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스승과 제자
1
길을 걷고 있는 두 청년은 어디서든 한눈에 띄었다. 단순히 이국적인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잘생긴 탓이었다.
길 가던 여인들이 하나같이 멈춰서 그들의 얼굴에서부터 뒤태까지 훔쳐볼 정도였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둘은 잘생긴 얼굴 외에도 특색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한 명은 숯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고, 다른 한 명은 물감보다 흰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이에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 또한 외모가 특출 났다.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하나? 가슴이 분탕질 칠 정도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바로 셀린과 베르커스, 그리고 안테르트였다.
길을 가며 셀린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흠… 왜 아직도 연락이 없지?”
“무슨 연락 말이냐?”
베르커스의 물음에 셀린이 대답했다.
“제가 나오면서 나왔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아직도 마중을 나온 사람이 없어서요.”
“그게 그리 신경 쓰이느냐?”
“저번에는 찾지 않아도 찾아왔었거든요.”
셀린의 말에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신경 쓰지 마라. 원래 아쉬운 놈들이 오기 마련이니.”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각자 반대쪽으로 눈동자를 움직여 어딘가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잔뜩 포진되어 있는 곳이었다.
안테르트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저것도 감시라고.”
“예?”
“아무것도 아니다.”
이번에는 베르커스가 셀린에게 말했다.
“오늘 점심은 뭐냐?”
“뭐가 드시고 싶으세요?”
“글쎄다. 우선 식당부터 들어나 가자.”
셀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섰다. 그때 안테르트가 말했다.
“잠시만.”
멈춰 선 셀린이 물었다.
“왜요?”
“안 들어가도 될 것 같다.”
안테르트의 말을 베르커스가 받아줬다.
“슬슬 놈들이 아쉬워진 모양이지?”
“큭큭큭!”
둘의 대화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셀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셀린이 의아한 눈빛을 던지자 그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르신들을 뵙습니다.”
“이제는 숨어서 지켜보는 것은 끝난 건가?”
그 말에 사내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뭔가 변명의 말을 하려다가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만나기 전에 들었던 경고의 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 경고를 한 사람이 다름 아닌 탈리온 공작이었다.
아니, 그 말을 듣지 않았어도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태산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압력을 지금 눈앞의 존재들에게서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상하셨다면 벌을 받겠습니다.”
“운이 좋구나. 변명 따위를 지껄이려 했다면 입을 찢어놓고, 저 뒤에 자리하고 있는 놈들의 목을 다 따버리려 했었다.”
그 말에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베르커스가 물었다.
“그래, 네 녀석은 누구냐?”
“저는 탈리온 공작님의 직속 기사단의 단장인 케이라고 합니다.”
“큭큭큭! 눈알을 뽑히기 싫으면 다른 놈들도 나오라고 해라. 노부는 누가 숨어서 노부를 지켜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케이가 가볍게 읍을 한 후, 등을 돌려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순식간에 사방에서 평민 복장을 하고 있는 15명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셀린은 당황했다.
지금까지 숨어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베르커스와 안테르트는 예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말이다.
조금 전 둘의 의미심장한 행동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셀린이었다.
케이가 말했다.
“저희를 따라오시지요.”
베르커스가 대답했다.
“식사를 하고 싶다.”
“가실 곳에 숙박과 식사에 관한 것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맛이 없으면 목을 따겠다.”
“걱정 마십시오. 아마 만족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케이의 이마가 흥건히 젖었다.
“흠… 그럼 가지.”
우물우물!
“맛있는데?”
“뭐, 나름 나쁘진 않아.”
“괜찮네요.”
안테르트와 베르커스, 그리고 셀린 순으로 한마디씩 내뱉었다.
케이는 면죄부를 받은 표정으로 안도의 모습을 띠며 말했다.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꺼져.”
“예?”
“그럼 식사하는 내내 거기 서서 지켜볼 건가?”
“아, 죄송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옆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안테르트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케이는 정중함을 잃지 않고 예를 다해 읍을 한 후 물러났다.
베르커스가 말했다.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군.”
“왜요?”
안테르트가 대신 대답했다.
“저 녀석이 하는 행태가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거든.”
