걸레보다 못하게 된 부두목 보텡이 곧 죽을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람들이 하녀 주위로 몰려들었다.

“흐음… 이년한테 맞았다고? 네년 정체가 뭐냐?”

“보면 모르냐?”

“하녀?”

“딩동댕!”

브리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장난치나?”

“하녀 무서운 것을 도통 모르는구만. 요즘 왜 이렇게 하녀를 무시하지? 곧 장난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다.”

하녀의 몸이 바람처럼 녀석들의 틈으로 파고들어갔다. 그리고는 두 녀석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먹이는 것이 아닌가!

퍽! 퍽!

“꾸엑!”

“컥!”

두 녀석이 코가 무너져서 피를 좔좔 흘려 댔다.

두 녀석이 비틀거리자 발차기로 낭심을 걷어찼다. 그러자 녀석들이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남아 있던 놈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뭐, 뭐지?”

“뭐긴, 병신아. 꼭 맞아야 아냐?”

퍽!

하녀의 주먹이 대머리 녀석의 안면을 강하게 내지르며 뭉개버렸다.

안면을 강타 당한 대머리가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놓치며 기절했다.

하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다른 녀석들의 몽둥이를 피하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몽둥이를 발끝으로 들어차서 받아들었다. 그리고 좌우로 휘둘러보았다.

부웅! 부우웅!

하녀가 방망이를 휘두르자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하녀는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체리 빛 입술을 할짝거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브리어트가 외쳤다.

“뭐해! 덮쳐!”

수십 명의 강도들이 우르르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럼 뭐하나.

순 구멍 투성인데 말이다.

하녀는 마치 미꾸라지라도 되는 것처럼 강도 녀석들의 사이를 쑥쑥 잘도 빠져나가며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는 마치 먹이를 노리고 날아가는 뱀 머리마냥 신속하고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푸억! 빠직! 퍽! 퍽!

몇몇은 뼈가 부러지는 시원한 소음을 흘리기도 했다.

강도들은 미칠 것 같았다.

모두가 우르르 달려들어 덮치는데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꾸라지를 넘어서 이건 마술과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강도들이 하나둘 바닥에 쓰러졌다.

왠지 무서웠다. 별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하녀에게 농락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귀신과 싸우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 외쳤다.

“마, 마녀다! 마녀!”

강도들이 웅성거렸다.

순간, 브리어트가 다시 소리쳤다.

“개소리하는 것들은 내가 직접 목을 딸 것이다! 잡소리하지 말고 어서 잡지 못해!”

그사이에도 한 녀석이 오른쪽 늑골부근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하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하녀 무서운지 알겠냐?”

주위에 있던 녀석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무슨 하녀가 저따위야!”

“뭐야! 쟤 무서워.”

브리어트는 자신의 수하들이 몸을 사리는 것을 보며 눈이 뒤집히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브리어트가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수하들이 식겁해서 뒤로 더 몸을 뺐다.

“네 녀석들, 이년을 죽이고 다 죽여주마!”

브리어트가 하녀에게 검을 내리찍었다. 하녀는 가뿐하게 피했다.

다시 휘둘렀다. 또 피한다. 연속 공격을 하는데 한 대도 맞힐 수가 없었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허억! 허억! 한 대만 맞아라!”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피하는데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미쳤냐, 등신아?”

그 속에 기름까지 부어줬다.

“이년! 당장 사지를 분해해주마!”

브리어트가 어금니를 악물며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자 하녀가 왼쪽 다리를 축으로 경쾌한 움직임으로 오른발을 회전시키며 그대로 쭈욱 뻗었다.

퍼헉!

보기만 해도 시원한 타격이었다.

“꾸허헉!”

하녀는 그대로 상체를 띄워 브리어트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 찍었다.

제대로 적중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니킥이었다.

띠잉!

묵직한 충격이 뇌를 흔들었다. 브리어트가 그 큰 체구를 가누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털썩!

“후! 역시 구타는 손맛이라니까. 이놈이 보스지?”

하녀의 물음에 모두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가 몽둥이를 들더니 후려치기 시작했다.

순서나 방법은 없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퍽퍽퍽퍽! 퍼퍼퍼퍼퍼퍽퍽! 퍼버버버벅!

“컥컥컥컥! 크허어어어억억! 커어어어억!”

브리어트의 비명이 밤하늘을 가득히 메웠다.

한참을 구타하던 하녀가 쓰려져 있는 놈들을 일일이 찾아가 몽둥이를 같은 방식으로 휘둘렀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놈들이 모두 정리되자,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휴! 개운해. 속이 다 후련해지네.”

그때, 구석에서 구경꾼처럼 서 있는 강도단 중 한 녀석이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말았다.

짝! 짝!

그 박수는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나둘 따라 쳤다.

짝짝짝짝!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하녀가 감사하다는 듯 허리까지 숙여 가며 인사하는 쇼맨십을 선보였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며 이렇게 말했다.

“성원에 감사합니다.”

“와아아아! 최고다!”

“멋져요! 누님!”

하녀가 빙긋 웃었다.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더욱 기운을 내겠습니다.”

“와아아아!”

강도들은 그녀의 화답에 환호했다. 그다음 말이 이어지기 전까진 말이다.

“그럼 다음 타자. 퉤퉤! 나오시죠.”

하녀가 양손에 침을 탁탁 뱉으며 몽둥이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풀스윙을 하며 휘둘렀다.

퍼억!

하녀근처에서 어정쩡한 포즈로 정신 줄 놓고 서 있다가 강타당한 녀석의 몸뚱이가 홈런볼처럼 붕 떠올랐다.

“어헉!”

그리고 미친 듯이 까고 패고 내리찍었다.

퍽퍽퍽퍽퍽퍽퍽퍽!

완전히 걸레가 될 동안 두들겨 팼다. 그리고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도단 녀석들이 사방으로 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살려 주세요!”

“불효자는 웁니다!”

하녀는 콧방귀를 뀌며 그 뒤를 바람처럼 따라잡았다.

그녀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몽둥이를 휘둘렀고, 일타일살의 실력으로 한 놈도 놓치지 않고 모두를 때려잡는 쾌거를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뒷목을 움켜 잡은 녀석의 귓가에 입술을 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제 다시 즐겨 볼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여인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와 강도단 녀석들의 곡소리가 하늘을 가득히 수놓았다.

하녀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하녀가 걱정이 되었는지 엘리가 밖으로 마중 나와 있었던 것이다.

“뭐해?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엘리가 강아지 같은 눈동자로 하녀를 쳐다보았다.

엘리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니, 무슨 일 있었어요?’

하녀는 엘리의 걱정에 기분이 순식간에 상승했다. 절로 미소가 입가에 머물러졌다.

하녀가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만 들어가자. 밖이 쌀쌀하네?”

한참 하녀를 바라보던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문이 쾅! 하고 닫히기 무섭게 그림자로 가려진 외벽 그늘 쪽에서 신음이 하나둘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으으으으….”

“사, 살려… 줘어어….”

털썩.

4

앤디는 안드레이의 명에, 그때 상황을 유추하며 하나하나 파고들어갔다.

대체 어떻게 안드레이의 작업장에 들어와 마법 레시피를 들춰서 훔쳐 갔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막막했다.

현재로서는 가장 궁금한 것은 바로 언제 그것을 훔쳐 갔냐는 것이다.

마하역혼환을 만들어내는 연구를 진행한 것은 쿠렌트 제국과 전쟁하기 전이었다.

‘그럼 그때 당시에 훔쳐 간 것일까?’

가능성이 있었다. 전쟁에 대한 혼란으로 정신이 없었을 때이니, 다른 어떤 때보다 빼돌리기 수월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드레이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일반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더 불가능하다.”

“어째서요?”

“전쟁은 정보전이다. 최대한 정보를 지키기 위해 보안이 치밀하게 이뤄지던 중이다. 조금만 수상쩍은 움직임만 보여도 바로 척살을 할 정도이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쟁 중에는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도,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보고를 해야 할 정도이니 틈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돌아와서 일어난 일로 봐야겠군요. 어디에 은거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누가 훔칠 수 있었겠어요.”