“누구를요?”
“탈리온.”
“….”
셀린은 대체 탈리온 공작과 안테르트와 베르커스의 과거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베르커스가 고기를 썰며 이죽거렸다.
“큭큭! 저 녀석, 탈리온 녀석의 수하라고 했던가? 꼭 지 같은 것을 수하라고 달고 있군.”
“원래 끼리끼리 노는 법이지.”
“머리 뚜껑을 따버리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들었어.”
“난 저 녀석의 재수 없는 말투를 들을 때부터 하관을 잡아 뜯어버리고 싶더군.”
안테르트의 말에 베르커스가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큭큭큭! 그거 생각만 해도 신나는군. 그건 그렇고 네 녀석, 멀쩡한 상태로 상당히 오래 버티는군.”
“왜? 불만이냐?”
“별로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럼?”
“이제 네 녀석이 슬슬 다시 미칠 때가 된 것 같아서 말이지. 이번에는 좀 오래 버틴 것 같지 않더냐?”
안테르트의 인상이 구겨졌다.
“시끄럽다.”
“큭큭큭큭큭!”
베르커스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음을 흘려 댔다. 안테르트는 베르커스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더니 말을 걸어왔다.
“안테르트 스승님과 베르커스 스승님, 안녕하셨습니까?”
셀린이 그자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탈리온 공작님.”
안테르트와 베르커스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후후!”
“큭큭큭!”
탈리온 공작이 인사했다.
“인사가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순간, 베르커스의 팔이 쭈욱 뻗어졌다.
탈리온 공작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입구 쪽에서 다시 나타났다.
“큭큭큭큭! 하긴 이렇게 쉽게 잡히면 재미없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습니까?”
“화가 풀려?”
베르커스의 눈에서 광기가 발현했다.
콰과과과광!
식당의 중앙이 폭발하며, 그 부스러기들이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갔다.
어떤 물리적 충돌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생긴 일이 아니다. 단순히 기운의 발현으로 일어난 파동에 의해 형성된 일이었다.
그 사이로 베르커스의 주먹이 허공을 격하고 탈리온에게 날아갔다.
슈웃! 퍼버벙!
“크흑!”
언제나 평온한 절대 강자의 모습이 이곳에서 무너졌다.
탈리온 공작의 구겨진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젠장할 늙은이들! 더 괴물이 되어 나타났구나!’
설마설마했었다. 거기서 더 강해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강해졌으니 어느 정도 상대가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오만이었으며, 착각에 불과했다.
더 이상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더 강해진 상태였다.
그때 베르커스가 말했다.
“제자야.”
“예, 스승님.”
“이제 죽어라.”
파팟!
쿠르르릉!
2
탈리온 공작은 허공에 붉은 빛줄기가 생겨나는 것을 보고 칼자루에 손을 댔다. 그리고 빙판 바닥에서 미끄러지듯이 몸을 앞으로 쏘아내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앞으로 쏘아져 나간 것이 무색할 정도의 빠르기로 튕겨지듯 뒤로 날아갔다.
“크흑!”
‘빌어먹을….’
베르커스가 희번덕 웃으며 말했다.
“느려.”
세상천지에 탈리온 공작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니.
“망할 스승 같으니.”
“그래. 네 녀석이 그렇게 나와야 재밌지.”
베르커스의 움직임은 탈리온 공작의 숨을 막히게 만들 정도였다.
다른 이들이 봤을 때 베르커스나 탈리온 공작의 움직임은 그냥 어떤 선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초고속의 움직임으로 전투를 벌이는 둘.
그 속에서 베르커스는 더 빠른 움직임으로 격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었다.
탈리온 공작은 소름이 돋았다.
피핏!
베르커스의 손끝이 탈리온 공작의 어깨를 잡았다. 탈리온 공작은 재빠르게 튕기듯 몸을 빼냈다.
부우욱!
거칠게 옷이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잡혔다면 어깨가 뜯어져 나갔을 테니 말이다.
“실력이 조금 늘었구나.”
“스승님이야말로 더욱 강력한 괴물이 되셨군요.”
“큭큭! 그게 스승에게 할 말이더냐?”
“제자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스승도 있던가요?”
“말 한번 안 지는구나.”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지요.”
베르커스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물론 누구도 그 웃음이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멀찍이 뒤로 떨어져 둘의 전투를 주시하고 있는 케이는 숨도 쉬지 않고 둘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괴물들이 치고받는 모습.
이 세상의 존재들로 보이지가 않았다. 인간이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노력하면 저 경지까지 오를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할 것이다.
저 존재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초인의 경지를 넘어선 신인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베르커스의 손이 마치 또 다른 생물인 양 탈리온 공작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물론 탈리온 공작에게 허점이 있을 수 없으나, 베르커스의 손이 파고들어가는 곳이 허점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베르커스의 공격이 강하고 날카롭다는 것을 의미했다.
직선으로, 곡선으로 시시각각 변화했다.
형(形)이 없고, 태(態)가 없다. 숨을 내뱉고 들이쉬는 것조차 공격으로 느껴졌다.
탈리온 공작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풍운비상보와 청운신법의 2가지 경신법을 함께 발휘하고 있
음에도 탈리온 공작은 베르커스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할 뿐이었다.
아니, 자신이 정말 피한다고 피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탈리온 공작의 가슴에 두려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르커스는 태연자약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베르커스가 자신을 일부러 봐주고 있는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제자야, 어떠냐?”
“…뭐가 말입니까.”
“즐겁지 않느냐?”
“제자, 즐거워서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정말 죽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아직 할 일이 많아 그것은 차후로 미룰까 합니다.”
“큭큭!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어째서입니까?”
스왓!
탈리온 공작이 반응하기도 전에 베르커스의 전신이 눈앞으로 밀려왔다.
“나중에 저승에서 만나면 알려 주마.”
츠핏!
“크흑!”
탈리온 공작이 몸을 빼려 했는데 완벽하지 못했다.
얼굴에 깊은 상흔이 남았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자신의 심증이 말이다.
베르커스는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위를 앞세운 채 드래곤이 드워프를 가지고 놀듯 말이다.
탈리온 공작의 움직임은 버드나무 가지였다.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문제는 베르커스는 버드나무를 흔들다 못해 뿌리째 뽑아버리는 광풍이라는 데 있었다.
베르커스의 손끝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탈리온 공작의 전신을 그물처럼 얽어매고 있었다.
정말로 이제는 끝을 보려는 모양이었다.
베르커스의 손끝이 탈리온 공작의 미간을 파고들어왔다.
‘썩을! 대체 어떻게 해야….’
물론 탈리온 공작은 이대로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검에 기운을 몰아 강(?)을 일으킨 것을 넘어 더욱 강맹한 기운을 몰아넣었다.
바로 그때, 베르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탈리온 공작의 검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기운에 녹아 기화한 것도, 부서진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검이라는 사물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 검이 움직이는 대로 허공이 베어졌다.
“허공검(虛空劍)?”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안테르트 역시 베르커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공검이라니. 저 아이의 발전이 벌써 저기까지 이뤄졌다는 말인가!”
셀린이 물었다.
“허공검이라뇨?”
“지금 저 아이가 들고 있는 검의 이름이다.”
“검의 이름이요?”
“지금 저 검이 이동하는 곳이 어떻게 보이느냐?”
잠시 주시하던 셀린이 대답했다.
“허공에 검은 줄이 가 있네요.”
“허공에 검은 줄이 간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셀린이 결국 한숨을 토하고 말았다.
마치 선문답이라도 하는 듯한 안테르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지금 저 검은 줄은 차원의 벽이 베어지며 남는 상처 같은 것이지.”
셀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라그나 블레이드를 말하는 것인가요?”
차원의 신이 들고 있는 검의 이름.
라그나 블레이드.
그 검이 세상에 그어질 때 다른 차원의 틈이 열린다고 한다. 말 그대로 세상에 베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내용이다.
차원도 베어내는데 세상에 그 검 앞을 막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것과 비슷하겠군. 내가 다른 차원을 만들어낸 계기도 바로 저 허공검 때문이었지.”
검은 광망이 세상의 빛을 빨아들이듯 사방을 휘저었다.