안드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아마 왕실에 발을 들였을 때 없어졌겠지.”

“뭔가 범위를 좁힐 수 있는 정보가 없을까요? 지금 무작정 수사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애매하고, 광범위하잖아요.”

“우선은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들로 좁혀지겠지. 하녀라든가 호위 기사, 그리고 수습 마법사를 포함한 마법사들, 혹은 정보부 요원 정도겠지?”

앤디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굳이 제가 범인을 찾아야 하나요?”

“왜? 귀찮냐?”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애매하죠.”

“뭐가 애매해?”

“제가 뭐, 이런 쪽으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몸으로 들이박는 것뿐인데 범인을 찾을 수 있겠어요? 셀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시끄럽다! 잔머리 굴리지 말고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란 말이다!”

“이러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하지 않을지 걱정이네요.”

그 말에 안드레이가 웃었다.

“얼마나 하기 싫은지 이제는 문자까지 쓰는구나.”

“하기 싫은 게 아니라 답이 안 나오니까 하는 말이죠.”

안드레이가 말했다.

“내가 어째서 네놈 마음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다 생각이 있어서 네 녀석을 시키는 것이다. 타초경사라고 했느냐? 어설프면 타초경사지만, 제대로 쓰면 제초포사(齊草包蛇:풀을 밀고 뱀을 포획한다)다.”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어떤 사람이 움직이느냐에 따라 위압감이 달라지는 법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네 녀석이 움직이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놈의 행동에 불안감이 커질 것이다.”

“어째서요?”

“네 녀석이 어떤 녀석이냐. 지금 이 왕국의 공주의 남편이며, 영웅이 아니냐. 그런 자가 도둑질한 범인을 잡겠다고 직접 움직이는데, 무게가 어찌 다른 이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지금쯤 녀석은 왕국에서 이 사건에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느끼고 덜덜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뭔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너는 그때까지만 헤집고 다니면 된다.”

듣고 보니 그럴듯해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잡히겠습니까?”

“잡을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시죠?”

“녀석은 아마 별 볼일 없는 녀석일 것이다. 돈에 혹하거나, 뭔가 사소한 흠을 잡혀서 어쩔 수 없이 도둑질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지.”

“어떻게 그렇게 장담하실 수 있죠?”

“직책이 높거나 이름이 있는 자일수록 사람들의 시선에 남을 확률이 높다. 그런 자들이 움직이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크다. 그렇다면 정보부 녀석들과 호위 기사 단장은 빼놓고 봐도 되겠지. 그놈들의 행동은 시시때때 보고가 들어가니 말이다. 그럼 용의자가 확 줄어들지 않느냐. 확실한 것은 그 녀석은 자신이 뭘 훔쳤는지도 잘 모를 것이다.”

앤디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입술을 쭉 내민 앤디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이미 어느 정도 답은 가지고 계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뭐, 그런 셈이지.”

안드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전문가를 고용했으면 벌써 잡았을 것 아닙니까?”

“그건 또 다르다.”

“뭐가 말입니까?”

“전문가를 고용하게 되면 분위기가 살벌해지지. 아마 다른 나라에서조차 신경을 바짝 세울 것이다. 우리가 뭔가 눈치채고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테지.”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앤디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였다.

안드레이가 혀를 찼다.

그것을 본 앤디가 욱했다. 마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눈치가 이렇게도 없어서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괜히 한 것이 아닌가 싶어 살짝 후회스럽기까지 했다.

요즘 들어 스승이라는 지휘를 이용하여 나이만 많이 헛먹은 놈으로 은근슬쩍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보거라.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대해 견제가 없을 것 같으냐? 지금쯤이면 뭔가 수를 쓰고도 남았지. 첩자가 들어왔든, 뭘 했든 말이다. 도둑놈이 제 발 저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

“그럼 잡아야죠. 그냥 놔둡니까?”