탈리온의 공격에 베르커스는 속수무책으로 몸을 피할 따름이었다.
베어진 공간조차 몸이 닿아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공격이 허공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만일 저 베어진 공간을 가로질러 몸을 이동한다면, 그 부위가 매끄럽게 잘려 나갈 테니 말이다.
셀린이 말했다.
“지금 그 말씀은 안테르트 님도 저 허공검이라는 것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요?”
“물론이지.”
“베르커스 님도요?”
“그렇다.”
안테르트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베르커스 님께서는 저렇게 피하기만 하시나요?”
“위험하기 때문이다.”
“위험하다고요?”
“쉬운 문제를 내주마. 1 더하기 1은 무엇이냐?”
“2 아닌가요?”
“그럼 1 빼기 2은 무엇이냐?”
“마이너스 1이지요.”
“잘 맞혔다. 이번에는 다른 예를 들도록 하마. 너도 마법사이니 아마 충분히 알아차릴 것이라 믿는다.”
“예.”
“각각 같은 서클의 동등한 힘을 발휘하는 마법사가 둘이 있다. 그중 한 명은 500트라짜리 파이어볼을 만들었고, 반대 녀석은 300트라짜리 파이어볼을 만들어 같이 한 중심을 향해 쏜다.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음… 아마도 500트라짜리 파이어볼이 300트라짜리 파이어볼을 누르고 앞으로 나아가겠지요.”
“맞다. 그렇다면 500트라짜리와 500트라짜리의 파이어볼이 중심에서 부딪친다면?”
“폭발하지요.”
“그 파괴력에 대한 것도 아느냐?”
“아!”
셀린은 그제야 어째서 이런 번거로운 예를 들며 자신에게 설명을 하려는지 깨닫게 되었다.
같은 힘이 중앙에서 마주할 때, 그것은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5가 되기도 하고, 10이 되기도 한다. 동률의 힘이 서로의 파장에 맞춰 증폭되기 때문이다.
500트라의 힘 2개가 동시에 충돌을 한다면 5,000트라 이상의 폭발력도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검과 검이 서로 충돌을 해도 불똥이 튄다. 오러를 머금은 검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그런데 저 검의 원리는 기운을 모으고 모아 한계점을 지나, 차원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을 때까지의 기운을 압축하는 방식이다. 일종의 미니 블랙홀을 만들어낸다고 봐야 한다. 그런 거대한 힘이 충돌을 한다고 생각해봐라.”
셀린의 계산이 머릿속에서 신속하게 이뤄졌다.
동시에 답이 나왔고, 그 산출된 내용이 이해가 가기도 전에 등골이 오싹해지며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차원과 차원의 충돌!
그 파괴력은 상상 이상의 것이 될 것임이 확실했다.
“무섭군요.”
“그래서 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들지 않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저 갈라진 차원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위협하거든. 비효율적이다, 이 말이지.”
“그럼 베르커스 님께서 저렇게 피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요?”
“큭큭큭! 물론 방법은 있다.”
“방법이요?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피하기만 하시는 거죠?”
“저 아이가 저기까지 발전한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잠시 지켜봐 주는 것이지. 우리는 이미 저 단계를 지나서 있다.”
“저 다음 단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셀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놀라다 못해 입이 벌어진 셀린을 보며 안테르트는 조금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다.”
3
“많이 발전했구나.”
탈리온 공작이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며 대꾸했다.
“티가 나긴 납니까?”
“물론이다. 네 녀석을 죽이기 아까울 정도다. 허공검이라니.”
죽이기 아깝다는 말이 말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베르커스가 탈리온 공작을 향해 겨누었던 손을 거두었다.
“허공검이라니, 이 기술의 이름이 있습니까?”
탈리온 공작의 물음에 베르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안테르트가 지었지.”
왠지 맥이 풀리는 탈리온 공작이었다.
“보여 주십시오.”
“큭큭! 스승의 말이라면 우유로 치즈를 만든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구나.”
믿지 못할 수밖에. 아니, 믿고 싶지 않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기술을 창안하고, 완성한 후에 얼마나 기뻤던가.
이 정도라면 스승과 싸워도 어느 정도 답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이름이 있단다. 허탈한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다.
무엇보다 베르커스는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여 주었다.
베르커스의 손끝에서 검은 기류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과 손끝에서 형성된 것만 다를 뿐, 베르커스의 그 기운은 탈리온 공작의 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과 동일했다.
탈리온 공작의 얼굴에 피로가 밀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떠냐?”
“….”
탈리온 공작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베르커스의 말은 진실이었던 것이다.
탈리온 공작이 검에 밀어 넣었던 기운을 거뒀다. 검에 어린 어둠이 가시고 다시 정상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네 녀석은 우리의 예상을 깨는구나. 생각보다 더 훌륭해.”
“이제는 놀리시려는 것입니까? 뭐,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더 비참해질 것도 없습니다.”
탈리온 공작의 말에 베르커스가 혀를 찼다.
“스승이 하는 말을 좀 곧이곧대로 들어보는 것은 어떠냐.”
“스승님께서 하시는 말씀 중에 저를 죽이겠다는 말 외에 진실이 또 있었습니까?”
베르커스가 콧잔등을 긁었다. 탈리온 공작이 틀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니 사실이 그러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아마 우리를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 100년 정도 더 미친 듯이 정진한다면 말이지. 큭큭큭!”
탈리온 공작이 고개를 들고 의아한 시선으로 베르커스를 보았다.
믿을 수 없는 찬사였다.
처음으로 듣는 칭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베르커스는 무공에 관해서는 전혀 빈말을 하지 않았다.
100년 정도 수련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말. 시간이야 그렇다 치고, 가능성은 있다는 뜻 아닌가.
탈리온 공작이 흥분을 한 것인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베르커스가 다시 말했다.
“네 녀석이 지금 밟은 경지는 우리가 네 녀석 나이 때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경지다. 지금 네 녀석의 경지는 대충 우리가 네 녀석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에 비해서 조금 못 미치는 정도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기가 찼다.
저 노괴들이 얼마나 강한지 나름의 수치가 머릿속에 그려진 것이다.
“스승님들을 속여 가둔 일은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삼스럽게 뭘 그러느냐? 세상 살다 보면 제자가 스승을 죽일 수도 있고, 스승이 제자를 죽일 수도 있는 거지. 큭큭큭!”
언중유골이라고 했던가? 말속에 뼈가 담겨 있었다.
“저는 마인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누가 마인이 되라고 했더냐?”
“저는 순수하게 무공의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광기에 물들어 세상에 검을 드리우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개소리가 일품이구나.”
“저는 마령환을 받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큭큭큭!”
“….”
베르커스의 웃음에 살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안테르트가 둘 사이에 날아오며 말했다.
“그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마령환이었지.”
탈리온 공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안테르트를 향하게 되었다.
“마령환은 어찌했느냐.”
“사제에게 넘겼습니다.”
순간, 안테르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레온 말이냐!”
탈리온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는 천마지체다! 설마 모르진 않겠지?”
“알고 있습니다.”
“한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넘겼단 말이냐!”
“….”
안테르트의 물음에 탈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허허허허….”
안테르트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네 녀석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느냐?”
“….”
“표정을 보니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확실하구나. 어찌하여 우리가 네 녀석을 받아들였고, 키웠는지를 말이다. 네 녀석이라면 마령환의 힘을 이기고, 교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제 또한 그만한 자질이 충분합니다. 제가 굳이 그 짐을 짊어지지 않아도…!”
“바보 같은 소리! 우리 일월신교는 교주가 필요하지, 미친 악마는 필요치 않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안테르트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기 시작했다.
“천마지체는 마령의 기운을 흡수하기 위해 태어난 몸이다.”
“그러면 저보다 사제가 더 마령환을 끼워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미친 악마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레온 녀석은 처음부터 네 녀석이 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주화입마에 걸렸을 때 그 기운을 흡수시키기 위해 데려온 녀석이다.”
“예?”
“녀석은 마기를 흡수하기에 적합한 몸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 마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몸이라는 것이지.”
탈리온 공작은 그제야 조금 감이 왔다.