“적당한 정보를 흘리는 통로는 필요하다. 녀석들을 긁어주는 정보 정도는 흘러가면 정보의 통제가 가능해지지만,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하게 되면 더욱 경계를 하게 되거나, 무모한 짓을 벌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움직이면 괜찮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아마도 어느 정도 생각을 하는 녀석들은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벼락출세한 녀석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쇼를 한다고 말이다.”

앤디의 속이 울컥했다.

“저한테 안 좋은 거잖아요.”

“뭐가 좋지 않다는 거냐?”

“그럼 스승님은 자기 제자가 무시를 당하는데 좋으세요?”

“흥! 그딴 시선은 갖다버려라. 아니, 우리로서는 오히려 네가 더 무시당하고 평가절하 되길 바란다.”

“왜요?”

안드레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네 녀석을 무시해야 네 녀석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가 가려지기 때문이다. 후후후후후!”

“…!”

“네 녀석의 진가야 내가 알고, 왕실이 안다. 우리의 옳은 판단이 중요하지, 타국의 평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생각해보아라. 전쟁 중에 네 녀석을 3이라고 평가를 하고, 그에 해당하는 병력을 보냈는데 네가 8의 힘을 낸다. 어떻게 되겠느냐? 승리를 거저먹는 것 아니겠느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앤디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찬사에 가까운 칭찬을 하는데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고, 역시 안드레이의 심기는 놀라웠다.

이렇게 멀리까지 시류를 읽고 일을 진행했다니, 역시 대마도사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이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해야 합니까?”

“범인이 잡힐 때까지 해야지.”

“그날이 언제쯤 될 것 같은데요?”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정말요?”

“자신의 죄책감과 압박감에 못 이겨 자수를 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럼 대충 해도 되겠군요.”

안드레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쇼는 제대로 해야지. 원래 구석에 몰린 녀석일수록 그런 틈에 민감한 법이다. 능력이 되건, 안 되건 더욱 헤집고 다녀야 하는 법이야.”

“그렇기도 하겠군요.”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지켜본 안드레이가 다시 서류를 파기 시작했다.

밀턴이 공손한 자세로 말을 걸었다.

“주군, 몸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다.”

“본 노는 주군의 변고에 놀라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후후후! 이제는 걱정하지 말거라.”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정신을 완전히 회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자신이 평소 즐기는 식사와 음악, 그리고 그림을 감상한 후 명상을 해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했다.

그때의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수련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마기를 억누르지 않으면 언제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녀석의 호흡이 목 뒤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 오싹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인들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누웠다.

여인들의 보드라운 피부는 숙면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곧 침대가 들썩였다.

“하악! 학! 아아악! 조금만! 조금만 더!”

“크윽! 헉!”

뜨거운 열락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뇌리를 자극했다.

시원한 배설의 욕구를 해결하자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랑을 마친 여인들이 자신을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그런 여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양팔에 안고, 그녀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커헉!”

갑자기 뭔가가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아울렀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전신에서 혈기가 맴돌았다.

여인들이 갑작스럽게 돌변한 레온 프라메트 1세를 보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누, 누구 없어요!”

하지만 비명도 잠시…

레온 프라메트 1세의 손아귀에 빨려들 듯이 끌려가더니 목을 잡혔다.

쭈우우우욱!

여인들의 탱탱한 피부가 급속도로 수축하면서 주름이 피어나고, 생기를 잃어가더니 끝내 숨을 거뒀다.

수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라와 같은 모습이었다.

조금 전 살아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여인이라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레온 프라메트 1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우며 입을 열었다.

“하아아아! 좋군, 이 생명력. 큭큭큭!”

레온 프라메트 1세가 눈을 떴다.

번쩍!

두 눈동자에 붉은 흉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때 연무장에서 보았던 그 악령의 눈동자였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거만한 시선으로 자신의 육신을 내려다보면서 말문을 열었다.

“멍청한 자식. 어때? 잠깐 동안 행복했었나? 끄끄끄끄끄!”

검황의 이름으로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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