“마기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는 말은….”
“그놈은 마기의 노예다. 시간이 지난다면 마공을 익히지 않아도 골수까지 마기로 물들어 악마가 될 녀석이다. 일부러 찾아낸 것이지. 무엇보다 우리가 녀석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는 어차피 미쳐 죽을 녀석이라면 일월신교를 위해 순교하라는 뜻이었다. 그 전에 미친다면 본교를 위협할 몸. 미리 처리할 수도 있고 말이다.”
“어떻게 그런….”
탈리온 공작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하물며 그런 녀석이 본격적으로 마공을 익힌다고 생각해보아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악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본교의 기물인 마령환은 마기에 반응하고 힘을 주는 것으로, 악마가 원한다면 무한대의 힘을 공급할 것이다.”
“스승님들의 능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온 세상의 마물을 마기로 다스리고, 스스로 마왕이 될 존재를 누가 이길 수 있단 말이더냐. 드래곤이 와서 막는다고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모두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래곤이 와도 막지 못한다니… 온 세상의 마물들을 다스린다니. 그런 허황된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탈리온 공작은 안테르트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본교의 신물을 넘어서 그런 위험한 물건이라면 파기를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흥! 그 물건을 파기할 수만 있었다면 수백 번이고 파기를 했을 것이다.”
“마령환을 부술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마령환은 부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녹여서 없애기 위해 용광로나 용암에 집어던져도 녹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 일어나 주인을 찾는 기물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세상에 혈풍을 불러일으키지.”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베르커스가 중간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 일월신교는 그런 신물을 봉인하기 위한 곳이다. 처음부터 마령환이 우리 일월신교의 신물은 아니었다.”
“그럼….”
“일월신교는 세상에 내린 악의 뿌리를 찾아 멸하는 조직이었다. 악마가 나타날 때마다 태양과 달의 이름으로 막아섰지. 그리고 그때마다 마령환이 사건의 중심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마령환이 스스로 움직이고 선택하여 악마를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파악하게 되었지. 우리들은 마령환을 신이 세상에 내린 죄의 몫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신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어째서 그런 위험한 물건을 받아들인 것입니까?”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간단 말이냐.”
“….”
베르커스가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자, 다시 안테르트가 말했다.
“마령환은 어떻게 봉인하는 것입니까?”
“몸에 봉인하는 것이다.”
“몸에 말입니까?”
“마령환은 마기를 찾아 움직이는 신물이다. 어떻게 막는다고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일월신교의 장로들은 그렇다면 마기를 주축으로 심공을 만들어보는 것이 어떠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온 것이 천마신공이다. 천마신공은 그리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천마신공은 마기를 다루지만, 정심한 도가 계열의 심공을 기반으로 만든 것이기에 이지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령환을 봉인하기에 제격이었지. 그리고 시험을 하게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 마령환이 천마신공을 익힌 자를 주인으로 여기는지 다른 주인을 찾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부작용은 없었습니까?”
“흠… 부작용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기를 다루는 마공이다 보니 개인에 따라 약간 성격이 급해지거나 괴팍해졌다. 하지만 마령환의 마기를 억누르면서 악마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이라 볼 수 있었다. 어찌하여 우리가 교주를 교주로 모시는 줄 아느냐?”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물을 스스로의 몸으로 봉인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려 하는 존재가 바로 교주다. 태양과 달의 자식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위대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겠느냐. 그때부터 마령환은 일월신교의 신물을 넘어 교주의 신물처럼 된 것이다.”
“아아….”
탈리온 공작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인지 지금에야 알게 된 탓이다.
“밀턴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베르커스와 안테르트가 동시에 의문을 드러냈다.
“밀턴?”
“예. 장로원의 장로 말입니다. 마령환을 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마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열망 때문에 그의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리온 공작이 말을 이어나가려는 찰나, 베르커스가 말을 끊었다.
“잠깐.”
“…?”
베르커스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밀턴이라는 그가 대체 누구냐?”
항상 허리를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스스로를 노예라고 칭하던 밀턴.
그가 지금 당당히 허리를 편 채, 레온 프라메트 1세가 앉는 왕좌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크크크크….”